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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un 16. 2016

[포토에세이] 사 분의 일, 하루 #3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사분의 일, 하루 #3>


05:44

알람 20분 전. 기지개 켜기, 누워 다리 들어 올리기, 발바닥 두드리기, 두 팔 펴기, 오므리기. 주먹 쥐기, 누워 다리 들어 올리기, 기지개 켜기, 발바닥 두드리기, 두 팔 펴기, 오므리기. 주먹 쥐기, 더 반복 더.


06:10

검은쌀, 흰쌀 씻어 압력솥으로 밥 짓다, 감자-양파-당근을 섞어 볶음, 고사리 조기매운탕을 끓인다.


06:40

세수하고 머리감고, 드라이기로 말리고, 화장하다.


07:10

얘들아. 일어나라. 이불 속 아이들이 움직이지 않는다. 30분이 지났어. 일어날 시간 지났네. 어서 일어나. 작은 둥이가 움직인다. 큰 둥이는 여전히 동함이 없다. ‘김현정의 뉴스쇼’, 볼륨을 높이다.


이상하다. 왜 이리 안 일어나는 거지? 얘들아! 늦었다고요. 어서 일어나(내 목소리 가시가 돋혔다. 음역도 넓어졌다)! 남편이 아이들을 부른다. 쌍둥이 이리 와 봐라. 어제 숙제 내 준 것 보자. 아아... 안 했는데...요, 뭐라고? 아빠와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지켜보겠다(나는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사춘기 소년들은 이미 눈빛이 바닥을 향해 있다. 그이 잔소리가 생각보다 꽤 길어진다.


07:40

결국, 부산하게 준비한 볶음요리와 매운탕이 보기 좋게 외면당했다. 삶은 감자를 가방에 넣으려니, 배 안 고프다며 뒤도 안 보고 뿌리친다. 결국 나 혼자 밥을 먹었다. 안개 자욱한 어느 뒷골목길 같은 기분, 몇 숟가락 뜨고 설거지를 했다. 세상에 오늘 아침이 이럴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나. 검은 마음으로 커피를 내린다.


07:50

학교 버스가 내려온다. 아이들이 바라보지도 않는다. 오늘은 너희들 교실에 수업 참관하러 가는 날이야. 아빠가 가실 거야. 학교에서 너희의 모습은 어떠할까 궁금하네.


08:00

이 정도 비로는 어림 없어. 부족해. 화분마다 물을 적셔주고 화장실 청소를 하다. 진료 대기실 책상에 쌓인 신문과 잡지를 정리하다. 사무실에 들어와 가운을 입다. 컴퓨터를 켜고 업무 스케줄을 확인한다.


08:51

커피를 사람에게 암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물질에서 제외한다는 WHO의 선언을 월스트리트저널 보도, 국제암연구소는 1990년 방광암 유발 2B군 물질로 분류했었으나 거꾸로 암 예방이나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오래된 커피의 누명이 벗겨지다. 25년 만에. 그래서, 뉴스쇼가 선정한 오늘의 노래.


# Bob Dylan, One More Cup of Coffee

https://www.youtube.com/watch?v=YBOgSdiBvMA


08:56

‘6월 16일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이야기들’, 카카오톡 친구가 퍼왔다. 국회의장 개헌 논의 파장, 국민의당 김수민 의원 리베이트, 관행인가. 이별을 통보한 여자 친구 얼굴에 빙초산을 뿌린 서른여덟 살 박 모 씨, 못난 놈. 커피가 암 예방이나 치료에 도움, 오묘하다. 1자녀, 1인 가구 가족형태 증가로 농민과 농업연구기관은 소비패턴에 맞춰 작은 과종 품종 개발, 포장도 소형으로 변신. 가수 조영남 씨 사기죄 법정 공방. 외면 문화 확산으로 ‘착한 사마리아인’ 바보 취급받는 세상. 초중고 학교 폭력 법적 소송의 장으로 변질, 제왕절개수술 입원치료비 5% 수준으로 낮아진다. ‘단체카톡방언어성폭력’ 가해자 사과문, 잘못을 부끄러워하라, 그러나 그 잘못을 회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루소), 나이 낮춰 미혼인 척 행세한 의사에게 실형. 애플 ‘무료 코딩 교육’ 앱 출시... 아, 세상은 잠시도 바람 잘 날이 없구나.


08:58

창 너머로 보인다. 지팡이를 짚고, 이 씨 할머니가 걸어오신다. 골목길이나 가로수 아래에 놀고 있는 땅만 있으면 울타리 콩을 심고, 상추를 심어 가꾸는 부지런쟁이. 어찌 이리 한 달이 부쩍부쩍 가는가? 혈압약을 먹고 나서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더 실감한당게. 혈압은 잘 조절되고 있습니다, 어머니. 좋아요. 장날이라서 얇은 잠바 좀 하나 살라는디, 엄니, 이왕이면 빨간색으로 사세요. 넘 부끄럽게 빨간색이라니. 곱고 예쁜 색 입으셔야지요. 열 시 차 오려면 아직 멀었고만. 집에 가서 챙겨야겠네. 나 갈라네! 고마워. 잘 다녀오세요.

@적상면 포내리, 2016

09:24

소장님! ** 요양원입니다. 어르신 중에 감기 걸린 분이 계셔서요. 사무장님이 보건진료소로 갈게요.


09:26

무주군보건의료원 ‘건강한 갱년기 관리 프로그램 운영 신청자 모집’, 카카오톡이 오다. 나도 중년인데, 프로그램 운영 시간을 보니 낮이다. 나에게는 그림의 떡, 참가하고 싶은데, 곤란하네. 소장님! 지역주민에게 홍보 좀 해주세요.


09:52

새올행정시스템 ‘온-나라’ 접속. 무주군 중앙지, 지방지 기사 발췌 자료 열람. 공람 문서 확인. 도로명 주소 고시 알림, 지방공무원 인사발령(복직), 지방공무원 근무지 지정, 중앙부처 법령 제-개정안 의견 조회, 관내 출장신청서 작성. 연계 기안함 문서 넘김. 메일 확인, 일일 주요 상황, 폐렴구균 예방접종자 명단. 노인 폐렴구균 백신 입고, 접종 실시(긴급), 6월 중 반딧불기관장 회의 홍보자료 협조, TF팀 지시사항 관련 등


10:00

최 씨가 오셨다. (봉투를 내밀며) 임플란트했던 이빨이 빠졌습니다. 어쩌다가요? 어젯밤에 사탕을 먹다가. 여기서 끼울 수 있나요? 임 씨다. 어제 사돈네 마늘을 캐러 갔다. 논바닥이 어찌나 딱딱한지. 하루 종일 곡괭이질을 했더니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밤새 한 숨도 못 잤다. (소파에 드러누우며)아이고아이고. 비가 안 와서 땅이 마른 데다가 그 논은 물이 잘 안 빠져. 송 씨다. 신랑이 밤새 몸통이 가렵다고 잠을 못 잤다. 드라이하는 빗으로 등을 문질러달라고 하더라. 옆에서 보기만 해도 딱하다. 병원에 그렇게 수없이 댕기는 데도 왜 안 낫고 지랄인가 모르겠다. 연고. 이 씨다. 혈압약이 다 떨어져서 왔다. 며칠 있다가 서울 딸네 집에 가면 오래 있다 내려올 건데 두 달 치 주면 안 되는가? 유 씨다. 기침이 심하다. 머리도 아프고.


이 씨. 우리 밭 가에 옻나무가 몇 개 있다. 잎이 하도 우거져서 낫질을 좀 했더니 목이랑 얼굴이랑 난리가 났다. 옻이 올라서 자면서도 자꾸 손으로 후벼 긁었다. 그래도 근지럽다. 황 씨다. 어제 아침에 먹다 남은 삼계탕을 점심에 안 끓여놨더니, 저녁에 그걸 먹었는데 밤새 화장실을 들락날락. 아침에도 여러 번 설사를 했다. 김 씨다. 손목이랑 엄지손가락이 붓고 아프다. 다시 안 아프게 할 수 없나? 정 씨다. 무거운 것을 들다가 허리를 삐끗했는데 영 안 좋아진다. 안 씨다. 고추밭에 소독약을 하고 나왔더니 전신이 가렵다. 강 씨다. 집안에 신경 쓸 일이 있어 며칠 시달렸더니 소화가 안 되고 속이 답답하다.



@적상면 포내리, 2016

10:38

‘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약 포장 기계음 사이로 들려온다. 아버지는 영화를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어렸을 적에는 집 근처 극장에서 만화 영화를 주로 보았는데, 중학생이 되고는 외화를 자주 보여주셨어요. 인디아나존스. 아웃오브아메리카 등이 기억납니다. 주말에는 영화관에 갔어요. 역사적 배경 설명이 필요한 경우에는 아버지께서 설명을 덧붙이기도 하셨죠. 아버지와 함께 본 추억 영화는 클래식 음악의 고전인 아마데우스입니다. 아버지는 모차르트 컬렉션을 모두 갖고 계셨고 번호를 매기셨죠. 아버지와 함께 음악을 듣곤 했어요. ‘쇼생크 탈출’에서 감명 깊었던, ‘편지 이중창’ 신청합니다. 띄워드리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6OdXtPdhRQ


그 이탈리아 여자들이 무엇에 대해 노래했는지 난 지금도 모른다. 사실은 알고 싶지도 않다. 말 안 하고 두는 게 더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래서 가슴 애이게 하는 어떤 아름다운 것에 대해 노래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자리의 누군가 꿈꿀 수 있는 것보다 그 음악은 더 높이, 더 멀리 울려 퍼졌다. 마치 아름다운 새들이 새장을 뛰쳐나와 날갯짓을 하며 순식간에 벽을 넘어가는 느낌, 아주 짧은 한순간이었지만 쇼생크의 모든 사람은 자유를 느꼈다. 여전히 명장면이고 명언이다.


11:16

소장님, 안녕하세요? **내과입니다. 초리 마을 박 씨 아주머니 내시경 예약하려고 합니다. 그분 드시고 있는 혈압약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1:21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온종일 전봇대 올라가서 일하는 사람이라 허리가 너무 아파서 왔습니다. 신 씨다. 한여름에 감기라니요, 콧물이 나고 머리가 띵한 것이. 하 씨다. 물약으로 된 감기약을 주세요. 알약을 못 먹어요. 이 씨다. 우리 영감님 감기약이 떨어졌습니다. 내일 가지러 와도 되는디, 소장이 어디 갈껨시 미리 왔네.


11:50

보건진료소장 단체 카톡방 업무 연락. 출장복명서 서식은 동일한 형식으로 제출하라고 합니다. 월요일에 일괄 제출. 최대한 서식은 간단하게 작성하여 주십시오. 비가 옵니다. 하는 일이 많아 늘 복잡해.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프네요. 다들 수고하세요.


@적상면 포내리, 2016

12:10

[제목없음] 농촌간호학회입니다. 요실금 강사 교육 안내메일 받으셨죠? 요실금 온라인 교육 사이트 안내 드립니다. http://www.nursing-practice.org에 실명으로 회원 가입하시면 교수님께서 레벨 업 해주십니다(하루 정도 소요). 강좌 I(동영상, 관련자료)시청하시고, 메일에 첨부된 기록지 작성하셔서 메일로 보내주십시오. 교육비는 6월 말까지 농협 계좌로 입금해 주시고, 일부 보안이 심한 시, 군 보건진료소에서는 업무용 컴퓨터로 사이트 접속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개인용 pc나 스마트폰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12:22

소장님인가요? 여기 치목인디요, 우리 동네 사람 누가 가거든 감기약 좀 올려보내 줘요. 콧물이 나고 재채기가 나고 기침이 나고 사흘째여. 여보! 밥 먹었나? 지금 학교야. 아이들 수업 잘 보고, 선생님들 뵙고 끝나서 전화했네. 영어 수업 하는 것을 지켜봤는데, 동사의 과거형을 배우더구먼. 그런데 애들이 학원에서 미리 배워서 선생님보다 앞질러 대답을 하니, ‘얘들아! 너희가 그렇게 대답하면 선생님이 할 것이 없지’. 어이가 없더군. 우리 교육이 심각하구나, 새삼 느꼈네. 미술선생님, 음악선생님도 만났어. 자식은 부모가 못 가르친다. 애들이 어느 방향으로 커나갈지 지켜보는 수밖에. 예찬이는 미술에 관심이 많은가 봐. 나도 몰랐지. 관심 없으면 미술실에 뭐 하러 가겠어. 선생님을 좋아하나? 하하하 그러게. 수고 많았네요.


@적상면 포내리, 2016


12:36

소장! 웃담 강 씨가 오늘 만, 낼 만 하고 있댜. 그니가 사람 못 알아본 지가 언제여? 오래 살았지. 119가 몇백 번은 오고. 그만하면 오래 산 거여. 여름밤에 마루에서 자다가 잠결에 밑으로 떨어져서 뇌를 다쳤잖아. 그때 바로 병원에 안 데리고 간 탓이여. 그렇게 등신이 됐지. 참 딱햐. 어지간히 고생하다 가야 할 틴디. 주민등록증을 어디에 뒀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어. 면사무소에 좀 갔다 오려고. 1시 차 오려면 시간이 좀 남았지? 여기에 있다가 갈게. 어여 밥 먹어요. 배 고프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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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

사 분의 일. 하루 #3

@적상면 포내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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