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얼그레이스콘 Mar 16. 2021

나의 봄은

#지은이 배정순 03.

나는 3월생이다. 스무 살 때 나와 같이 일본어를 배우던 친구는 ‘너는 봄에 태어났으니까 하루꼬(春子) 아니면 하루미(春美), 아니면 삼월이라 부르면 되겠다’고 놀리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봄과 특별히 무슨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었다. 엄마의 문자를 받고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몇 해 전 봄, 엄마는 ‘부추김치 좀 담아 보내줄까’라고 문자를 보내셨다. 당신 힘드신 게 싫어 ‘괜찮다’고 답을 했다. 여기에 돌아온 엄마의 대답에 멈칫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봄맛이라서...”    

  

전혀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 내가 봄에 나오는 채소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부추가 봄이 제철이라는 것도 몰랐다. 그냥 마트에 가면 사시사철 파는 풀이니 특별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부추 뿐이 아니다. 더덕, 쑥, 냉이, 달래와 같은 봄 채소 반찬도 좋아했다. 그런데도 그건 누구나 다 좋아하는 것이라 나만 특별한 입맛은 아니라 생각하고 살았다. 게다가 쑥국은 한 번도 직접 끓여본 적이 없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미역국이라 생각했었고, 그래서 미역국 하나는 자신있게 끓인다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음식은 다 만들어 먹고 산다고 큰소리를 쳤다.      


내가 ‘봄맛’을 좋아한다는 걸 미처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엄마는 그렇게 내게 봄기운을 챙겨주고 계셨다. 물에 불려 몇 번 씻기만 하면 되는 미역과 일일이 흙을 털고 다듬어야 하는 쑥은, 손가는 단계부터 다르다. 쌀뜨물을 내고 된장을 풀고 쑥이 너무 퍼지지도 않게, 그렇다고 설익지도 않게 끓여내야 하는 꽤 어려운 요리이다. 들깨 가루도 너무 적지도 않게 너무 뻑뻑하지도 않게 뿌려야 한다. 나의 봄은, 해마다 엄마가 끓여주는 쑥국에 밥 한술 말아 젓갈 냄새 푹푹 나는 부추 김치 한 젓가락 올려 먹는 ‘의식’으로 시작되었던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학교 다니면서 혼자 살 때에도 생일날 미역국은 꼭 만들어 먹었다. 그런데도 봄에 쑥국은 꼭 집에 내려가서 먹었다. 새학기는 한창 바빴지만 봄에는 꼭 내려갔다 왔다. 그리고 다시 올라올 때면 항상 양념한 더덕구이 한 통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 내가 친정에 간다고 하면 엄마는 더덕부터 사러 가셨다고 한다. 웬만한 음식은 다 해 먹고 산다고 자신했건만, 생각해보니 손 많이 가는 봄나물 반찬은 엄마가 해주는 것만 먹고 자란 철없는 딸이다.      


박사 논문으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되었던 시절을 잊을 수 없다. 그해 봄에 엄마는 몇 달은 먹어도 될 만큼의 더덕구이를 일일이 비닐팩에 소분하여 얼린 다음 녹지 않게 포장하여 택배로 보내주셨다. 그 박스를 풀다가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때의 나는 한 아이의 엄마, 며느리, 아내, 주부로 살면서 동시에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엄마의 반찬을 받아들고 잠시 온전한 나로 돌아갔던 것 같다. 실컷 울고 일어나니 다시 달릴 수 있었다.    

 

겨울이 끝나간다. 어제 오늘은 날씨가 봄날처럼 따뜻했다. 시장에도 벌써 봄부추가 나왔으니 연휴 동안 부추김치나 담아 볼까. 그리고 이제는 혼자 쑥국도 끓일 줄 알아야겠지. 하지만 아직 쑥국만은 더 응석을 부려보자. 언젠가는 나 스스로 봄을 맞아야 할 때를 대비하여 모두 배워 놓아야 마땅하겠지만, 가능하면, 될 수 있으면, 그런 날은 조금만 더 천천히 왔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젖니_유치_乳齒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