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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ul 28. 2016

[포토에세이] 모자람만 못한 과함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모자람만 못한 과함>



“아들이 아들을 낳았어요.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 처가 식구들이 다녀간 뒤 느긋하게 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더구먼요. 보고 싶은 마음 꾹꾹 눌렀네. 세 이레나 참았어. 문을 열고 들어갔지요. 아들이고 며느리고 안 보입디다. 손주가 있었어요. 연한 순같이 어린, 맑은 샘물처럼 그 여린 것. 네가 하늘에서 왔느냐, 땅에서 솟았느냐, 참말로 사랑스럽더군요. 왈칵 안아보려고 다가가는데, 며느리가 쫓아오더군요. “아버님! 잠깐만요! 손 씻으셨어요?” 구닥다리 할애비라 그걸 몰랐지 뭡니까. 허허! 첫 상면에 딱 제동이 걸렸다니까요. 하룻밤 자면서 가만히 보니까, 갓난아이 옷이랑 기저귀만 씻는 세탁기가 따로 있고, 젖병 삶는 그릇이 따로 있더구먼요. 세상 참 희한하지요. 아가야, 차라리 아이를 유리관에 넣어 기르지 그러냐. 하도 기가 막혀서요.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습니다. 웃자고 하는 소리요. 주사 좀 놔 주소!”


장마철이 지나고 무더위가 시작될 즈음이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처음에는 약간 움푹 들어간 물방울 모양이다. 진행되면 나무는 비틀어지고 반점은 까맣게 변해간다. 결국, 말라죽는다. 한번 생기면 바람을 타고 이웃 밭으로 퍼져간다. 애써 지은 농사를 망치는 주범인 고추 탄저병이다. 증후가 보이면 그야말로 비상이다. 김 씨가 보건진료소에 오신 것은 탄저병 예방 농약을 뿌린 후였다. 왼쪽 어깨와 정강이에 홍반(紅斑)과 가려움을 호소하셨다. 환부를 살피고 약을 짓는 동안 얼마 전 아들 내외 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나눠주셨다.


어르신은 웃자고 하는 소리라며 마무리하셨지만, 웃어넘기기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최근 가습기 살균제 유독성을 시작으로 각종 살균제와 항균제에 대한 뉴스가 끊이지 않고 있다. 건강을 위해 사용했던 그것들이 건강을 위협할 것이라고는 상상이나 했던 일인가. 제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불행이 생길 것 같은 마음까지 생기지 않았던가. 하루 중 항균제품을 몇 가지나 사용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세안하면서 클렌저의 성분을 살펴보았다. 쌀겨와 수세미 추출물이 노폐물을 제거한단다. 어려운 화학 성분명은 생략한다. 게다가 투명한 피부로 가꾸어 준단다. 그동안 별생각 없이 사용하지 않았는가. 믿어 보자. 양치질을 한다. 치약에는 항균효과가 높다고 쓰여있다. 탄산칼슘, 일불소인산나트륨, 토코페롤아세테이티 등 아홉 가지나 되는 기능이 스무 개의 건치를 여든 살까지 지켜준단다. 이 또한 확신도, 그렇다고 의심도 없는 습관적 사용이었다.


로션을 바르고 자외선차단제를 바른다. 자동차에는 나쁜 냄새를 예방하겠다고 방향제를 넣어두었다(그나마 최근에는 천연방향제이나 왠지 이것도!). 진료실에 도착하였다. 업무를 시작하기 전 책상과 컴퓨터에 앉은 먼지를 물티슈로 닦는다. 은(銀) 나노 항균 성분이 들어있단다. 약을 짓기 전에는 식품의약품안전청의 허가를 받았다는 ‘클린-크리어젤’로 손을 닦는다. 99.9% 살균, 멸균이라는데 이왕 100%라면 좋았을 것을. 0.1% 부족함이 찝찝하다.


비단((非但) 이것뿐일까. 언제부터 우리 생활 속에 이런 것들이 깊숙이 자리 잡았을까. 화학 용품에 포함된 성분 중 그럴듯한 기능들은 과대하게 부풀려지고 인체에 해롭다는 정보는 슬그머니 감춰진다. 발암물질까지 나온다는 유독성 논란은 끊이질 않는데 날마다 우리를 유혹하는 기업의 광고 전술은 교묘하게 진화한다. 균(菌)이 전혀 없이 깨끗해야 할 것 같은 강박증, 제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마치 균 덩어리에 오염된 환자가 되는 기분이라니.


농약 묻은 손으로 손자를 보듬으려 한 것도 아니고, 탄저균이나 흙 묻은 손으로 손자를 안으려 한 것도 아닌데. 살갑게 첫 손주를 안지 못하시다니. 김 씨의 안타까운 손이 못내 슬프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버지나 며느리나 자식 사랑에야 지나침의 한계가 있으랴마는. 김 씨의 며느리는 모자람만 못한 과한 청결 의식으로 할아버지와 손자의 애틋한 첫 상면에 제동을 건 것이다. 멀어진 자연과의 거리 만큼 삶의 질이 높아진 양 화려한 문명을 소비하지만 정작 우리는 불안하다.


“깨끗하게 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오.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지요. 옛날 얘기한다고 답답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마는, 우리가 새끼들 키울 적에는 밭에서 젖 먹이고, 돌밭에 벅벅 기어 다니다가 흙도 주워 먹고 그랬어요. 사람이 어찌 좋은 것만 경험합니까. 더러운 것을 겪어봐야 깨끗한 것을 알고, 추운 것을 알아야 따뜻한 것이 고마운지 알지요. 배고픈 것을 경험해야 배고픈 사람 심정을 아는 법입니다. 깨끗한 것, 따뜻한 것, 배부른 것만 안다면, 그것도 순리(順理)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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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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