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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Aug 04. 2016

[포토에세이] 그리 아니 할 권리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그리 아니 할 권리>


  “몇 달 후면 나도 저런 모습이 되겠구나. 줄줄이 링거 꽂고, 고통 속에 신음하며 침대에 누워있을 미래의 모습을 보았지요. 병동을 돌아보았습니다. 주치의에게 항암 치료와 연명 치료를 거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의료진들은 미쳤냐고 난리였죠. 펄쩍 뛰더군요. 퇴원 동의서에 서명했습니다. 시한부 이삼 년이라니, 날벼락 같았죠. 조급해지더군요. 정말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직장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누구보다 눈 귀 어두운 팔순 노모(老母)가 가장 마음에 걸렸어요.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미국에 몇 년간 출장을 가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어머니보다 내가 더 먼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렸지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인사하고는, 짐을 챙겨 산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췌장암, 그의 나이 마흔일곱 살이었다.


  “이십 년 전에 자궁암 판정을 받았습니다. 적출 수술 경과가 좋아 완치된 상태입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년 전에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살아온 것을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겠어요. 석 달마다 병원에 가서 검사하고, 결과 보러 가고, 수시로 응급실에 실려 가고 말이죠. 말이 석 달이지 거의 매일 병원에 다녔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인천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요. 담당의가 항암 치료를 권했습니다. 열흘 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주사만 맞으면서 고통을 참았습니다. 토하고 어지럽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2차 항암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의사한테 엄청 혼났어요. 욕도 얻어먹었고(웃음).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병원 치료비로 시골에 내려가자, 폐암이니 공기 좋은 곳으로 가면 폐가 좋아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녀는 쉰다섯 살이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보건진료소 관할 주민 육백여 명 중 암 환자 등록자는 열여섯 명이다. 도시 생활에 지쳐 귀농 귀촌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쩌다 건강을 잃고 건강을 되찾기 위하여 ‘귀자연’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음을 실감한다. 움막을 만들고, 허름한 집에 황토를 바르고, 혹은 새집을 짓는 사람들. 투병 생활에 더는 희망 없음을 깨닫고 마지막 보류인 자연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그들은 가족과 헤어져 홀로 지내거나 가족과 동행하기도 한다. 산중 생활은 생각처럼 만만치 않다. 거칠다. 어찌 낭만적이며 녹록하겠는가. 벌에 쏘이고, 곤충에 물리고, 감기에 걸리는 등 그들이 보건진료소에 오는 경우 나는 농특법이 허용-제한한 법의 테두리에서 약과 주사를 처방한다.


  간호사이면서 보건진료소장이라는 사회적 명함을 갖고 있지만, 나는 그들의 고통을 헤아리기 어렵고,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암(癌)에 대한 의학적 질문을 받는 경우에는 잘 모르겠다는 궁색한 답변만 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시간씩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병원에서 암을 진단받기까지 과정과 진단받았을 때의 심정, 투병 생활에서 겪은 일 등 터널 같은 속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의 고통에 최대한 공감하려고 몸을 기울이고,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가를 들으며 지지와 격려로 힘을 보태려 노력하지만, 나의 간호는 지극히 작고 작아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늘 죄송하고 미안하다. 우리는 태어났으니 누구나 죽는다는 절대 명제 앞에 서 있다. 그들은 너무 억울하다고,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우리의 권한이던가.


  그들은 몸도 아프지만, 마음을 더 많이 아파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받은 서운함을 토로한다. 결국, 자신의 아픈 것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뻔한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에, 마치 득도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홀로 태어났으니 홀로 일어서기를 결심했고 다짐했다는 사람들. 살 소망까지 잃었던 그들이 산자락에서 불어오는 들숨을 들이고 울분과 고통의 날숨 날리기를 수만 번. 자연의 숨결 속에서 서서히 세포들이 일어서고, 욕심 버린 마음으로 평안이 찾아오고, 내려놓은 번민 속으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고백을 독백처럼 서사하는 사람들. 생사의 기로에서 누구나 걸릴 수 있는, 그러나 아무나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이야기로 나눠주실 때.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무수한 내적 외적 변수들을 통제하지 않더라도, 그들은 의사의 권유를, 가족의 권유를 마다함으로 ‘그리 아니할 권리’를 택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한다. 여부를 알 수 없는 도전으로 빚은 결과를 들을 때마다 나는 목젖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마려온다. 마흔일곱 살 그는 하늘에 가 있다. 손톱과 머리카락을 태운, 한 줌도 아니 되는 재를 고향 뒷산에서 목장(木葬)할 때, 그의 육신은 의학도의 커대버(cadave)로 화(化)하였다. 다른 생명을 잇는 디딤돌로 승(丞)하였다. 사용하던 핸드폰은 장애인 단체에 기증되었다. 결혼을 안 했으니 돌봐야 할 아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니, 죽은 후까지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 다행이라며 웃으면서도, 자기 죽음에 눈물 흘릴 아내가 없고 자식이 없다는 것이, 참 못나고 쓸쓸한 일이라던, 그의 멋쩍은 모습은 두고두고 마음을 아리게 한다.


  “항암치료의 고통이 백 점이라면, 지금은 행복 점수가 백 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편안하고 좋아요. 남편에게 말했지요. 당신이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도와주세요. 소원이라오. 그래서 골짜기에 집을 짓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고통을 견디며 삼 년을 사는 것보다 산속에서 일 년만 살아도 그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건강을 잃었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을 얻었고 자연과 함께 하는 여유를 얻었어요. 나는 그것으로 감사해요. 그런데 말이죠, 잡초가 어찌나 무성하게 자라는지 장난 아닌 거에요(웃음). 날마다 뽑고 뽑아도 끝이 없더라니까요. 그래, 너희들도 나랑 같이 살자 그랬습니다. 나무와 풀을 보며 새로움을 발견할 때가 많아요. 시끄러운 소리 안 들리니 좋고요(웃음).”


  폐색전증으로 다섯 발자국도 떼지 못했던, 꽁지머리 임 씨가 있다. 되찾은 건강으로 건강을 잃은 사람에게 경험을 나눠주는 사람, 의사의 권유를 거부한 사람, 넘어질지라도 스스로 일어서는 것을 선택한 사람, 그리 아니할 권리를 주장하고 그 권한을 행사하는 사람들. “화를 내고, 성질을 내서 몸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먹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먹고 마셨더니 몸이 좋아지고 기분이 좋아졌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꽁지머리 임 씨의 말이다. “자연에는 생명 순환의 법칙이 있습니다. 내 몸과 마음이 자연에 순응하면 편안해집니다. 모든 생명은 우주 이치 속에서 소통과 교감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내 안에 있는 행복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항상 최고라는 것을 알아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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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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