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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Oct 18. 2017

[포토에세이] 사소한 것의 위대함

그 어디나 하늘 나라

사소한 것의 위대함


그것은 작은 촛불이 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도 같았다. 불꽃이 점점 더 작아지다가 마침내 조용히 꺼지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p. 56). 이 문장은 내 기억 속 저 아래에 깊이 가라앉은 박 씨를 불러오는 주문呪文처럼 다가왔다. 호스피스 간호사 재닛. 미국 일리노아주 롬바드 간호 현장에 그녀와 함께 있는 듯한 동시감同時感을 준다. ‘마침내 조용히’ 문구 사이에 퇴고를 허락한다면 마침내 괄호 열고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하고 조용히 괄호 닫기 기호를 넣고 싶다.


박 씨와 그의 아내와 함께했던 엔딩 스태프 롤이 펼쳐진다. 남편의 머리를 무릎에 안고 몸을 뒤로 젖힌 여인이 운다. 한 손으로 가슴을 친다. 비탄으로 절규하는 그 영상은 내 기억 속에서 묵음 처리 후 봉인된 아주 오래된 피에타 상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벗은 한 영혼을 당신 손에 맡기오니 주여, 받으시옵소서, 여기 남은 자들의 슬픔을 안아주시옵소서." 무릎 꿇고 고개 숙인 목사님 옆으로 눈감은 나는 아멘으로 화답한다. 죽었으나 아직 살아 있는 듯한 남편의 따뜻한 시신을 안은 한 씨가 하늘과 하나님을 원망한다. 오십육 년간 신神이 기획하고 감독한 박 씨의 삶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무언가를 먹으면 체한 것 같고 소화가 잘 안 된다던 그에게 나는 농특법이 허용한 메토클로프라마이드와 베스타제를 처방했다. (용량 증감 외에는 별다른 답이 없는).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는 잦은 방문에 내시경 검진을 권유했고, 그는 결국 대학병원에 입원했다. 말기 위암 판정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어두운 통증이 그를 에워싸면 아내 한 씨는 낮이든 밤이든 목사님과 나를 불렀다. 목사님은 그를 안고 기도했고, 나는 그가 잠들 때까지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보건진료소로 돌아왔다. 먹고 마시는 것이 고통이었던 박 씨가 남긴 마지막 말은 “소장님, 물 한 잔 시원하게 마셔봤으면 좋겠습니다.”


그 후 더 들은 말의 기억이 없다. 가정방문 하면 그는 눈을 감고 있어 말을 걸기 조심스러웠고, 의식이 뚜렷하지 않아 말을 걸기도 어려웠다. 극심한 고통으로 요동치던 소란함이 사라지고 얕고 느린 호흡이었다가 빠르고 가쁜 숨이었다가, 깊은 듯 얕은 숨을 내쉬고. 촛불이 꺼지듯 마침내 (바람 한 점 없이 잠잠히) 조용히 그렇게 잠들었다. 그 후 그의 아내는 서울 사는 딸에게 터와 짐을 옮겼고 고향집은 새 주인에게 팔렸다.


죽어가는 과정이나 죽은 사람을 본 것은 어린 시절 우리 큰어머니가 처음이었다. 간호대학 시절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선 거의 날마다 만났지만, 간호사가 되어 삼십 년 가까이 보건진료소에서 경험한 그것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이것이 몇천, 아니 몇만 건件 진료 기록보다 더 선명히 각인된 것은 ‘죽음’이 인류 최대 명제이며, 죽음으로 가는 길에 큰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죄송함, 간호사로서 역량이 부족했다는 자책과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일요일 오전 교회 종소리가 산골짜기에 울려 퍼진다. “두세 고랑만 더 일하면 풀매기가 끝나는디, 그랬다간 예배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 호맹이를 밭 가운데에 확 집어 던지고 왔다.”면서 남편 간호 중 만난 ‘신앙 고백’을 나누어주시던 한 씨. 명절이면 반가운 두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아직 보건진료소에 남은 덕분이다.


해드린 것 별로 없어 죄송했노라고 하면 "그냥 그렇게 옆에 있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었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그 후 몇 차례 보건진료소장으로서 임종과 장례 절차에 참예할 때 나는 가족보다 한 발 뒤에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다만 ‘그저 바라봄’으로 그들의 조력자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배우자나 자녀, 혹은 이웃집 아주머니나 아저씨가 진정한 그들의 삶을 돌보는 ‘간호자’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역주민의 내밀한 삶으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적 영적 신념까지 만났다. 동의하기 어렵던 것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거부감 없이 용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나의 종교를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며 그럴 용기나 권한도 없었다. 다만 나의 신神에게 그들의 평안을 당부할 뿐이었다. 두렵고, 무섭고, 때로는 극심한 고독감에 사로잡히던 죽음 현장에서 물 한 잔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그 사소한 행위의 감사와 위대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었고, 어느 한 사람의 삶이란 것은 그의 환경과 여건을 최선으로 초월하려는 저마다 어떤 몸짓의 결과였고, 그것은 신이 허락한 방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간호사가 되지 않았다면, 보건진료소장이 되지 않았다면, 농촌 보건진료소가 아닌 도시 병원에서 근무하였다면 이런 경험이 남긴 무게는 덜 무겁거나 더 가벼웠을 것이다. 그것들은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당신은 앞으로 또 어떻게 나를 조성하실 계획이며 감독하실까. 그간의 모든 경험에 대하여, 기회를 부여하신 것에 감사드려야겠다. 나는 간호사가 되길 참 잘한 일이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았어요!”


세상과 이별하기 전에 하는 마지막 말(재닛 웨어, 인물과사상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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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상면 포내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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