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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얼그레이스콘 Aug 30. 2022

녹색어머니회 소고

'국민학교' 출신의 초등학생 키우기


아이학교 녹색어머니회는 학부모된 고충을 가족에 생색내기 딱 좋은 연중 행사이다. 평소 5시쯤 일어나니 아침 8시반이면 내게 사실 정오처럼 멀쩡한 시간인데, 그래도 괜히 '나 오늘 녹색'이라며 아침부터 남편에게 바쁜 티를 팍팍냈다. 대단한 거 하러 가는 마냥 콧바람 뿡뿡대며 나왔지만, 30분을 교차로에서 깃발놀이 하는 게 전부이다.


청기백기(이거 알면 최소 옛날 사람^^)도 아니고 노란 깃발 펄럭이다 끝나는 허무한 봉사. 게다가 멀쩡한 신호등도 있는데 내가 깃발을 접었다폈다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 학교가는 길에 학부모가 함께한다는 퍼포먼스인가?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마을이 필요하다'는 뭐 그런 선전인가...온갖 음모론이 발동하던 어제 아침 30분.


낡은 얘기이다만, 나의 '국민'학교 시절에는 교통지도를 선도부가 했었다. 하지만 만약 요즘 아침 시간을 빼내 애들에게 그런거 시켰다간 항의와 비난이 빗발칠 지도 모를 일이다. 밤늦게까지 학원 다녀오신(!) 아이들의 피곤하고 소듕한 아침시간을 말이다. 학교가 대놓고 학원을 권장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원. 


요즘 초딩은 반청소도 청소아주머니들이 대신 해준다던데, 일렬횡대로 쪼그리고 앉아 교실바닥에 왁스칠하며 청소했던 나에게 요즘 초등생활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얼마전 아이가, 선생님이 자기자리 청소하라고 시켰다며 한껏 툴툴거리며 돌아온 적이 있다. 순간 "라떼는 말이야"가 튀어나와 일장 연설이 길어지는 바람에, 잠시 모자간에 냉랭한 기운이 흘렀더랬다.


그래도 나는 교통지도도 그렇고, 청소도 그렇고, 아이들이 직접 그런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사회공부의 일종이라 생각하는데, 국민학교 출신답게 고리타분한 의견인지도 모르겠다. 지원이가 "엄마는 '급당(급식담당)'도 안해봤잖아요!"라고 따졌는데, 아들아, 들어는 봤니. 조개탄 담당..쿨럭!


미션 클리어하고 위풍당당(?)하게 돌아오던 길


녹색으로 생색을 좀 부렸지만, 생각해보면 옛날 엄마들이 학교에 더 자주 불려다녔던 것 같다. 예산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육성회다 어머니회다 해서 대놓고 찬조금과 기부물품을 받던 시절이었지 않은가. 울엄마는 삼남매가 한 학교에 다닌단 죄로 진짜 학교에 각종 잡일들을 많이 했었다. 


압권은 내 1학년 운동회날이었는데, 삼남매 담임의 도시락과 간식을 다 싸고 시간맞춰 각 반을 순회하시던 엄마가 기억난다. 그리 즐거운 표정은 아니셨지만 그렇다고 싫은 얼굴은 아니었고, 뭔가 비장했던 것 같다. 게다가 오빠가 전교회장이어서 또 얼마나 도시락에 신경을 쓰셨을까 싶다. 쓰리 찬합을 들고 흰색의 길이 낙낙한 플리츠스커트를 입으셨는데, 그 발걸음에 치맛자락이 어찌나 펄럭이던지.


다시 선도부 얘기로 돌아오자면, 당시 선도부는 크게 교통지도반이랑 명찰검사 담당이 있었다. 선도부가 교문에 서서, 가슴팍에 명찰 안 달고 오는 애들 잡아내는 것. 와...지금 생각하니 무시무시하다. 정말 '국민'학교스럽다. 그런데 사실, 정작 선도부랑 마주칠때마다 언니오빠랑 한 학교에 다닌 덕을 좀 보긴했다. 명찰은 꽤 잘 달고 다니는 편이었지만 혹시 깜빡한 날이라도 선도부 언니오빠들이 그냥 통과 시켜준 적이 많았다. '누구누구 동생'이라는 것이 나름 꽤 쏠쏠한 혜택이었던 셈인데... 지금 생각해보니, 예끼 쬐깐한 것들의 비리였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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