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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Aug 23. 2017

[포토에세이] 가을이 오면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가을이 오면


“식사 시간에는 핸드폰 좀 내려놓으면 안 될까. 얼굴 보며 먹자.”라고 말하고 (속으로는) ‘쌍둥아, 스마트폰 보는 시간 반으로 줄이고 책 좀 보자꾸나!’라고 이야기 하고 싶은 나. 평소 같으면 눈 흘기며 째려봤을 녀석들이 그날 아침에는 질문이 있단다. 폰을 가지고 다가왔다. “엄마는 아이돌 중에 누구 좋아하세요?” “갑자기 아이돌은 왜? 그...글쎄다.” 잠시 후에는 또 “엄마는 무슨 노래 좋아하세요?” “노래? 그...글쎄.”


뮤직비디오를 보여주던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나는 진료실로 출근했다. 환자 진료가 시작되고 전화를 받는 등 바쁜 일이 이어졌다. 잠시 여유가 생기면 쌍둥이에게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 질문이 물음표처럼 따라다녔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누구지? 좋아하는 노래는?’ 어쩌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어물쩍 곡목집만 뒤적이는 나. 도무지 가사를 보지 않고는 불러 젖힐 한 곡 없다니, 요샛말로 참 웃프다.


벽에 붙은 최신 인기 순위 곡을 훑어봐도 딱! 이 노래! 라고 선택할 제목을 알지 못한다. 그 즈음 머리를 스치며 떠오르는 노래가 있었으니.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중략) 친정아버지께서 잘 부르시던 옛 노래이다. 아아 뜸북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잃어진 그 사랑이 나를 울립니다/ 까지. 


이 노래를 배운 적도 없고 불러본 적도 없다. 그런데 가사를 쓰다니, 그것은 이 곡을 ‘짝사랑’하신 친정아버지 덕분이다. 만약 당신 아버지가 가장 좋아한 노래는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답할 자신 있건만. 봄이든 여름이든 굳이 가을이 아니어도 아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로 시작되던 노래. 들국화 바람에 살랑이는 가을인가요에 이르면 흐지부지되던 노래. 기억에 의하면 노래가 시작될 즈음 아버지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신다. 마루 끝에 앉으시어 기-인 한숨 몰아쉰 후엔 여지없이 날숨 타고 흐르던 아아 으악새.


사각거리는 억새가 은빛 물결로 출렁이면 하늘로 솟아올라 나는 새인가. 작은방 틈새로 아버지를 보았다. 때로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붉은 눈은 처연했다. 꼬부라진 혀에서 엉킨 노랫말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늘어지다 스르르 녹아지던 짝사랑. 숨어 지켜보던 나는 문을 열고 온다. 잠든 아버지 곁을 지난다. 막걸리 내음 가득하던 고향 마루에 반주 없는 짝사랑은 그 후로도 오래오래 맴돌았다. 귀를 막아도 들리더니, 인제 보니 뇌벽(腦壁)에 새겨진 노래가 되었다.


농사짓느라 종일 볕에 그슬린 것도 모자라 강소주로 당신을 달구시고는 불콰한 노을로 하루를 덮으시던 아버지. 그날들이 꿈결 같다. 아버지 애창곡은 아버지를 뜨겁게 데운 삶에 휴식이 아니었을까. 생각에 잠기다 보니 시아버님 노래도 생각난다. 일본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해방되어 조국으로 돌아온 시아버님. 고향이나 다름없는 오사카(大阪)와 그곳에서 함께 놀던 친구들이 얼마나 보고팠으면.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뒷짐 가볍게 쥐고 서서 창밖을 바라보며 당신의 한(恨)을 읊조리던 모습은 꿈속 사진이 되었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붉게 살라 오르는 먼 산 단풍 바라보며 앞소절 따라부르시더니, ‘어쩌다 내가 칠십이 되었다냐. 한심하구나.’ 하시던 시아버님. 나는 잊을 수 없다. 그 후에도 아들 며느리 집에 오기만 하면 엄정행 선생의 그것을 틀어달라셨다.


두 남자가 즐기던 노래를 떠올리며 상상한다. 흥얼거린 짝사랑에는 차마 고백 못 한 추억이 숨어 있는 것일까. 못 다 부른 동심초에 어린 애련한 그리움의 깊이 넓이는 얼마나 될까. “엄마! 인기 짱 동영상입니다!” 쌍둥이가 남기고 간 메시지 따라 링크를 여니 열세 명 소년의 현란한 안무와 노래가 경쾌하게 펼쳐진다. 역시 중학생 쌍둥이가 좋아할 만하다. 아, 어지럽다. 만 명 가까운 가수가 육십만 곡 넘는 노래를 부른다는데, 나도 즐겨 부를 애창곡 하나 만들어볼까. 무슨 노래 골라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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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스바냐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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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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