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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Sep 23. 2016

[포토에세이] 거기 누구 없소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거기 누구 없소


“박 소장인가? 자네가 적어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말이여, 어떤 지지바가 내 말은 안 듣고 계속 지 말 만 하대? 이짝 말 좀 들어보소! 머라머라 해싸도 소용없드만. 대체 그 여자 누구여? 순~ 싸가지 없는 년!” 안담 김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 유쾌하신 어르신의 언성이 아침부터 높다. 며칠 전 보건진료소에 오셔서 TV가 고장 났다고 하시길래 서비스센터 전화번호를 적어드린 적이 있었다. 어르신은 그녀에게서 무슨 말을 들은 것일까.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 방문 간호(看護)을 위하여 출장을 가야 했다. 물품을 챙겨 마당으로 나와 보니 승용차 뒷바퀴가 주저앉아 있다. 펑크가 난 것이다. 타이어 홈에 십자(十字)형 나사못이 박혀 있었다. 자동차보험증권을 펼쳐 보았다. 다행히 긴급 수리 특약에 가입되어 고객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들린다. -(음악)- “마음으로 함께 하는 ***입니다. 메뉴는 총 9개입니다. 자동차 고장출동 요청은 1번, 자동차 사고접수는 2번, 질병 상해 사고는….”


몇 번이랬지? 멘트를 놓쳐버렸다. 한 손에 연필을 쥐었다. 다시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서는 수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마음으로 함께 하는 ***입니다. 메뉴는 총 9개입니다. 자동차 고장출동 요청은 1번, 자동차 사고접수는 2번, 질병 상해 사고접수는 3번, 질병 상해 화재보험 신규가입 변경 실시 및 상담은 4번, 자동차보험 신규 가입 변경 해지 및 상담은 5번, 대출 상담은 6번, 증명서 팩스 직접 발급은 7번, 직원 전화번호 안내 및 펀드 퇴직연금 ARS 이용 요금 안내는 8번, 다시 듣기는 별표를 눌러주십시오.”


낭낭한 그녀 목소리가 들렸다. 서비스 내용을 들으며 번호를 받아 적었다. “고객 불편사항 접수 및 상담원 연결은 0번을 눌러주십시오.” -(0번)- “총 4개입니다. 자동차 보상 고장출동 요청 불편 사항 접수는 1번을” -(1번)- “정확한 업무 처리를 위하여 상담 내용은 저장됩니다. 상담원를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음악)- “죄송합니다. 지금은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입니다. 통화가 끝나는 대로 바로 연결해드리겠습니다. -(음악)- 죄송합니다. 지금은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입니다. 통화가 끝나는 대로…”


진짜 ‘사람’ 목소리를 듣기까지, 통화 연결에 걸린 시간 1분 51초. 타이어 펑크 수리접수요청이 완료되고, 긴급 출동 기사가 보건진료소까지 달려와 수리를 마친 시간 30분. 보험회사나 은행에 도움이 필요하여 고객센터에 전화한 경우 녹음된 자동응답 시스템 멘트를 듣는 것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말로는 고객님을 최고로 모시겠다고 사랑을 읊어댄다. 그러나 고객을 문전에서 박대하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내 형편 따위는 돌보지 않는 ‘순 싸가지 없는 그’들의 메마른 목소리, 그나마 말 많은 안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때면 무언가를 해보기도 전에 바보가 되어버리는 기분이라니.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방소멸에 관한 7가지 보고서’ 를 발표했다. 낮은 출산과 인구 고령화 등으로 30년 안에 전국 자치단체 243곳 중 77곳이 사라질 수 있다는 예측이 나왔다. 특히 우리 지역은 14개 시·군 중 10곳이 사라질 것이라니. 사람이 사라질 것이라는 염려를 너머로 아예 도시가 소멸(掃滅)될 것이라는 예측. 예정에 없던 쇠망치로 퍽 얻어맞은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 많던 고향 동무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쇠고기, 미역, 분유와 기저귀 등 출산비와 양육비를 지원하는 등 나름의 묘책으로 사람 늘리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힘을 얻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미 돌아서서 어디론가 떠나버린 사람을 무엇으로 되돌아오게 만들 수 있을까. 30년이 지나고 50년 후 세상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전화기를 붙잡고 ARS 안내 멘트를 알아듣지 못하여 당황했을 어르신의 심정을 헤아려본다. 사람 없는 전화선(線) 위에서 겪으신 ‘통하지 못한 싸가지 논쟁’이 우습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이 씨가 진료실로 들어선다. 어디 아프시냐는 질문에 허허 웃으신다. 냉동실에서 자꾸 물이 떨어진단다. 밭으로 가는 길에 보건진료소부터 들른 것이다. 내 손에 만 원을 쥐여주신다. 모자라고 남는 것은 해가 지면 계산할 것이니, “아! 잊을 뻔 했네! 거시기, 가운데집 세탁기, 그것도 부탁혀요.” 기계 너머에 있을 ‘사람’을 위하여 연필을 준비한다. 내 말은 안 듣고 계속 지 말 만 해대고 대답 않는 그녀보다 ‘머라머라 하는 이짝 말’을 찬찬히 들어 줄, 싸가지 있는 진짜 사람, 거기 누구 없소? 여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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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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