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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Dec 26. 2016

[포토에세이] 새 소망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소망


해돋이를 보기 위하여 강원도로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저문 인생의 슬픔이 가득한 장례식장이다. 죽음이 나와 멀다고, 죽음에 대하여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바쁘게만 살아가는 우리에게 장사(葬事) 치르는 이 예식장은 얼마나 낯선 곳이던가. 새해를 이틀 앞둔 날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슬프게도 새해 첫 여행지는 바닷가가 아닌,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장례식장이 되고 말았다.


“저는 일본에서 왔는데요, 조선에서 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욕을 가르쳐줘서 힘들었구먼요. 어머니는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왔느냐며 회초리로 마구 때리셨어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말리기는커녕 저 녀석 정신 바짝 차리게 하라며 호령을 하셨구먼요. 저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조선에서 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욕을 가르쳐줘서 그랬구먼요.”


임종이 다가온 것 같다는 주치의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달려간 우리에게 아버님이 섬망 속에서 남기신 마지막 말씀이다. 우리가 가족임을 알아보지 못하는 당신이 이렇게나 낯설다니. 아무리 흔들어 깨우며 아들인 것을, 며느리인 것을, 손자인 것을 보여드리고 알려드려도 당신은 두려움에 떠는 ‘한 소년’일 뿐. 눈물 젖은 불안한 눈동자가 우리 마음을 미어지게 만들었다.


의식 저 너머 세계에는 도대체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일까. 깊고 깊은 무의식에 봉인되어 있던 칠십여 년 전의 기억은 어쩌자고 죽음을 앞둔 순간에 되살아나는가. 강산이 변해도 일곱 번은 더 변했을 세월 풍상에 아무리 깊은 상처라 할지라도 기억 조각은 회색 유해(遺骸)로 멀리멀리 사라지고도 남았어야 옳지 않은가. 송구영신(送舊迎新) 길목이 마지막과 첫날 시간의 만남이 서로 다른 조각보를 맞댄 시간의 시접처럼 느껴진다.


조선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나 일본어를 국어(國語)로 배우셨고, 일본 역사를 국사(國史)로 배우신 당신. 모국(母國)으로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국어와 국사가 다른 벽에 부딪힌 열다섯 당신. 나라 잃은 약자의 회한과 쫓기듯 고향으로 돌아온 당신은 언어 장벽에서 부터 시작된 고통으로 말할 수 없는 아픔이 골수 깊숙한 곳까지 뿌리내린 것이 분명하다. 평소 말씀이 없던 당신이 며느리인 나와 말문이 열리고, 늦은 밤까지 이야기를 나눌 때면 잊지 않고 흐리시던 말씀.


"아가야! 나는 지금도 조선말이 어렵구나." 아! 열다섯 소년은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많은 아름다운 불꽃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지만 불과 몇 분 만에 사라진다. 태어나는 시간이 있으면 죽는 시간이 있다. 새해에는 죽어야 할 숙명(宿命)과 생의 유한함과 인생행로의 끝을 숙고(熟考)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던 누군가의 메시지를 되뇐다.


미래를 열어가는 힘은 뜨거운 눈물보다 작은 사랑의 실천에 있음을 생각한다. 남기신 교훈을 생각하며 다짐한다. 나의 새해 첫날 다짐은 운동도 다이어트도 아니다. 아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어른이 되자는 결심이다. 입관(入棺) 전 아버님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회개한다. “사랑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눈물 없는 영원한 그곳에서 평안을 누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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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전도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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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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