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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이스콘 Aug 24. 2022

영화 <라스트 레터>

지극히 사적인 영화 감상

<라스트 레터> 2018. 이와이 슌지.

넷플릭스 랜덤추천으로 뜨길래, 이와이 슌지 감독인 줄도 모르고 순전히 마츠 타카코가 나온다하여 틀어보았다. 제목도, 장례식 장면도 비슷하고 주인공 고향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구도로 시작하는 것도 비슷하여, 뭐야 이거 러브레터 베낀건가? 했더니, 아니나다를까 같은 감독! 우리나라에선 작년초에 개봉했다는데 뒤늦게 알았다.


여주인공이 도서관 사서인 것도, 고교시절 도서관 회상씬도, 매미소리도...처음엔 여러가지로 <러브레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비교가 되니, 러브레터의 여운이 깊었던 경우라면 이 영화를 온전히 즐기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처음엔, 이와이 슌지가 출세작의 방식을 또 우려먹는 건가 싶었는데, 단순히 그런 치기처럼 보이진 않는다. 감독 스스로가 러브레터를 의식하고 만들었다고 했다는데,  그것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어떤 마무리를 지으려는 것 같기도 하다. 이와이 슌지 영화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첫사랑' 모티브에 대한 과감한 정면승부같기도 하고, 23년전 영화 러브레터의 오마주이자, 작별인사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라스트레터인가..라는 어설픈 추리도 해 보게 된다.

아무래도 감독의 의도인 것 같은데, <러브레터>의 주인공이었던 나카야마 미호와 선배역이었던 토요카와 에츠시도 잠깐 나온다. 세월에 역변한 두 배우의 특별출연은 단순히 감독과 친분이라기 보다는, 러브레터의 환영을 이제는 끊어버리고 싶다는 메세지같기도 하고, 첫사랑의 부질없음에 대한 장치인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여러가지로 묘했다.

23년전 영화 러브레터가 20대의 관점에서 돌아본 첫사랑이야기였다면, 이건 40대가 되어 돌아본 좀더 초월한 감상의 첫사랑. 첫 사랑의 아름다운 추억이라기보다, 아직 무엇이든 꿈꿀 수 있었던 시절, 청춘에 대한 그리움인 것도 같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사키가 딸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가 고교졸업 때의 축사원고였다는 점도 그렇고.


잘은 모르겠으나, 일본 대중문화의 첫사랑 소재는 '청춘=과거=전성기=쇼와'로 이어지는 노스텔지어처럼 보인다. 그러고보니 스무살때 일본어 선생님(일본인)이 마츠토야 유미의 <졸업사진>을 들려주며 본인이 더 감상에 빠진 듯하셨으나, 1도 공감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껌뻑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 점은 한국과 대조적인데, 한국에선 고교 낭만 같은 이야기가 그 옛날 '고교얄개'급에서 이미 명맥이 끊어진 듯. 고교시절, 하면 낭만보단 청소년문제, 방황, 극단적으로는 <소년심판>같은 얘기가 더 잘 팔리고 있으니 말이다.

영화 감상의 나름 총평은 "재미있었다"로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사실 근래 몇 편의 일본 영화를 시도했다가 중간에 덮어버렸는데, 이건 끝까지 잘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 문득문득 '만약 이게 K-각본(a.k.a 막장)이었다면?'이라는 생각에 다음과 같은 상상도 해 보았다.


1. 죽은 언니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던 유리(마츠 타카코)가 언니의 첫사랑 오토사카(후쿠야마 마사하루)과 의도치 못한 사랑에 빠지는 불륜.

2. 엄마를 쏙 빼닮은 첫사랑의 딸 아유미(히로세 스즈)와 오토사카가 옛 고교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을때 "사실은 내가 네 아빠야!"라는 출생의 비밀.

3.오토사카가 첫사랑 미사키의 동생 유리(마츠 타카코)에게, "그 시절 내가 정말로 사랑했던 건 언니가 아니라 너였다규! 하지만 어쩔수 없었어..네 언니때문에"라는 삼각관계.

4.아유미와 오토사카의 25년 나이차를 극복한 금단의 사랑...(아, 이건 너무 범죄라서 안되겠다.)

사실 극에 조금 개연성없는 부분도 있고, 일본 극본 특유의 생략도 심하고 해서 조금 불만도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좀 건너뛸 수도 있지 않은가도 싶다. 이게 무슨 상품설명서나 보험약관도 아니고, 나머지는 관객의 상상에 맡겨도 무방하지 않은가 싶다.

예를 들면, 유리(마츠 타카코)가 언니의 동창회에 대신 나가 언니의 부고를 전하지 못하고 얼떨결에 언니 행세를 하고 돌아오는 건 말이 안된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꼭 그렇지도 않다. 말할 타이밍을 놓쳤거나 굳이 얘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어찌하다보니 거짓말한 것이 되어버린 결과. 누구나 한번쯤 겪지 않았나?


어쨌거나 이 영화. 히로세 스즈의 미모가 열일했다. 마츠 타카코의 대사는 언제 들어도 딕션이 훌륭하여, 나같은 일본어학습자에겐 좋은 듣기 공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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