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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Aug 31. 2016

[포토에세이]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문을 열자마자 “엄마! 거절당했어요.”라니.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쌍둥이 중 큰둥이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 뒤따라오던 작은둥이에게서 역시나 쌩한 찬바람이 인다. 함께 방으로 들어가더니, 달칵 문 잠그는 소리가 난다. 며칠전 손바닥만 한 초콜릿을 내밀었다. 여자친구에게 줄 것이라고 자랑했었다. 이것으로 하면 좋을까, 저것으로 하면 좋을까, 포장지가 닳아지도록 접었다 폈다, 폈다 접었다, 안절부절못하더니. 채였구나. 


“엄마! 여자친구가 뭐라고 할까, 응? 응?” 바쁜 내 앞을 서성이며 앉아있지도 못하더니. “빨리 이것 좀 보세요. 예쁘죠? (그렇게 예쁘더냐? 이 녀석도 별수 없는 남자구먼!).” “잠깐, 오호! 그그···. 그래. 축···축하해!” 큰둥이가 불쑥 내민 핸드폰 속에 3학년 단체 사진이 열려있다. 친구들과 찍은 사진 앞줄 사이로 단발머리 그녀(!)가 웃고 있다. ‘어머나! 3학년? 연상이잖아.’ 철부지답구나. 귀여워. 


쌍둥이에게 누군가를 특별하게, 더 좋아하게 된 감정이 생겼다는 사실에 나도 마음이 덩달아 설렜다. 사춘기 소년의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갈까마는 어른이랍시고 ‘이왕이면 마음까지 봐야지.’라고 어쭙잖은 충고까지 건넸었는데. 결국 누나인 그녀로부터 너를 받아줄 수 없다고 거절을 당했고, 내가 당한 것마냥 무안해졌다. 


어떻게 마음을 전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아들에게 편지를 써보라고 했다. 책상 앞에 앉아 연필을 붙잡고 낑낑대는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도대체 뭐라고 써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포기를 선언한다. 초콜릿만 줄 것이라며 구겨진 종이를 휴지통에 던지는 것이었다. 국적도 없는 그놈의 시커먼 것은 어찌하여 사랑 고백의 아이콘이 되었더냐. 너의 진정한 마음 석 줄이면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흔들고도 남을텐데. 엄마는 요즘 너희들에게 유행하는 좋아하는 법, 사랑하는 법을 몰라도 한참 몰라 편지 한 통에 담으라 하였으나, 진정성을 이길 유행은 없는 것인거여. 제발 문 좀 열어보라고 다독였지만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그러자꾸나.


날이 밝았다. 진료대기실에 앉은 어르신들이 세상천지 하룻밤 새 여름 날씨가 이렇게 변덕이 심할 수 있능가,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첨이네. 팽토라진 씨미같구먼. 들판에 나락이 아직 시퍼런디, 벌써부터 이라믄 어짜자는 거시여. 말복 더우가 힘도 못 써보고 가버리셨단다. 축축 무기력하게 만들던 폭염, 징그럽던 무더위가 싹 가셨으니 참말로 션하다 해야 할 것인디. 어르신들은 늦가을이 걱정이다. 쌀을 제대로 먹기나 할랑가 모르것다 염려다. 당최 종잡을 수 없는 날씨가 수상한 시절을 닮았다는 여론(輿論)인데, 


창문 너머로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등굣길에 나선 쌍둥이의 뒷모습을 본다. 3학년 형에게, 저 누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전해달라는 부탁을 했단다. 문 뒤에 숨어서 그녀와 형을 지켜보았다는 큰둥이. 직접 나서지 못한 수줍음 때문에 형을 통한 고백이 전달되던 날, ‘반(半) 고백’을 성공했노라고 뜀뛰며 자축(自祝)하더니. 대답없는 누나라는 형의 전갈을 듣고, 큰둥이는 초콜릿에 마음을 담아 나머지 반쪽을 고백하려고 했을 것이다. 온전한 고백 뒤에 돌아온 것은 그녀가 싫다고 했다는 씁쓸한 거절이 결론이었지만, 나는 아들의 마음과 아들의 용기에 박수를 보냈다. 멋지구나, 우리 아들, 최고!라고 엄지를 추켜세웠었다. 


남편이 출근 준비하느라 와이셔츠 단추를 채운다. 옆에 서서 그간의 일을 수다로 풀어내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은 그래도 아빠보다 낫네. 그런 용기는 어디에서 났을까, 짜식! 거절당했어도 얼마나 좋아. 학교에 가기만 하면 그 여학생을 만날 수 있잖아? 학교만 가면 멀리서든, 가까이든, 누나를 만날 수 있으니 좋잖아. 안 그래?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지!” 응? 뭐지?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다’는 남편의 말끝으로 묘한 여운이 감돈다.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좋았어. 쌍둥이가 그것을 알게 될 날이 언제일까. 한 톨의 나락도 쌀로 영글라면 비바람 서릿바람을 맞는 법인데, 이제 겨우 모가지 내민 여물지 않은 나락 같은 아들아. 


꿋꿋하던 무더위도 하룻밤 새 변덕이다. 살다 살다, 별일들을 다 겪을 것이다. “여보! 오늘 날씨 참 희한하지?” 애써 딴전을 부리는 내 머릿속으로 책가방에 서리 배 두 개를 넣어주었던 까까머리, 달리기를 참 잘하던, 그 남자아이를 떠올리는 것, 


이게 다 날씨 탓인 거여!

.

.

.



짝사랑


고1 때 그녀를 만났다 

같은 반이었고 자주색 가방을 들고 다녔다 

그 해 봄 교정은 장미꽃밭이었다 


그림 그리고 싶던 그녀의 날개옷이 출렁거리면 

밑그림 들추는 꽃그늘마다 

밤새도록 날개옷으로 긁히던 꽃밭, 

뒷머리 곱게 딴 세월이 무턱대고 넘실거리는 꽃밭을 

속살을 떨며 참새떼가 날아올랐다


참고서 속에 감춘 편지도, 찌그러진 달빛도 

무작정 그어댔던 성냥불도 다 잊어먹고 

사락사락 봄눈이 내리고 있다


이병초


@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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