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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Jan 23. 2018

[포토에세이] 한 알 반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한 알 반


“소장님! 잘 지내시죠?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한 달 전에 대구로 이사 왔습니다. 어머님 혈압약 때문에 병원에 왔는데요, 이름을 알아 오라시네요.” “지금 출장 중이라 밖에 있습니다. 남은 약이 없나요? (엄마! 약 하나도 없어? 몇 개 있다_전화기 밖으로 들려오는 소리) 어머니가 갖고 계신 약을 사진으로 찍어서 메시지로 보내주십시오. 확인 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윗새재 김가네 소 막을 막 지나는 중이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전화번호여서 받을까 말까 고민했다. “서울에서 여행 온 사람입니다. 약을 두고 왔습니다. 펜션에서 쉬는 중인데 이틀 동안 혈압약을 못 먹었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머리가 아프고 목덜미가 묵지근한 것이. 영 안 좋습니다. 진료소 앞에 왔는데 안 계시네요? 약 좀 줄 수 있습니까?” “그러시군요. 죄송합니다. 출장이라서 밖에 있습니다. 약 이름이 뭡니까?” “그건 잘 모르겠고요, 반쪽 짜리랑 한 알입니다. 아침에 재보니 118에 86 나왔습니다.” 약 이름을 알려주면 도움을 드리겠다고 했다. 잠시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케란? 테록? 파랄이었던가?” 수화기 너머 발음 따라 적은 후 KIMS Mobile에 입력했다. ‘검색어가 정확히 입력되었는지 확인하십시오. 띄어쓰기를 확인하십시오. 다른 단어로 검색하십시오. 검색결과가 없습니다.’라는 반응은 당신이 약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처방받은 병원에 확인하라고 권한 후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그것은 ‘아’자로 시작되는 성분을 담은 약이 아닐까. 내 생각을 말하지 않은 속내를 그가 알 리가 없다. “소장! 혈압약 좀 타러 갈건디, 진료소에 지싱가?” 아랫새재 이 씨 할머니다. “지금 출장 중이라서요. 내일 오십시오.” “약이 없는디?” 한 달 처방 후 다음 약을 가지러 오는 것을 보면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늦는 연착 단골이시건만 웬일로 이번에는 사나흘 앞서 오시겠다는 것일까. “테리비서 봉께 혈압약 그거 잘 먹어야것드만요!”


다음 날 아침, 두드리는 소리에 늦잠을 깼다. 현관문을 열었다. “소장! 이런 약 있는가?” 김 씨 어르신이 처방전을 내미신다. [급여] 보령바이오아스트릭스캡슐100밀리그램(아스피린장용과립) 1캡, [급여] 엠디핀에스정(에스암로디핀베실산염) 1정, [급여] 다이크로짇정 1정, 하루 1회. 아침 식후 30분, 투약일수 30일. 민원인보관용. 선명한 레이저 프린터 흑서체가 반딱거린다. 혈압 측정 후 약물치료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환자를 발견한 경우, 나는 직접 처방하기보다 먼저 의사 앞으로 고혈압 진단의뢰서를 작성한다. 이미 다른 병원에서 투약 중인 환자라도 교통이나 경제적 이유로 보건진료소에서 관리받기 원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환자진료지침 중 보건진료소에서의 고혈압 관리 가이드에 의거한 이것은 진료의뢰가 아닌, 문자 그대로 ‘고혈압 진단의뢰’로 고혈압 확진을 위한 의사의 확인 과정을 거치라는 것이다. 혈압약 처방을 위한 조건부 제한 허용인 셈이다.


“귀원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위 어르신은 고혈압 관리 중입니다. 최근에 높은 경향 보입니다. 측정 결과는 붙임과 같습니다. 가족력, 투약 과거력 없습니다. (별표) 우리 보건진료소에서 처방 가능한 항고혈압제는 아래와 같습니다(별표 1, 2, 3, 4, 괄호 닫고). 보다 더 적절한 검사와 진단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어 귀원에 의뢰합니다. 어르신 편에 검사 결과와 관리 지침을 회신하여 주십시오. 혈압 관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구구절절 편지에 담아 선처를 부탁한다. 병의원 반응은 다양하다. “네가 뭔데 우리 병원 환자를 빼앗아가려느냐?”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찢어진 메모지에 약 이름만 끄적여 보내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무반응 무회신 의사도 있다. 화를 내든 약 이름만 달랑 보내든, 정성스레 검사 결과지와 투약 관리 사항을 적어 보낸 의사든, 심지어 무응답이든, 어느 분야나 그럴 것이다. 나는 나의 대상자에게 ‘그 병원에 가지 마라. 저 의사에게 가지 마라. 이 의사에게 가라.’고 말한 적도 없거니와 그럴 권한도 없다. 그것은 환자에 대한 태도가 아니라 간호사인 나를 대하는 그들의 입장이며, 이면에 감추인 어떤 불편함이라는 것을 안다. 행위 자체를 탓할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의사가 제시한 항고혈압제 처방과 권고 사항을 참고로 교육하고 투약 관리를 이행할 뿐이다.


치료 효율이 떨어지거나 혈압 조절이 잘 안 될 때, 서맥, 빈맥, 부정맥이나 기침 등 이상 증세를 발견한 경우 즉시 재의뢰 하라는 지침을 떠올린다. “알약 하나인데, 그거 처방받기가 이리 까다롭습니까?” 서울에서 오신 분도, 대구에서 오신 분도, 여수에서 오셨다 한들. 보건진료소장이래도 직접 처방할 수 없는 까달스러운 지침이 원망스럽지만. 그러나 원하는 한 가지 있다면 “한 알이나 반 알이나 무시하지 마세요. 이름이라도 알고 계셨으면 좋겠...” 미처 다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쾅! 문을 닫고 나가버리는 당신의 귀밑머리 아래가 참 서늘하다. 질병 부담이 크고 주요 사망원인 1/4을 차지한다고 알려진 질환. 고령화 진행으로 고혈압 환자 수는 늘어나고, 동반 질환이 이것뿐인가. 그것들로 사회경제적 부담까지 증가하리라는 것은 뻔한 사실일 테고. 몇 년 새 몇 % 증가했다는 지표, 그래서 때로 그것은 헛스럽게 화려하다.


상곡소장님께 / 상병명 [I109] Unspecified Hypertension. 귀 보건진료소에서 고혈압 진단 의뢰하신 분입니다. Ambulatory Blood Pressure(24hrs) 측정 결과, 비교적 잘 조절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다만 주야 중 변동 진폭이 큰 편이고, 간혹 기립성 어지러움증 있다고 호소하시는 바, 칼슘길항제보다는 ARB제제(Losartan 50mg PO #1 Daily)로 처방 변경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EKG와 Chest X-ray에서 특이 소견 관찰되지 않습니다. 혈액 검사 결과 별지로 첨부합니다. 투약 관리 잘 이행될 수 있도록 교육하여 주시고, 변동사항 있을 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After 3Ms, HbA1c & Lipid profile for re-check F/U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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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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