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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Oct 24. 2016

[포토에세이] 알아들을 나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알아들을 나이


“글쎄요, 숫자로 딱 잘라 선을 그시기는 참 어렵제. 한 살 한 살 먹어 보면 알게 되는 것인디, 칠십이 되어도 안 되는 사람은 안 되거든. 그릇에 물이 차면 자연으로 흘러넘치는 것마냥 그렇게 만들어지는 나이다, 그 말이오. 세월을 저꺼바야 되는 나이지. 그냥 세월만 처먹는다고 되는 나이가 아닝게. 속부터 양글어지는 것이지. 뜻은 알것는디 말로 갈챠 줄랑게 그거시 참 어렵네잉(웃음). 세월이 스승인 것은 틀림없는 일인디.”


나는 동네에 있던 중학교(본교와 떨어져 마을에 따로 세워진 분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다. 빨리 시골을 벗어나고 싶었다. 혼자 지낼 수 있게 된 여고 시절의 좁은 자취방은 내게 천국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사가 되었다. 그런데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고향으로 오게 되었다. 고향에 있는 보건진료소에 발령을 받은 것이다. 걸핏하면 우는 아이여서 ‘울내미’라는 별명으로 통하던 내가 직장인이 되어 귀향한 것이다.


어르신들을 다시 만나니 반갑기도 했지만 흘러간 세월 크기만큼 어색하기도 하였다. 아랫마을 울내미로 기억하시니, ‘소장’이라는 직함 부르기가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못했고, 나 또한 어르신들로부터 그렇게 불리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다고 울내미를 대하듯 반말로 얘기하기도, 존대하기도 어색한 그런 상황이었다. 가끔은 차라리 타향에서 근무하면 공사(公私)가 나뉘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하였다.


하지만 머리가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는 증상에 약과 주사를 처방하기 전, ‘속을 아는 사람들’이어서 타향에서는 경험하지 못할 일을 겪기도 한다. 그것은 매우 색다른 일이어서 앞으로 어떤 일들을 겪을까 즐거운 기대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향 친구 부모님을 진료실에서 만나는 반가움도 잠시, 훌쩍 지난 세월 뒤로 칠팔 순을 넘겨 늙어 계신 모습은 안타깝기 짝이 없다.


바지저고리를 입은 큰아버지가 논두렁을 걷던 모습, 치마저고리를 입은 큰어머니가 새참 소쿠리를 이고 밭두렁을 걷던 모습은 진료실 창문만 열면 손에 잡힐 듯 지척인데 이제는 모두 먼먼 추억이 되고 말았다. 세월같이 빠른 것이 없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공감한다. 고향 떠나 강산이 세 번 변한 뒤에 돌아왔으니, 골목 풍경이야 말하여 더 무엇하리.


진료를 마치면 어르신들은 내가 몰랐던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거나 마을 사람들의 비화를 들려주시기도 한다. “이제 소장도 알아들을 만한 나이가 됐응게 허는 말인디….” 하며 운을 떼면 무슨 말씀을 하려고 저러시나 싶어 귀를 세운다. 딸만 내리 여섯 일곱을 낳던 박 씨에게 술을 진탕 먹여 윗마을 과부댁 방에 밀어 넣었었다는 장난부터 야반도주한 김 씨와 이 씨의 불륜 이야기.


박 씨 아들이 공부를 하도 잘했는데, 2등만 하는 아들에게 1등 좀 내주라고 박 씨에게 막걸리를 한 되나 사줬건만, 끝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며 허허 웃는 강 씨 등. 이제 와서 오래된 이야기들을 꺼내는 것은 누구의 흉허물을 들추자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절박함을 관용하고, 곰삭은 희로애락의 순환을 웃으며 나누는 것이다.


사람 사는 곳에 어찌 좋은 일만 있었을까.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가슴 뻐근한 이야기를 듣노라면 마음 찬 박수가 나오기도 하고, 짭짤한 눈물이 목으로 넘어가기도 한다. 내밀(內密)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이제 소장도 알아들을 만한 나이가 됐응게 하는 말인디’라는 말을 생각한다. 알아들을 나이가 된 사람으로 인정(認定)하여 주심이라 내심 뿌듯하다. 세월에 묻은 후회와 아쉬움을 나누려는 서두(序頭)인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 말귀가 어두워 밝히 알아듣기에 부족한 나의 총기(聰氣)는 여전히 부끄러울 따름이다.


허리가 아파 보건진료소에 왔다는 최 씨 할아버지에게 차 한 잔을 건네며 “알아들을 나이란 몇 살부터일까요?” 여쭈었다. 철부지가 어르신들 삶을 이해할 나이, 숫자로 딱 잘라 선을 긋기는 어렵지만 한 살 한 살 먹어가다 보면 알게 된다는 나이, 살아봐야 채워진다는 나이, 말로 하기는 어려운, 뜻을 헤아려 아는 사람됨의,

그 나이.

.

.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린도전서 13:12)

.

.

@적상면 포내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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