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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속도로 May 28. 2023

1,000,000원

백만 원쯤 없더라도 잘 살 수 있으니까.

몇 주 몇 달에 한 번 보는 얼굴이 늘어간다. 잘 지내냐는 인사가 부자연스럽다 느껴질 때면, 한결 너그러운 ‘어떻게 지내'를 애용한다. 진짜 궁금하기도 하고.


내 지난 한 달은 안온한 불만, 거북한 평화였다. 폭풍전야는 아니고 태풍의 눈 위에 난 다래끼 같은. 이유 없이 싸하고 울컥 자존심이 상했다. 정신을 다잡아야 한다. 자칫하면 종일을 시선 삐딱한 투덜 쟁이와 동행해야 하니까. 그건 싫다. (극-복했다.)


와중에 옷도 없다. 계절은 왜 네 가지나 돼서 사시사철 나를 가난하게 만드는지··· 가을 겨울만 있어도 충분할 텐데.


평소 과소비를 지양한다. 같은 옷을 사더라도 중고장터부터 둘러본다. 벌거벗고 다닐 정도로 옷이 없는 것도 아닐뿐더러 옷이라는 수단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꿈이라는 허울과 맹목적인 경험을 핑계로 설득되지 않은, '남이 좋다 말하는' 옷에 큰 돈을 쓸 순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예수금 1,000,000원을 (쿨하게) 꺼냈다. '어차피 노는 돈, 내가 한 번 제대로 놀아주마' 하는 마음으로. 근데 막상 결제창 앞에 서면 여전히 신중하고 겁이 많았다. '실패는 성공의 아주머니'.. 뒤로가기 버튼을 어물쩡히 눌렀다.




고기는 먹어본 놈이 잘 굽는다. 쇼핑도 마찬가지. 잘 파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게 '잘 사는 것'이다. 옷을 알고 나를 아는, 소위 '잘' 사는 녀석들은 자연스레 옷 잘 입는 현대판 '호모하빌리스'가 된다. 늘어가는 번개장터 판매 내역이 내 실패를 공연하는 것 같아 쑥쓰러울 때가 있다. 결국 니들스 트랙팬츠와 살로몬을 구매했다. 정말 필요한가? 라는 짙은 주석을 따돌린 물건들.


이게 시발비용일까? 구별되길 바란다. 옷은 일종의 언어다. 발 없는 말이며 말 없는 발이다. 옷에 국한되지 않더라도 우리 모두는 각자가 속한 영역에서 잘 사는 연습을 해야겠다. 합당한 경험이야 말로 성공의 친어머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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