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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ul 05. 2016

[포토에세이] 만일 그때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만일 그때>


반소매를 입었었다. 그렇다고 뜨거운 한여름은 아니었다. 막 여름 문턱을 넘으려는 오월 말쯤 되었을까. 나는 수업을 마치고 운동을 나섰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는 이 년마다 ‘나이팅게일체전’이 열렸다. 도내 간호대학과 간호학과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량을 겨루고 단합을 이루는 체육대회였다. 배구와 족구, 줄다리기와 달리기 등이 있었는데 나는 탁구를 배웠던 경험이 있어 어쭙잖은 선수로 발탁되었었다. 라켓이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탁구장으로 들어섰다.


대학 정문 앞 2층에 탁구장이 있었다. 주인아저씨와 잘 아는 사이여서 파트너 없이 가더라도 운동을 할 수 있었다. 즐겁게 연습을 마쳤다. 계단 중간쯤 내려왔을까. 양쪽 어깨에 흰색 줄무늬가 나란한 하늘색 잠바를 입은 남자가 올라오고 있었다. 뒤로는 또 다른 남학생이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내려와 막 골목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장면을 생각할 때마다 전도연 씨와 한석규 씨가 스치듯 어긋나는 아슬아슬한 ‘접속’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독자 중에도 이 영화를 아는 사람이 계실 줄로 안다).


주인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았다. 그분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방금 후배들이 왔는데, 복식 한 게임만 더 하고 가지!” 갈까 말까 망설이다 탁구장으로 올라갔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셰이크 라켓으로 커다란 스윙 동작을 구사하던 하늘색 잠바 주인공과 후배가 한팀이 되었고, 나와 주인아저씨가 한팀이 되었다. 경기가 끝났다. 그날 승패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으로 캠퍼스에서 하늘색 잠바를 입었던 그와 마주치면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그가 자주 앉는 자리도 알게 되었다. 나는 국가고시를, 그는 취업을 앞둔 졸업반이었다. 날마다 도서관에 드나들었는데, 그는 웃는 모습이 참으로 순수하고 귀여웠다(어느 순간 나를 빠져들게 만들 정도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나와 반대로 그는 늘 말없이 내 수다를 잘 들어주었다. 우리는 학교 앞 분식집에서 라면을 함께 먹었고, 탁구를 했다. 가끔 생각한다. 만약 그때, 우리 간호대학에 나이팅게일체전이 없었더라면, 만약 그때, 다시 탁구장에 가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주인아저씨가 나를 부르던 부탁을 거절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더라면 지금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와 첫 만남은 탁구장이었다. 인연은 그렇게 이어졌다. 지금 그와 나는 그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다. 캠퍼스에 앉아 도시락을 함께 먹던 사이에서 아이들과 한 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사이가 되었고, 아침저녁으로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가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막차가 떠나면, 도착시간에 맞추어 전화를 걸어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도 모자라, 수화기를 내려놓을 때면 못내 아쉬움으로 아련하던, 내 청춘 초상.


아이들이 자라고 여유가 생겨 나는 다시 라켓을 들었다. 탁구와 담을 쌓은 지 이십여 년이 넘었으니, 기본기가 남아 있을까마는. 게다가 부푼(!) 몸이라 늘 몸 따로 마음 따로다. 생각과 달리 엇갈리는 박자감으로 선생님께 실망감을 안겨드리고 있지만, 여전히 경쾌하고 맑은 탁구공 소리는 즐거움을 준다. 탁구장에서의 만남이 그냥 지나쳐 버린 일이었다면 나는 그날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는데, 인과(因果)에 대한 인연(因緣) 닿음을 어찌 말하지 아니하랴.


인연에서 연인으로, 나아가 부부 연을 맺을 수 있도록, 탁구가 중매하였으니, 나와 탁구는 한 겁이 아니라 억겁(億劫)에 가까운 인연이 아닐까. 이제는 추억마저 희미해졌지만 생각해 본다. 학교 앞 그곳에는 탁구장이 있을까.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는 지금도 그곳에 살고 계실까. 그날 무엇이 나를 그곳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만일 그날, 아니 그 이전, 내가 태어나던 날, 아니지, 내가 잉태되던 순간, 그 이전, 그 이전. 생각을 물어물어 이어보니 모든 이와 모든 닿음은 억겁(億劫)에 가까운 인연이 아닌 것이 없다.


하늘에 있는 천사가 지상에 있는, 사방 십 리에 걸쳐 있는 돌을 백 년에 한 번씩 내려와 비단 치마로 바위를 스친 후 하늘로 다시 올라간다. 그 천사가 입은 비단 치마 자락 힘으로 그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 일 겁(劫)이다. 그와 반대로 닿을 듯 말 듯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는 지극히 짧은 찰나(刹那). 닿는 스침이 시간 속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인연에 닿음이 있고 연분이 있을 것인가. 돌고 돌아 다시 나를 찾아온 탁구가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영원에 가까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과 짧디짧은 찰나를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는 도무지 산술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니, 따지고 헤아린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지 않은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긴 겁나는 시간은, 어쩌면 지극히 짧디짧은 찰나라는 역설이 가능하지 않을까. 매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가 생각된다. 겁(劫)은 찰나(刹那)와 닿아 이어지니, 이미 지나가 버린 그날, 만일 그날, 이미 지나가버린 그때, 만일 그때, 지금에 와서 돌이킬 수 없는 그날과 그때를 생각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순간순간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날처럼 반소매를 입는다. 나는 근무를 마치고 탁구장으로 향할 것이다. 나이팅게일 후예로 살고 있음을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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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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