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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un 14. 2016

[포토에세이] 사 분의 일, 하루 #2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사 분의 일, 하루 #2>


07:10

응? 몇 시야? 알람이 왜 안 울렸지?


07:13

전원 버튼을 누르며 주방으로 나가다. 검은쌀 흰쌀 씻어 압력솥. 김치찌개 준비, 세탁기 동작 버튼 꾹.


07:18
얘들아! 어서 일어나라. 김현정의 뉴스쇼, 라디오를 켜다. 계란 프라이 여섯 개, 상추 씻기, 쌈장 만들기

07:41

둘러앉아 식사를 한다. 오늘은 교복 왜 안 입어? 체육 활동하는 날이야. 버스 놓칠라, 서둘러라. 라디오에서는 천경자 미인도 위작 논란 인터뷰. 국립현대미술관, 진품이 맞다, 8년 뒤, 권춘석 씨. 미인도 내가 그린 것이다. 국과수 감정 포기, 천경자 화백 사망, 자녀들이 문제 제기, 과거 진술 번복, 권춘석 씨의 증언, 마지막으로 밝히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인생이 왜 이러한가. 인생 회의, 논란에 종지부. 아득한 소리. 마당에 나와 보니 어르신들이 팔각정에 앉아 계신다. 빨강 조끼를 입고 비료 포대와 빗자루 들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셨다. 오늘도 일할 준비!


07:52

병아리 같은 샛노랑 버스가 내려온다. 차 안의 아이들이 손을 흔든다. 어제저녁 늦게까지 운동하더라니. 동호랑 저 녀석, 오늘 경기 어떨까. 결과가 몹시 궁금해.


07:56

화초를 잘 키우는 것 같아서 뽑아 왔는데, 이거 한 번 심어 봐요. 꽃분홍 수국여. 물을 잘 빨아먹는 물뽀라서 이름이 수국인가벼. 물 자주 주고, 아침저녁으로 디다 보는 재미가 쏠쏠할 거구먼. 가래 삭이는 약이랑 부기 빠지는 약 좀 주시고요.


07:58

소장님. 오후에 진료소에 있는가요? 요새 기침이 심해서 점심밥 먹고 가볼라고 그라는디. 빨래를 널다. 햇빛이 고슬고슬하다.


08:03

소장님! 너무 일찍 왔죠. 손가락이 또 고장이 났어요. 생선 다듬다가 가시에 찔렸는데, 며칠 따끔거리길래 그냥 그러다 말겠지 했어요. 고름이 엄청 나왔어요. 신랑이 손가락 붙잡고 짜는데, 어찌나 아픈지, 눈물을 한 바가지 쏟았당게요. 소독 좀 해주시고, 약도 주세요.


08:10

세수하고 머리를 감다. 화장하고 가운으로 갈아입은 후 휴대폰 문자 확인. 오늘 생일인 친구가 세 명이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 축하드려요. 그 어떤 날보다 기분 좋은 하루 보내세요. from 카카오스토리. 선생님. 생일 축하합니다. 꽃처럼 아름다운 나날 되시길! 세 번째 댓글, 덧붙이다.


08:16

소장님 계신가요(슬그머니 문이 열린다)? 염치없이 일찍 왔구먼요. 머리 염색을 했더니 밤새 가려워서 왔습니다. 머리 물을 들였더니 불강아지 같네요. 머리 좀 보세요. 나는 원래 주사 맞기를 싫어하는데 오늘은 어쩔 수 없이 맞아야겠어요. 염색을 안 하자니 꼴 보기 싫고, 하고 나면 이 고생이고, 어짜야 좋으까요. 엄니, 어짜까요? 머리 속 피부까지 화가 나서 벌겋게 달아올랐고만요. 긍게요. 주사 맞으셔야겠습니다. 약은 반드시 식사 후에 드세요. 2-3일 경과 봐서 안 좋으면 꼭 다시 오셔야 합니다.


08:22

네, 보건진료소입니(다짜고짜!). 당약 좀 줘요. 당약 좀 줘. 네? 당이요? 담이 아니고 당이요? 담이 결린다고요? 몇 개 없응게 얼렁 좀 줘(머릿속이 아주 빠르게 회전한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신가, 누구지? 누굴까?)! 저기, 어머니, 당약이라니요, 무슨 말씀인... 뚜뚜뚜. 김현정의 뉴스 쇼, 며칠 전 보도된 ‘매실에 독이 있다’, 뉴스의 그 이후를 쫓는 시간. 황교익 씨 인터뷰 반향이 커서. 수원대 임경숙 교수님 연결해보죠. 풋매실에 들어 있는 아미그달린이라는 성분. 충분히 발효 숙성시켜 먹으면 큰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이군요. 경기도 보건환경연구원 연구 자료, 2013년. 적어도 1년 이상, 숙성시킨 후


08:31

우리 손자가 외국에 나간다고 하네요. 땅 밑으로 돌아다님서 일하는 직장 이라는데, 돈을 겁나게 번데요. 회사에서 차비 나오지, 지름 값 다 나온다지, 밥값 대준다지, 갸는 지 돈 들어가는 일이 없어. 버는 대로 다 지 돈이라. 아파트 샀지, 차도 있지. 직장이 좋응게 요새 좋은 각시 선보자는 자리가 자꾸 나서는 모양인디, 학교 댕길 때 연애 해 놓은 여자가 있다는겨. 영어 선상이랴. 그 선상이 외국 가는 손자를 따라간다고 하나 벼. 부모네는 더 좋은 각시 감을 고르고 싶어서 그라는 모양 인디, 버리면 돼가디? 데리고 나가서 영어도 잘 배우고 데리고 들어오니라. 손자며느리도 복이 많은 거지. 야야 어찌 그리 복이 많냐.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복. 그 복을 타고나야는 디, 우리 둘째 딸은 그 복을 못 받아서 고생을 겁나게 하네요. 그놈의 복.


08:42

윤하늘, 송기복, 박도순, 김은정, 성수기, 라파엘라, 유승철, 김찬혁. 저의 생일을 축하해 주신 분들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은 첫째, 부지런함이 몸에 배었고, 둘째는 모든 정보를 신속하게 파악하고, 셋째는 행복을 나눌 줄 아시는 분들입니다. 분명 여러분이 계신 곳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분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축하해 주셔서 오늘 기쁜 맘으로 하루를 간직하겠습니다. from 카카오스토리.


09:02

새올행정시스템 접속. 공람 문서 확인, 이메일 확인. 2016년 조기집행 목표 달성 추진 철저 및 추진상황 보고회 개최, 전라북도 기술개발 제품 우선구매 협조 요청, 무주군 대표 홈페이지 서비스 일시 중단 안내, 대전광역시립미술관 가을 특별전 ‘21C 하이퍼리얼리즘 : 숨 쉬다’ 홍보 및 관람 협조, 5월 골드 프로젝트 제출 협조, 보건진료소 행정전화번호 안내(공진, 공정은 수요일 설치 예정). 뭐 내라는 것이 없다. 다행이다.


09:23

흰 모자를 눌러쓴 저 남자 씨, 역시 운동 다녀온다. 한 손에는 테니스 라켓, 한 손에는 공이 들려있다. 액자 크기만 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저 남자. 팔을 펼치더니 이내 스윙 자세를 날린다. 윔블던에 가서 눈 앞에서 펼쳐지는 세계 테니스 대회 구경하는 것이 꿈인 남자. 오늘도 여전하다.


09:31

커피 원두를 갈다. 콜롬비아 하면 커피가 떠오르지만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는 잘 모른다. 진한 향과 쓴 맛, 때로는 부드러운 맛, 물을 얼마나 붓느냐에 따라, 결코 주관적인 것. 마실 때마다 맛과 향이 달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혀와 잇몸 사이에 퍼진 그것들을 느긋하게 굴리며 음미한다. 살다 보면 쓰디쓴 일도 있을 것이나, 모른 척 우아하게 삼켜버리면 그만. 잊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주하자.

@적상면 포내리, 2016


09:37

전화하셨네요?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건강하시죠? 무슨 일이신지? 몇 가지 여쭙고 싶어서 전화드렸었습니다. 보내드린 자료는 확인하셨죠? 네, 그렇죠. 맞습니다. 그러니까요. 꼭 알아봐 주세요. 그곳에 근무를 안 해봐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쩔 수 없더라도 최선은 다 해야죠. 고맙습니다.


09:42

하도 사정을 해싸서 일을 갔죠. 배추 심는 작업인디, 이 밭에서 일하다가 저 밭으로 가면 차를 타고 가요. 허리도 아프고 나는 일을 못 한다고 해도 하도 사정을 해싸서 갔당게. 일이 거의 끝날 때였어요. 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넘어졌네. 그때는 팔이 부러진 걸 몰랐지. 일꾼들 일이 끝나야 같이 집으로 오닝게 밭가에 앉아서 끝나길 기다렸다가 왔어지요. 밤새 어찌나 아픈지, 정말 사람 환장하것더라고요. 3만 원 벌려다 500만 원 내버렸당게. 전신 마취하고 깨어나는데 왜 그리 구역질이 나는지. 끝도 없이 토하고 또 토했어요. 뼈가 부서졌다고, 큰 수술을 했어요. 아들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요. 일해서 돈 벌어 누구 주려고 돈 벌러 갔냐고 막. 노는 것이 하도 심심해서 그랬다, 그라고 자꾸 와서 부탁을 해 쌌는디 어찌 그냥 만 다냐. 집에 있으면 애가 터징게. 병이나 안 들고 살다가 죽어야 할틴디, 하기는 어찌 병이 안 들것는가요. 짐승도 병이 들고, 호미도 녹이 스는디. 식구 하나가 아팠다 하면 자식들이 전부 고생이죠. 손자들까지 병원에 오고 그랑게. 새끼들이 100만 원씩 걷어서 병원비를 냈는디, 못 사는 딸년은 병원에 몇 번 찾아오고, 그걸로 말더만요. 못 사는 자식 보면 다 내 탓이다 싶어 그것도 참 맴 아픈 일이고. 이번에 일한 품삯은 안 받았어요. 일도 제대로 마치지도 못 했고, 돈을 안 받아야 다시는 놉 얻으러 못 옹게. 소화제랑 진통제 좀 주세요.


@적상면 포내리, 2016



10:03

소장님! 보건진료소에 회충약 있어요? 요새 상추쌈을 하도 먹어싸서. 깨림찍 하잖아요. 그래요?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0:21

택배요~ 여기 놓고 가겠습니다.

10:49

소장님 안녕하세요. 어제 우리 집에 다녀가셨네요? 요새 고추 옆순 따느라 바빠요. 그렇지 않아도 혈압약이 다 떨어져서 곧 다녀와야겠다 했는디.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마루에 약이 있어서 어찌나 반갑던지. 어떻게 내 약 떨어진 걸 아셨대요? 참 신기하네(웃음). 며칠 새에 진료소에 내려갈게요. 그때 뵙겠습니다.


11:00

올해 여든다섯 되신 분이셔. 치매기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되는지. 자식들과 친척들은 연락 두절된 상태라 연락드릴 곳이 없어. 그렇구나. 그런데 치매기가 있다는 것을 네가 어떻게 알았어? 흠... 공간 개념이 없는 것 같아. 전에는 안 그랬는데, 우리 집에 계시면서 여기가 어디냐고 자꾸 묻는 일이 있어. 이상하잖아. 외출하면 집에는 잘 찾아오시는데. 본인에게 알리고 검사하는 게 나아, 아니면 본인에게 설명하지 않고 검사하는 게 나아?


11:13

신지혜의 영화음악, 선곡표를 보니 ‘Kiss From A Rose’다. 볼륨 좀 높여볼까. 아 이런! 소장님! 안녕하세요? 보건의료원입니다. 북창 마을도 소장님네 진료소 관할이죠? 그 마을 어르신 말인데요, MS 그 검사에서 5점 나왔어요. 치매 치료를 받든지, 시설에 입원하든지 해야는데. 본인은 동의하셨거든요. 그런데 함께 사는 할머니께서 본인부담금 때문에 입원하는 걸 난감해하십니다. 자녀분 연락처를 요구하였더니 아들에게는 절대 연락하지 말라고 하셔서요. 혹시 소장님께서 그 집 형편을 아시지 않을까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네. 소득 평균 100% 이하이면 3만 원 한도 내에서 치료비 지원하잖아요. 요양원 입원하게 되면 비용 부담 때문에 생활이 어려우니까. 곤란해하십니다. 아드님께 연락해서 알려드려야 할 것 같은데, 어머니가 저리 반대하는 걸 보니 무슨 사연이 있나 싶기도 하고, 괜히 연락했다가 집안 갈등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염려되기도 하고요. 소장님은 아직 개입하지 마시고요, 이장님 연락처 안 바뀌었죠? 제가 전화해서 말씀드려 볼게요. 수고하세요.


11:37
소장님! 잘 지내시죠? 만나야 되는데 전화만 드려서 죄송합니다. 쌍둥이 생일이 지나갔더군요. 밴드 보고 알았습니다. 축하한다는 말도 못 하고, 이번 주 중에 식사 한 번 하시게요. 연락드릴 테니 읍내로 나오세요. 어제 올려주신 사분의 일, 너무너무 잘 읽었어요. 잠자리에서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는 삶의 본질을 감추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밴드에 카스에 페이스북에 꽃과 음식 사진들. 사진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음식을 같이 먹은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감춰지잖아요. 겉도는 이야기, 화려한 치장에 마음이 좀 그렇습니다. 우리는 왜 이리도 바쁘게 살까요? 참! 제라늄은 잘 가꾸고 계시죠? 밴드 운영하시는 분, 정말 부지런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에요. 잘 하는 것도 많고. 운영자님의 오늘 아침 김밥 사진도 최고였습니다. 다시 연락드릴게요.


11:59

예빈이 예찬이 엄마시죠? 깜짝 놀라셨다고요? 드릴 말씀이 있는데, 오후에 보건진료소에 계신가요? 이건 전화로 말씀드리기는 곤란해서요. 찾아뵐게요. 알겠습니다.


12:23

의사 양반이 그러더만요. 내 기관지가 그렇게 생겨먹었대요. 기관지가 약해서, 감기에 걸렸다 하면 다른 사람보다 훨썩 더 고생을 한당게요. 옆집에 사는 젊은이가 오후에 보건소 간다고 자기 차를 타고 가라더만, 언제 갈지도 모르고, 마냥 기다릴 수 없어 걸어왔더니 덥네요. 젊은 사람들 차 얻어 타기가 쉽지 않아. 불편해할까 봐 말도 못 하고 말이지. 우리 동상요? 처음에는 손도 발도 못 움직이더니, 지금은 팔을 좀 쓰더만요. 지난번에 갔을 때 몸을 만져봉게, 발은 쌀랑하고 손은 뜨뜻하고. 대전에 살고 있는 딸이랑 며느리들이 병원에 댕기느라 고생이여. 그래도 오른쪽이 성항께 화장실에 가서 옷은 치켜올리더만요. 제낭한테 전화해서, 어떤가요 물으면, 다 나사서 가야지요. 그란디 다 낫것는가요? 그 많던 농사 다 포기했고, 동상 남편도 동상 땜에 고생이지요. 병원에서 얼마나 깝깝하것는가요? 그런 고생 안 하고 살다가 세상 떠야는데 어떨랑가. 선풍기만 쏘여도 몸 안으로 바람이 들고, 에어컨은 아주 비상이라요 비상. 밥도 못 먹게 이렇게 점심시간에 와서 미안하네요. 얼렁 밥 자셔.

@적상면 포내리, 2016

12:45

소장님! 우리 동네 사람, 누가 내려가거든, 기침약 좀 보내주세요. 요새 더 눈이 어두워져서 밖으로 못 나가요. 저기, 약 좀 많이 주시면 안 돼요? 자꾸 전화하기도 미안하고마는.


13:23

출장신청관리-기안문 전송-진행 문서함-협조-검토-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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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점심, 상추 쌈밥.

오늘 1/4 조각은 조금 크다.


그녀를 기다리며 발행.



@적상면 포내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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