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호사 박도순 Sep 20. 2016

[포토에세이] 오죽하면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오죽하면>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참깨 다발을 나르고 있었다. 전화받으라는 소리에 뒷집 할머니네로 달려갔다. 발령장을 들고 코스모스 가득한 길 따라 구천동 계곡을 달릴 때, 보건진료소라는 새 학교로 입학하는 신입생이 되는 기분이었다. 보살핌만 받다가 드디어 무엇인가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것은 기쁨이면서 두려움이었지. 정체 모를 각오와 잡히지 않는 사명 비슷한 감정도 고였을 거야. 엠블런스에 나를 태우고 구천동까지 동행한 보건소장님(故 김화중)은 노인회장님 댁으로 데리고 가셨다. 새로 발령받은 진료소장이라고 어르신께 소개하셨다. 나는 허리까지 깊숙인 인사를 드렸다.


세월의 때가 익숙하게 바지저고리를 차려입은 키 작은 어르신, 은빛 머릿결이 가을빛에 눈부셨다. 고향 처녀가 와서 더 반갑다며 두 손을 붙잡아주셨네. 보건진료소로 돌아와 둘러보았다. 허물어진 울타리, 문 여는 순간 느껴지던 서늘함, 고장 난 보일러, 낡은 창고 특유의 음습한 냄새와 비슷한, 그 무엇. 시월의 어느 멋진 날보다 더 크게 기억되는 그날. 방에 혼자 남았는데 보건소장님이 가던 길을 돌아와 문을 두드렸다. 홀로 둔 딸이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 아버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엠블런스 창문을 올리지 못한 채 계속 손을 흔드시더라니. 소장님은 말씀하셨다. “박 소장(낯선 호칭,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기분)! 어려움도 많겠지만, 말이지, 근무시간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새벽에 오든, 밤에 오든, 그럴 땐 말이지, 오죽, 오죽하면 왔겠는가, 이 말을 기억하시길 바라네.”


알아들을 듯 못 알아들을 듯했지만, 그것은 업무 시간 외에 보건진료소를 찾아오는 환자에 대한 변호였다는 것, 상습 민원 제기자의 귀찮은 항변을 미리 막으려는 배수진은 아니었을까. 환자의 모든 형편을 용납하라는 당부이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 보건진료소에서 24시간 상주해야 한다는 허울 좋은 법적 의무 조항을 들먹이며, 쉬는 날에 문을 두드리든, 새벽에 문을 두드리든, 오히려 업무 시간 외에 보건진료소를 찾아오는 사람을 돌볼 책임과 의무가 있다는 것을 주지시킨, 재확인의 권고가 아니었을까. 오죽, 오죽하면 왔겠는가!


그것이 내가 가진 권력인 양 철없이 뿌듯했던 날도 있지 않았던가. 이 못난아. 그것이 오히려 나의 독자적 권한인 것 같아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그날 그 부탁은 어쩌면 ‘농특법’이 정한 오류 한계일 것인데, 그 하찮은 것이 뗄 수 없는 눈 실지렁이 같이 내 힘으로 제거할 수 없는 것이어서 아뭇 소리 말고 속으로 삼키며, 암묵적 강압이 되던, 오죽, 오죽하면이라는 그 말.


같은 약과 주사의 반복 처방이 일상이 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참으로 작디작아서 어르신들의 증상 앞에서는 오히려 내가 죄인인 듯한데, 잊을만하면 떠오르는 오죽, 오죽하면이라는 그 말. 무릎이 콱콱 쑤신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삭신이 다 아프다는 호소를 도무지 영어로 옮겨 적을 수 없는 한국식 통증 기록을 어떻게 남겨야 하는 거지? 하찮은 고민에서부터 항히스타민 아빌 주사를 놓고 뒤돌아서는 순간, 침대 아래로 쓰러지듯 넘어지는 아주머니를 어떻게 살려야 할까, 나 홀로 겁에 질려 서 있었을 때, 수건에 냉수를 적시고도 모자라 찬물을 끼얹으며 수없이 불러댔던 아주머니 이름. 나 또한 오죽하면. 오죽하면!


농특법이 허용한 메페남산과 메토카르바몰도 통증 수반 근수축에 한계를 다하여 그 효용이 떨어지더라. 농부증, 만성 퇴행성-염증성 질환들, 경운기에 손가락이 절단되고 발목이 부러지는, 목을 꺾어 스스로 운명을 접는, 농약 마시고 나뒹굴다 마른풀처럼 날아오르는, 이야기조차 다 옮길 수 없는 사람들과 현상들. 오늘 그 말이 불현듯 나에게로 다가온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는 작고 작은데, 내 앞에 아픔을 쏟아내는 당신 보니, 지쳐가는 이마 위로 떠오르는 그 말, 오죽, 오죽하면!


바람이 분다.

.

.

.

@적상면 포내리, 2013


매거진의 이전글 [포토에세이]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