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호사 박도순 Sep 12. 2016

[포토에세이] 꽃들은 길을 묻지 않는다

그 어디나 하늘 나라

꽃들은 길을 묻지 않는다


“너는 그런 촌구석에 있기 아까워. 어쩌다 그곳으로 갔냐? 도시로 나와라. 답답하지 않니?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시골이 뭐가 좋냐? 나와, 이것아!” 오래간만에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의 쏟아지는 질문에 무엇부터 대답을 해야 하나. 그러냐? 그런가? 그렇구나. 나는 어정쩡한 대답으로 안부를 나누었다. 그래, 그런데 말이지,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음에 대하여 심히 고민해 본 적이 있기는 있었던가. 왜 여기에 있는지,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인가.


저기 모퉁이를 돌아가면 금례 씨 집이다. 그곳에 갈 참이다. 보나마나 어머니는 집을 비웠을 것이다. 팔순이 넘은 홀로 지내는 분이 무엇을 하느라 날마다 바쁜지, 열 중 아홉 번은 빈 걸음으로 돌아서게 만드신다. 마루에 앉아 왕진 가방에서 혈압약을 꺼냈다. 날만 새면 앙을 거리는 간절약(!)도 달라고 하셨지. 정지문 앞 숫돌 그릇에 담긴 하늘이 파랗다. '안녕하세요? 진료소장입니다. 다녀갑니다. 다음에는 얼굴 좀 뵐게요.' 내 아무리 현란한 필체 문구로 안부 글을 남긴다 한들, 금례 씨에게 검은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일 뿐이다. 두어 밤 자고 나면 옆집에 사는 김 씨가 연락할 것이다. 금례 씨를 대신하여 보건진료소에 전화를 걸어,


“소장이 놓고 간 약은 잘 받았응게 염려 마시라네. 그라고 큰방 문 앞에 햇고구마 몇 개 푸대에 담아놨응게 다음에 올라오거든 꼭 챙겨가라 하시네!” 고맙다는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김 씨는 수화기를 내릴 것이다. 뒷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시원하다.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동네가 고요하다. 내 발걸음 소리가 스스로 인기척이다. 햇살도 선선히 바사지는 초가을 오후. 홀로 나선 출장길에 금례 씨네 삽작문 아래 봉숭아가 나를 반긴다.


졉(겹)봉숭아라고 자랑하시더니, 네가 너로구나. 붉기도 하여라. 참젖을 먹었더냐, 우유를 먹었더냐. 무엇을 먹였기에 이토록 건강하게 길러내셨단 말인가. 씨방을 뒤집어 죽어서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는 결백의 꽃이라더니. 톡!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쪼그리고 앉아 너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이런 촌구석에 있기 아까워. 어쩌다 이곳으로 왔냐? 도시로 나가라. 답답하지 않니?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냐? 시골이 뭐가 좋냐? 나가, 이것아!” 알아듣는지 못 알아 듣는지 붉은 꽃잎이 흔들린다.


봄이 오면 꽃이 핀다. 가을이면 단풍이 든다. 보건진료소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아픈 하소연을 듣는다. '듣고' '기록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약을 준다. 이것은 보건진료소에서 간호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오히려 너에게 묻고 싶다. 너님이 말하는 ‘촌구석 밖의 내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것을 나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가. 길의 방향을 지도할 수 있는가. 그 길을 가르쳐다오. 생각을 나누자. 나도 당신이 지지하는 길로 나서고 싶다. 사람들은 종종 묻는다. 무슨 일 하세요? 산골에 있는 보건진료소에 근무합니다만(...이라고 대답하면 그들은 보건진료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기는 할까). 이야기가 길어질까, 그냥 주부라고 대답했다가, 이왕 이야기가 길어지는 경우 시골 간호사 이십 년이 넘었다고 하면 뒤따라오는 질문.


“시골 생활이 답답하지 않으세요?” 말없이 웃으며 창밖을 본다. ‘그러게요, 시골은 답답한가(답답해야 하는가)요? 나는 왜 답답한 촌구석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발목 아래로 흘러 닳아진 세월이 보인다. 뒤꿈치가 까칠하다. 금례 씨네 집에 가는 길, 골목길 울 밑 봉숭아에게 묻는다. “너 이런 촌구석에 있기 아까워. 어쩌다 이곳으로 왔냐? 넓은 세상으로 나가라. 더 큰 세상으로 나가란 말이다.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니? 시골이 뭐가 좋아?” 붉은 꽃잎이 흔들린다. 일어나 돌아서며 생각한다.


봉숭아에게 내가 건네는 이런 질문과 권유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내가 대도시 대형병원에 근무한다고 해서 나의 능력이 대형화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십 평이 넘는 집에 산다고 해서 내 누울 자리가 다섯 평이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리 신발이 많아도 내가 신을 수 있는 신발은 한 켤레이다. 아까운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 자리는 도대체 어디란 말인가.


봉숭아에게 꽃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할 수 없듯 당신도 나에게 내가 가는 길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꽃들은 길을 묻지 않는다. 이제 나에게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아 주오. 봉숭아가 꽃인 채로 꽃으로 거기 있는 것처럼. 내 아무리 현란한 필체로 안부 글을 남긴다 한들 팔순이 넘은 금례 씨에게 검은 것은 그냥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인 것처럼. 그래도 아무 상관없는.


나는 며칠 후 금례 씨 집을 다시 갈 것이다. 아래채 큰방 문 앞 비료부대에 담긴 햇고구마를 불끈 들어 가져올 것이다. 잘 챙겨왔노라고 저녁이면 감사 전화를 할 것이다. 이곳을 떠나 따로 있어야 할 아까운 그 어느 자리란 나에게 없다. 어쩌다 여기에 온 것은 더욱 아니며 이보다 더 넓은 세상도 있지 않아. 그냥 그대로, 우리는 지금 , 아까운, 넓은, 있어야 할 제 자리에 잘 있는, 한 송이 붉은 꽃이다.


손대면

터질지도 몰라.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

.

.

@전남 영광군, 2013


매거진의 이전글 [포토에세이] 새 소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