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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un 30. 2016

[포토에세이] 다른 만남을 기다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다른 만남을 기다려>


오늘 아침 181회에 걸친 ‘따뜻한 동행’이 작별을 알려왔다. “박 선생님, 나의 글이 이번 달로 끝이에요. 다음 주 목요일 이야기가 끝인 셈이네요. 마지막 글을 쓰게 될 테니까요. 삼 년 육개 월 썼는데, 이제 좀 쉬면서 재충전할 겁니다. 그동안 썼던 글을 묶어서 책으로 펴낼 계획도 있고요. 모든 것에 끝이 있습니다. 매주 애독해줘서 진심으로 감사해요. 사람이 희망입니다.” 목요일 아침이면 습관처럼 바탕화면 동아일보 아이콘을 연다.


글 속에서 저자는 마지막 글이라 아쉬움이 남지만, 무사히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는 점에서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 직접 경험했거나 주변 사람이 겪은 따뜻한 이야기를 아주 쉽게 쓰겠다는 기준을 세웠다고 했다. 나는 지난 삼 년 육개 월 동안 목요일 아침마다 칼럼을 읽으며 위로와 희망을 품을 수 있어서 감사했노라고 댓글을 남겼다. 오늘 날씨가 좋다는 한 줄 예보다. 이불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http://news.donga.com/List/Series_70040100000129/3/70040100000129/20160630/78940370/1


쌍둥이가 태어나던 해, 어머님이 사주신 연분홍 몽실 이불. 구름같이 가볍고 포근했다. 아이들은 자라났지만, 그것은 점점 부풀기가 가라앉았고, 시접은 너덜거렸다. 바느질로 꿰매기도 여러 번, 이제는 내가 아이들 등에 떠밀려 이불 밖으로 밀려나는 상황이 되었다. 세탁기 앞에 우두커니 서서 홑청이 뜯긴 솜을 바라본다. 잠자리에 드는 순간 하루를 잘 지냈다는 감사와 안도감이 턱 아래까지 보람으로 차오를 때.


못 버리는 것도 병이지. 에잇! 봉투를 꺼내어 이불을 쑤셔 넣었다. 다 닳아빠졌는데 무슨 미련이 있을라고. 혼자 중얼거리다가 아니지, 그래도 버리기는 아깝네. 아이들이 애착하는 것이니 버려도 되는지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엄마! 이거 버리게?” “있잖아. 너무 낡아서 말이지. 얇아지고, 벗겨지고, 봐봐! 속에 있는 것이 막 삐져나오잖아. 먼지도 나고, 피부에도 안 좋잖아.” 내 입으로 뱉은 항변을 들어도 참 궁색하고 초라하다. 너희들이 자라서 발목까지 덮지 못하니, 다른 이불을 덮는 것이 좋겠어. 재활용품으로 내놓자.”


흔쾌한 동의도, 결사 반대도 아닌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두 녀석에게 잠자리에 들 시간이 왔다. 쌍둥이가 거실로 나와 맨몸으로 뒹군다. 다른 요를 깔고 이불을 덮어주니, 저희 이불이 아니라며 발로 걷어찬다. 누구에게나 더 사랑하는 물건이 있다. 그렇게 가진 물건이 어디 한둘일까, 나에게는 흰색 꽃잎 바탕 위에 파랑 점이 그려진 도자기 흙잔이다(아니, 있었다). 다른 잔이 있는데도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커피를 마실 때면 나는 꼭 그 잔을 찾는다.


마시던 중 아무 데나 컵을 놓은 습관 때문에 아침마다 잔을 찾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한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그런데 책상 위에도 없고, 식탁 위에도, 거실 탁자 위에도 없다. 허사였다. 알고 보니 쌍둥이들이 설거지하다가 깨뜨렸다는 것이다. 아! 이럴 수가. 지금쯤 그것은 매립지 어느 한쪽 구석에서 뾰족한 각을 세워 주위에 있는 것들을 찌르고 있을 지도! 나에게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멀어지고 말았다. 벌써 그리워한다. 서운하고 서운하다.


두 손으로 감싸면 손안으로 가득 들어오던 투박함과 따스함. 그 오목한 다정감은 결코 다른 컵으로 대신할 수 없다. 바람 부는 어느 가을날 도예원으로 갈 것이다. 나는 흰색 꽃잎 바탕 위에 파랑 점이 그려진 도자기 흙잔을 찾을 것이다. 저거다 싶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카드단말기 위로 보기 좋게 사인을 휘두를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잔에 커피를 마시는 이 기분. 아이들도 낯선 이불에 몸을 누이고 잠을 청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음은 특별한 경험이 쌓인 탓이고, 따뜻함과 사랑의 경험이 차곡된 탓이다. 목요일이면 올라오던 ‘따뜻한 동행’의 글을 애독하고, 짧은 글에서 위로받았던 독자로서, 다음 글은 어디에서 볼 수 있을까요. 댓글을 남겼다. ‘작별’에 대하여 생각한다. 들려오는 세상 소식들은 각박하다. 우리를 우울하고 슬프게 만든다. 일에는 정함과 기한이 있기 마련이어서, 흙잔은 깨지기도 하고, 새 이불은 낡아져 우리에게서 분리된다. 나는 새 컵을 사용할 것이다. 아이들은 새 이불을 덮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저자의 주간 에세이를 읽을 것이다. 작별은 새로운 만남을 부르는 주문이지. 우리는 날마다 무엇과 작별하고, 무엇과 만난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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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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