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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un 14. 2017

[포토에세이] 조개 기름 그리고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조개 기름 그리고


  ‘한국의 보건진료소 제도와 인력 양성 체계’에 관하여 발표하기로 했다. 일본 가고시마 대학이었다. 통역 없이 가능한가 묻는 담당자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자신 있게 “데키 마스!”라고 대답했다(그건 사려 깊지 못 한 만행이었다). 전화를 끊고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하나는 그동안 공부해 둔 일본어를 마음껏 구사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하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발표를 맡게 되었으니 강의 부탁 부서가 가진 기대보다 더 좋은 결과를 이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본어 공부를 위하여 온라인 영상 강의와 교재까지 구매했다.


  날마다 책상 앞에 앉았다. 영상으로 쏟아지는 선생님의 설명을 보고 들으며 한동안 닫았던 외국어 창을 열었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 아니던가. 시간이 흐르면서 홀로 강의를 보고 듣는다 것은 마치 대답 없는 침묵의 벽과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급기야 주말에 시간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프라인 수업을 찾아가야겠다는 결심이었다. 서울에 올라갔다. 주중에는 과제를 점검했다. 틈틈이 이어폰으로 듣기 훈련을 했다. 토요일이면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 KTX에 올랐다. 수업시간에 새로운 과정이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두 달쯤 다녔을까.


  시청역을 지나 종각역에서 내렸다. 4번 출구 쪽으로 계단을 올라가는 중이었다-학원으로 가는 길이다-. 풍덩한 승복 바지에 지팡이를 짚은 한 노인이 찬찬히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지나치려는 순간이었다. 나에게 물었다. “저기... 말 좀 물읍시다.” ‘어쩌나, 나는 서울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스쳤는데 나는 이미 "네!"라고 대답했다. “이쪽으로 가면 조개 사로(러) 가나요?” 조개요? 조개를 사신다면 수산시장으로 가야 할 것인데, 두 달 동안 서울역과 종각역을 오갔지만, 근처에 수산시장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 제가 서울에 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쪽은 아닌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다른 분께 더 여쭤보세요.” “그려?” 어르신의 난처한 표정을 뒤로하고 등을 돌렸다. 나는 가던 길을 잠시 멈추었다. 지하철 안내도 앞으로 다가갔다. 수산시장이 어디쯤인지 살펴보았다. 어르신에게 제대로 길 안내를 해드리지 못한 죄송함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수산시장은 없었다. 출구를 빠져나왔다. 수업을 마치고 다시 서울역으로 향하던 길, 다시 지하철 안내도 앞에 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안국동 문화의 거리 옆으로 육백 년이 넘었다는, 유형문화재 ‘조계사’가 있었다. 아뿔싸, 그 어르신은 조개를 사려는 것이 아니었다. 수산시장에 가는 길을 물은 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러나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는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그다음 주말, 나는 수업을 마치고 조계사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서울 종로 한복판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서울역에서 1호선 지하철에 승차한 후 종각역까지 세 정거장, 주행 시간은 14분, 요금 1,250원. 서울역 버스 환승센터에서 버스를 탈 경우라면 다섯 정거장을 지나 조계사 앞에서 내리면 17∼18분. 정보를 의지하여 조계사 대웅전 앞을 지나 경내까지 구경할 수 있었다.


  퇴근길이었다고 한다. 사람이 들어설 자리조차 없을 정도로 붐비고 있었다. 지하철 문이 막 닫히려는 순간 어느 노인이 물었단다. “젊은이, 말 좀 묻세! 이 지하철 기름으로 가는가?” “아뇨, 전기로 갑니다. 어르신!” 나중에 알고 보니 어르신을 ‘길음역’으로 가는가를 여쭌 것이었고, 젊은이는 지하철 동력이 전기라는 답을 한 것이었단다. 지인과 나는 ‘이쪽으로 가면 조개 사러 가나요?’를 시작으로 조개와 기름에 얽힌 일화를 나누며 깔깔 댔다. 우리말 동음 이중성 일화로 촌사람 상경기를 나누었다.


  그 후의 일이다.


  2호선 사당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던 한 아이가 어느 할아버지에게 여쭈었다. “할아버지, 서울대 가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떼끼! 이놈들! 열심히 공부해야 서울대를 가지, 너희처럼 이렇게 싸돌아 다니면 대학도 못 가!” 몇 년 전 한국의 보건진료소 제도와 인력 양성 체계에 대하여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던 데키마스! 사려 깊지 못했던 대답에게 미안하다. 맞는 말씀이다. 평생 공부할 일이다. 학교에서 집에서, 산골이든 도시이든,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조개 사러 조계사로 가지 않으려면, 지하철은 기름이 아니라 전기로 간다는 것을 위하여, 싸돌아 다니지 말고! 데키마스! 야래바(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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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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