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니 두개가 삐죽 보일락말락 두 개 올라온다고 좋아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여러 개가 빠졌다. 제일 먼저 났던 이가 가장 먼저 빠지길래 모두 올라온 순서로 빠지는가 싶었더니 그건 또 아니었다. 이가 나고 빠지고 다시 난다는 일은 나도 다 겪어보았던 것인데, 자식일이 되고 보면 모든 것이 처음인 듯 신기하다.
예전에는 이가 흔들거려 저절로 빠지는 것인 줄 알았다. 영구치가 밀고 올라오면서 유치의 뿌리를 녹이고 그래서 뿌리가 짧아졌기 때문인 줄은 몰랐다. 영구치들이 이미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나올 순서를 기다리며 숨어있는 줄도 몰랐다. 처음 아이의 잇몸 엑스레이 사진을 보았을 때 놀라 호들갑 떨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쑥스럽다. 나올 차례를 기다리며 잇몸 속에 둥둥 숨어있는 영구치들이 마치 꼬마 유령들처럼 보였다. 그동안 내가 배운 지식은 모두 무용했던 듯, 새롭게 알아가는 것 투성이였다.
올해 초 어느날, 아들이 내게 물었다. "엄마는 나를 왜 낳았어요?". 드라이브 쓰루에서 커피를 기다리던 중 받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리 심각한 어투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래도 평소 우문우답을 장난치듯 주고받는 모자인데, 그날의 질문은 다소 진지하게 다가왔다. 전혀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말이다.
"자식이...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았어."
뜻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평소와 다른 태도에 놀랐는지, 아님 기대했던 대답(예를 들면 '사랑하니까 낳았지' 등)이 아니었는지, 눈만 껌뻑대며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게 내 제일 솔직한 대답이었다.
우리는 결혼 4년 차에 아이를 가졌다. 별다른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특별히 서두르지 않다 보니 시간이 그렇게 되었다. 그 시간 동안 양가 부모님의 마음은 절대로 여유롭지 않았는데, 둘 다 마흔을 목전에 둔 나이었으니 더욱 그랬을 것이다. 우리 엄마는 임신에 좋다는 각종 민간요법을 구하러 다니시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나만 보면 병원에 가보자고 재촉하셨다. 그런데 정작 당신 아들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점이 항상 서운했다. 병원 이야기는 남편이 없는 데서만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서 하나는 꼭 낳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거나 애정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 무렵 자연스럽게 아이가 찾아왔다.
그래서 나는 외동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하나만 있다는 것은 엄마들 사이에서 가끔 애매한 위치일 때가 있다. ‘무자식 상팔자’와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의 경계라고나 할까. 나는 아이 또래 엄마들보다 나이가 꽤 많은 편인데도 육아에 있어서는 매번 초보 취급을 받는다. 엄마들의 대화가 ‘첫째 때는, 둘째 때는’으로 시작하는 주제로 접어들기 시작하면 일단 함구해 버린다. 정말로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다. 그냥 그동안의 불편한 경험에서 나온 나름의 처세술이다.
인생의 지혜가 아이를 키운 수만큼 비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아이가 없다고 하여 지혜롭지 못하다는 얘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각자의 이유가 있을 뿐이다. 아이가 없는 부부는 오히려 긴 세월을 오롯이 두 사람만으로 채워가는 지혜를 닦고 있을 것이다. 외동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 서로 다른 인생은 모두에게 그저 ‘가지 않은 길’이니 옳고 그름을 덧붙일 수 없다.
엄마가 된 뒤로 내게 없던 혜안이 생겼다거나 인생이 풍요로워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번뇌와 고통이 늘었다면 모를까. 세상에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꽤 많다는 것만은 확실히 깨달았다. 그래도 이전의 삶보다 좋은 점이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부모님의 인생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는 것. 시어머니에게 서운했던 감정도 아들을 키우면서 조금씩 사그라드는 중이다.
세상일은 다 아는 줄 알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호기가 한풀씩 꺾여가고 있다. 어린 이가 빠지고 다시 나는 지극히 당연스러운 일도 신기한 발견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 사소하지만 새로운 깨달음이 일상을 툭툭 치고 들어올 때가 있다. ‘다 새끼 덕에 배워가는 인생’이라던 엄마의 말은 옳았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