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제가요, 집사람이 아파서 7년 가까이 간호했습니다. 머시냐…, 어렸을 적에는 코피를 자주 쏟았고요,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잠시 침묵) 한 40년 넘었을랑가, 이비인후과에 가서 수술했는데 의사 양반이 전깃불로 혈관을 지졌다던가? 그렇습디다. 그 뒤로 피는 멎었습니다만….” 진료대기실 자동혈압계 옆에서 측정 과정을 지켜보다가 진료실로 들어서는 나에게 이씨는 혼잣말처럼 덧붙인다. “그러셨군요.”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칼 주름은 아니지만 잘 다려진 감색 바지, 소매 끝 한 단 접어 올린 하얀 잠바, 기름을 살짝 발랐을까, 정성스레 빗어 넘긴 헤어스타일. 첫눈에 비친 어르신 모습이 내 아버지 모습과 겹쳐졌다. 정보시스템 일차진료 창을 열어 이름을 입력했다. 검색 정보가 없다고 경고창이 뜬다. “보건진료소에 오신 적이 없군요.”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여쭙고는 조회를 요청했다. 건강보험 가입, 관내 타 지역 어르신.
“어디 편찮아서 오셨습니까?” “요새 주변에서 혈압이 높다고 해싸서 와봤습니다. 건강검진 했더니 거기서도 높다고 그러고, 보건소에서 나온 선생님들도 그러고, 농협에서 재봐도 그래 싸코.” 자동혈압계에 어르신 왼팔을 깊숙이 넣었다. 시작 단추를 눌렀다. 이윽고 나타난 결과가 수상하다. 흔한 120에 80도 아니고, 드문 160에 90도 아니다. ER3. 재측정해봐도 ER3.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에러 메시지였다. 기계가 고장이라도 난 것일까. 내 팔을 넣어 측정하니 135에 76. 수동혈압계가 놓인 진료실 쪽으로 걸어가던 중 들은 ‘집사람 간호 7년’이라는 말이 쉬익~ 바람 소리로 지나간다.
왼팔에 커프를 감았다. 맥을 만지고 청진기 벨을 팔꿈치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청진기를 귀에 꽂았다. 수은 기둥을 180까지 올렸다. 혈류를 차단했다. 잠시 멈췄다가 벨브를 풀어 서서히 압력을 덜어낸다. 혈관이 열리면서 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일반이거늘. 맨발로 복도를 내달리는 아이 발소리마냥 당신의 맥박(脈搏)은 심히 쿵쾅거렸다. 수은 기둥을 250으로 치켜 올렸다. 200 너머에서 불퉁불퉁 요동친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어르신에게 뭐라고 설명을 드려야 하나. 나는 근심이 시작되는데 어르신은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보신다.
“머리가 아프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불편하지 않으세요?” 진료실 바닥으로 시선을 떨군 이씨. 머뭇머뭇하신다. 그럴 줄 알았다고 하신다. 알면서 왜 서두르지 않으셨는가. 왜 방치하고 계시는지 묻고 싶었지만 나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숫자로 드러난 혈압의 좌표도 놀라웠지만, 사실은 무심하게 흘려들은 ‘집사람 간호 7년’이라는 말이 가리고 있는 안개 속 풍경이 더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고추 모종 작업 중 밭에서 갑자기 쓰러진 집사람, 구급차에 실려 대학병원에 도착했고, 응급수술과 재활, 약물치료까지 받았지만, 생각만큼 좋아지지 않은 집사람. 어르신의 일상은 예상치 못하게 변해갔다. 역할이 뒤바뀌었다. 밥 짓고, 설거지하고, 환자의 대소변 처리까지 온전히 당신 몫이 되어버린 시간들. 부인은 아픈 탓인지 홀로 있기를 무서워하여 잠시도 혼자 있는 것을 싫어했다. 어쩌다 장에 다녀오거나 바깥일 보고 돌아오면 아내는 토라지고 점점 서운해 하고, 그렇게 7년.
“긴 병에 효자만 없는 것이 아니라 효부(孝夫)도 없는 것입니다. (웃음) 그나저나 혈압은 왜 올라가는 것입니까?” 고혈압의 원인을 설명해야겠다. 말씀드리려는 순간, 스무 개 남짓 들어 있는 종이 기저귀 값이 무서워서 젖은 소변 헹궈서 말린 다음 사용했다. 자식들에게 부담 주기 싫어 그러셨단다. 내 심장이 울컥거렸다. 겨울이면 더 매섭고 고역스러웠다고 하신다. 혈압에 대하여 몸 기울여 설명하려는데, 요새는 세상이 좋아져 정부에서 물종이도 주고 기저귀도 준다 하신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스물일곱 번 넘는 동안 달아오르기를 거듭한 풀무질에 당신의 고막이 녹아진 탓일까. 동문(東問)하면 서답(西答)하는 어르신 등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혀가 빗어 넘긴 흰머리 사잇길을 핥고 지나간다.
질병이 없거나 단순히 허약하지 않은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정신적, 영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하고 역동적이고 완전한 상태(Health is a dynamic state of complete physical, mental, spiritual and social well-being and not merely the absence of disease or infirmity). 무엇을 먹어야 무엇을 마셔야 더 건강할까.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정보와 고민들. 왜 혈압이 올라가는지를 설명하는 원인도 무수하다. 내분비 질환, 심장 질환, 신장 질환, 노화와 비만, 운동 부족, 유전적 요인 등.
200에 100은 혈압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관리 되지 못한 이씨의 간병 스트레스가 남긴 바람의 흔적이 아닐까. 수없이 혈관 벽을 두드렸을 흔들리는 박동, 심장에서 멀리 퍼져나간 모세혈관까지 피를 보내야 했던 당신의 몸은 더 높은 압력이 필요했으리라. 누워 지내는 아내를 바라보며 좌절과 체념, 수용과 저항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한숨을 쏟으셨을까. 어르신은 즉시 약물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항고혈압제를 직접 처방하는 것은 보건진료소 밖의 일이다. 보다 정확한 진단을 위하여 의사에게 다녀와야 한다. 보건진료소에서는 의사가 제시한 치료 가이드라인에 따라 고혈압 환자를 관리한다.
“원장님께. 귀원의 발전을 빕니다. 자동혈압계로 측정 불가, 청진 혈압 200/100mmHg. 총콜레스테롤 197mg/dl, 식후 혈당 141mg/dl. 적절한 평가와 검사로 선처 바랍니다. 귀원에서 시행한 검사결과와 치료 가이드라인을 회신하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마지막 줄에 ‘뇌졸중 배우자 간호 중입니다’라고 덧붙이려다, 그만둔다. 진료의뢰대장을 클릭해본다. 이씨가 보건진료소에 다녀간 지 벌써 열흘이 넘었다. 진료회신서 등록 셀이 텅 비어있다. 어르신께서는 병원에 다녀오기는 하셨을까. 샘골 산허리에 안개가 걸쳐 있다. 들판은 연초록 바다로 너울댄다. 늙은 감나무 잎사귀는 제각각 수선스럽다. 아침부터 무슨 바람이 이렇게 분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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