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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이스콘 Mar 16. 2021

지은이 배정순

#지은이 배정순 01.

“하히고...내 살아온 인생도 책으로 쓰면 웬만한 소설 한 권은 되겠제...”

친정집 문갑 안의 사진들을 꺼내 보고 있자니 뒤에서 엄마가 그러신다. 나는 친정에 내려갈 때마다 옛날 사진 보는 것을 유독 좋아한다. 형제 중 가장 먼저 집을 떠났던 탓인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부모님과 같이 살았던 기간이 가장 짧았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언니, 오빠는 알고 있고 나만 모르는 가족의 옛 이야기를 사진으로라도 알아놓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다. 부모님의 젊은 시절 사진은 볼 때마다 신기하다. 젊었을 적치고 배우 뺨치지 않는 인물이 어디 있을까마는,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당신들의 청춘이 그저 믿어지지 않을 따름이다.     


언젠가 내가 책을 내게 된다면 우리 엄마 이름으로 필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책은 공저로 출간하는 바람에 불가능했고, 두 번째 책은 출판 계약이 이를 막았다.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는 계획이었던 지라 그리 분할 일은 아니었지만, 첫 출판의 아쉬움이 그에 걸었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나의 이런 속을 알 리 없는 부모님은 막내딸의 책을 들고 세상없이 기뻐하셨지만, 오히려 나는 죄송했다.   

  

엄마의 이름을 먼저 내세우고 싶었던 건 당신 인생에 묻혀버린 그 총기가 아까워서였다. 그 시절 대부분 여성이 그랬듯 대학에는 가지 못하셨다. 올해 일흔일곱 되신 우리 엄마는 을유년 닭띠, 45년생 해방둥이다. 해방되던 해에 태어났다는 것은 그 연배의 어른들끼리만 누리는 공감대가 있다. 아빠가 지어준 엄마의 이메일 아이디는 ‘815koko’였다. 비록 대학은 못 갔지만 자매 중에서는 유일하게 안동에서 대구까지 나와 중·고등학교를 다니셨다고 한다. 그때의 반 친구가 지금의 우리 고모이니, 엄마는 친구 오빠와 결혼하게 된 셈이다. “내가 저거를 만나서 인생이 이래 꼬였제”라고 부르는 우리 고모는 아빠의 바로 아래 여동생이다. 그 동생 말고도 남동생 둘, 여동생 다섯을 더 둔, 10남매의 맏이에게 시집을 왔다. 엄마의 인생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이런 층층시하에 시집온 이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풋, 인물에 속았지...”

라고 흘리는 대답에선 내가 가늠할 수 없는 당신의 청춘이 뭍어나 마음이 아렸다.   

  

엄마는 늘 바쁘셨다. 당신 직업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잠잘 시간조차 부족해 보였다. 자식도 많고, 친척도 많고, 제사도 많고, 아빠 일도 도와야 하고 집안 살림도 해야 했으니, 여유가 없는 인생이었다. 집 안에는 별별 사건도 또 많아서 항상 친척 대소사에 동분서주해야 했다. 자식들이 크고 나니 이번엔 손자까지 키워야 했다. 그때 오빠는 병원에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고 새언니도 레지던트 시절이어서, 엄마가 자청해서 키워주겠다 선언하셨다. 큰 조카를 키우시던 때까지의 엄마는 꼭 당신 인생의 마지막 에너지를 다 쏟아내는 듯 보였다. 조카가 네 살이 되어 자기 집으로 돌아갔을 때, 엄마는 그동안 전속력으로 달리던 인생이 딱 멈추는 것 같았다고 했다. 물론 이것도 나중에 들은 얘기다. 일찍이 집을 떠났던 나는 엄마 인생의 변화를 세심하게 살피지 못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달라이 라마를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도 절에는 다니셨지만 본격적으로 경전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엄마가 갑자기 다람살라에 가신다고 했을 때 오빠는 펄쩍 뛰었다. 그때는 사스가 유행하던 시기여서 더 걱정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60대의 엄마는 젊었던 편인데, 당시 우리 눈에는 엄마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될’ 노인처럼 보였던 게다.


“엄마가 가고 싶다 안카시나. 느그들은 아무 소리 하지 마라.”

아빠의 이 한마디가 큰 지원이 되어 엄마는 그해 다람살라에서 열리는 달라이 라마 법회에 다녀오셨다. 예순아홉되던 해에는 카일라스 등반을 떠나셨는데, ‘내 이제 칠십 넘으면 안 갈께’라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 뒤로도 세 번을 더 달라이 라마 법회를 찾아 고행 같은 여행을 다녀오셨다. 그런 힘든 여행 말고 그냥 관광을 가시라고 권했을 때 내게 돌아온 대답은 더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놀아본 적이 없어 어떻게 놀아야 되는지 모르겠다’라는 것. 그러고보니 아무리 기억을 짜내어 보아도 내 어린 시절 기억하는 엄마에게 ‘여가’란 없었다.     

두 번째로 다람살라를 찾았을 때 달라이 라마는 몇백 명의 집회자의 질문을 쪽지로 받았다고 했다. 그게 우연히 당첨이 되어 엄마가 제출한 쪽지가 달라이 라마의 마이크를 탔다. ‘나이가 드니 부모로서 또 자식들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싶은 것들이 생기는데, 어떻게 서로 기분 상하지 않게 내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지’를 질문하셨다고 한다.


“자비로 대하라.”


달라이 라마의 이 대답은 그 뒤로 엄마가 가슴에 품고 사는 평생 지침이 되었다. ‘그런 애매한 대답은 나도 하겠네’라는 나의 퉁명스런 반응에 엄마는 또 빙긋 웃으신다.

“배움이 부족하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제...”

얘기를 꺼낸 나만 머쓱해진다. 인생, 얼마나 배워야 머릿속이 말끔하게 답이 보이는 걸까.  

   

오랜만에 친정에 갔다.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는 언니 오빠와 달리 엄마는 나를 손님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다. 언니에겐 미안하지만, 멀리 산다는 턱을 톡톡히 보는 셈이다. 자주 못 보는 막내 사위가 아직 어려우신 탓도 있을까. 내가 돕는다고 해도 매끼 상을 차리는 일은 힘든 일인데, 매번 상다리가 휘어진다. 이런 식이면 나는 친정에 다녀오는게 맞는지 아닌지가 항상 헷갈린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제”라는 농담을 핑계 삼아, 염치없이 친정밥을 얻어먹으러 간다.    

 

이튿날 새벽. 오랜만에 코가 삐뚤어지도록 자리라 마음먹고 어제 잠자리에 들었지만 버릇처럼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거실로 나와보니 엄마 방에서는 벌써 불빛이 새어 나오고, 중얼중얼 법문 읽으시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는 매일 아침 4시 반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법문 공부를 좀 하신 후 아침을 차리신다. 법문 공부와 아침 식사 준비 사이에 ‘마사지 의자에 앉아 30분 정도 쉬는 것’이 일상이 된 게 최근의 변화인데, 그게 또 나이 먹은 탓이라고 내심 서운한 눈치이시다. 엄마 방 불빛을 확인하고 나는 그냥 조용히 다시 남편과 아이가 자는 방으로 돌아갔다. 당신 기도소리에 내가 깬 줄로 아시면 또 미안해 하실테니, 엄마 나오시면 마치 그때 일어난 것처럼 눈 비비며 나가야지. 어줍잖은 이해심을 내어본다.

     

그러고보니 엄마의 살아온 얘기를 그리 속속들이 알지는 못한다. 엄마의 인생은 그동안 드문드문 들었던 에피소드들을 듬성듬성 몇 개 알고 있는 정도이다. 그렇다고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물어보아도 뭘 그리 꼬치꼬치 캐묻느냐며 한사코 대답을 피하신다. 지나간 인생은 뒤돌아보고 싶지도 않다셨다. 그래도 엄마의 인생을 글로 한번 정리하고 싶다는 바람을 아직 버리지는 않았다. “지은이 배정순”. 내 노트북 바탕화면의 이 폴더도 아직 비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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