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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이스콘 Mar 16. 2021

서로를 생각하다가 마음이 아프다.

#지은이 배정순 04.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건 참 속상한 일이다. 누군가는 30대 중반부터 40대 중반이 가장 좋은 시기라고 했다. 인생이 어느 정도 궤도에 접어들었고 무엇보다 아직 부모님이 건강하시니 좋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동의했고, 나도 그런 40대를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기만 했던 이기적인 마음이었나 보다.     


지난달 아빠는 전립선암 3기 진단을 받으셨다. 사실 20년 전에 대장암 수술을 한번 하신 적이 있고 오랜 노력 끝에 몇 년 전 완치판정을 받기도 하셨다. 큰 병은 한번 넘긴 셈이라 이제 조심만 하시면 되겠다 싶었는데, 여든을 넘긴 연세에 다시 암이라니, 무섭고 두려웠다. 게다가 나는 아빠의 수술 일정이 잡힌 뒤에야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미 작년 가을께부터 각종 검사를 거치는 중이었다고 한다.      


친정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구에서 병원을 하는 오빠는 그동안 지인을 총동원하여 아빠가 가장 빨리 치료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고 했다. ‘사이버 나이프’라는 것이 대구에 몇 대 없어 대기가 너무 길어지는데, 마침 원자력병원에 대학 동기가 있으니 그곳에서 치료받는 게 낫겠다는 것이다. 간호하는 엄마는 힘드시겠지만 그래도 가장 단기간에 빨리 끝낼 수 있는 방법으로 결정했다고 했다. 이틀 뒤에 두 분이 함께 올라가실 테니 역에 좀 나와달라고 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아마 대구에서 치료받으시게 되었다면 내게는 알리지도 않으려던 심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비절개로 이뤄지는 ‘사이버 나이프’라는 수술은 일주일 동안 하루 40분씩 진행되었다. 하지만 병원에 계시는 동안 자주 돌봐드리겠다는 내 계획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코로나로 인해 보호자 한 명밖에 상주가 허락되지 않았고, 엄마 대신 내가 있는 것도 싫다고 하셨다. 내가 병원에 있는 동안 아이를 시댁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 ‘말이 안된다’는 이유였다. 치료받는 팔순 노인의 건강도 문제였지만 그동안 옆에서 간호해야 하는 엄마의 건강도 걱정이었다. 우리 집에서 원자력병원까지 가까운 거리도 아니라고, 엄마는 내가 병원에 들리는 것도 매번 말리셨다.    


“오지 마라! 와도 못 본다. 코로나 때문에 여기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한다.”라고 하실 뿐이었다. 사실 워낙 방문객 통제가 엄격해서 로비까지밖에 출입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럼 잠깐 가서 세탁물이라도 받아오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싫으시단다. 그래도 가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지 마라카이!”라며 로비로 급히 내려오신 엄마의 얼굴에는 언제나 반가움과 미안함이 배어 있었다. 그 표정이 매번 화가 날 정도로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마스크를 올리는 척하며 얼른 닦았다.     


다행히 수술은 잘 되었다. 이제 한 달에 한 번 올라와 검사하고 주사와 투약 치료를 하자는 처방이 내려졌다. 퇴원하시는 날도 두 분이 알아서 택시 타고 가신다는 걸 거의 화내다시피 설득해서 차로 겨우 모셔다드렸다. 병원에서 역까지 가는 동안, 뒷자리에 앉은 아빠는 또 멋쩍은 농담을 꺼내신다. “아, 서울에 딸 있으니 좋네! 이럴 줄 알았으면 막내이를 하나 더 낳을 걸 그랬데이.” 아빠의 익숙한 농담이다. 내가 부모님께 조그만 무엇이라도 해드렸을 때면 항상 그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또 마스크를 안경 밑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 벌써 한 달이 지나 다시 서울에 올라오실 때가 되었다. 이번에도 내 도움을 극구 거절하셨다. 시댁에 아이를 맡기고 나와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사돈네 폐 끼치는 건 또 싫다 하신다. 몇 번의 전화 실랑이가 오갔지만 끝내 거절하셨다. 혹시나 내가 역으로, 병원으로 나올까봐, 기차 도착 시간도 진료 예약 시간도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게 며칠 전의 일이다.   

  

그렇게 그날 하루는, 집에 있어도 마음이 딴 데에 가 있는 듯 불편했다. 서울역인지 수서역인지만 알면 나가볼 텐데, 그마저도 알 길이 없다. 진료객이 아니면 들어갈 수조차 없으니 무작정 병원으로 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어이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저녁 6시. 드디어 엄마 전화가 왔다. 이제 내려가는 기차에 탔다고 하신다. 수술 한 달 이후의 경과가 좋아서 이제 석 달 후에 오면 된다고 했단다. 엄마 목소리가 밝았다. 다달이 서울 올라와야 한다는 걱정을 덜어서인지 수술 경과가 좋다는 말에 안도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혹시 애써 밝게 말씀하시는 건 아닐까. 자식에 신세지지 않고 오롯이 노인네 두 분이서 오늘 할 일을 끝냈다는 안도감이겠다는 생각에 다다르니, 대답하는 내 목소리가 다시 떨리려고 한다. 다음 대화를 잇기가 어려워 얼른 아이를 바꿔드렸다.     


자식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부모 발끝만치도 못 따라간다는 것쯤은 이제 나도 알고 있다. 도와드리겠다는 내 마음보다 도움을 받지 않겠다는 당신들의 고집에는 더 큰 배려가 있으리라. 그래도 이런 상황은 참 모순된다. 우리는 매번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생각하다가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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