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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간호사 박도순 May 08. 2023

길에서 만난 사람들

간호일기

길에서 만난 사람들


“쎄가 빠지네, 그게 뭔 말이여?” “아이고 어처케야 옳이여? 내 심장이 다 널어지고만. 환장허것네. 참말인가요?” “가신다는 말씀 들으니 참 섭섭하고만요. 어찌 말로 다 허겄습니까.” “윗자리 계신 양반들 웃기네. 아랫사람 말도 좀 들어줘야는디 너무 일방적이구마. 나랏법이 상전이라지마는 우리덜한티 상의도 없이 가라는 거는 내쫓는 거 아닌가베.” “왜 그랴. 한자리에 가만두지. 뭘 그리 뺑이를 돌려 싼대요, 돌리기를! 사람 사구는 일이 어디 하루 이틀 새에 되는 일인가요? 참말로 별꼴 다 보것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겠다. 그냥 듣고만 서 있다.


  우리 군에는 9개 보건진료소가 있다. 리(里) 단위 5∼6개 마을 주민의 건강을 돌보고 있다. 최근 보건진료소장 2명이 동네를 떠났다. 한 후배는 대학원 진학으로, 한 동료는 건강을 이유로 사직했다. 공진보건진료소에 첫발을 디딘 것은 2019년 1월 첫날이었다. 이사 오던 날은 아침부터 눈이 펄펄 내리고 추위는 송곳 같았다. 인사 이동을 겨울은 좀 피해주기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정년퇴임하신 선배님의 빈자리를 이어야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짐을 풀었다. 덕유산 아래 동장군 위세는 지금이나 그때나! 수돗물이 얼어있다. 물이 나오지 않았다. 세탁, 화장실, 청소 등 쌓인 일이 산더미인데 누구에게 연락해야 하나. 참으로 난감했다.


  날이 밝아왔다. 첫 환자가 오셨다. 말을 못 하고 게다가 귀가 안 들리는 남자 어르신이었다. 아무리 눈을 바라보며 손짓, 발짓까지 해보았지만,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왔다는 말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얼마나 많은 노를 얼마나 오래 저어야 우리 사이에 놓인 저 강을 건널 수 있을까. 조각조각 흩어진 생각들이 흰 눈처럼 무겁게 쏟아졌다.


  『내 고향 안성. 이 얼마나 좋은가. 내 고향 안성 사람들은 어르신들을 잘 모십니다. 남의 말을 좋게 합니다. 선배는 후배를 아낍니다. 후배는 선배를 존경합니다. 향토애가 깊습니다. 안성을 사랑합니다.』


뒷면에는 안성버스터미널 운행 시간표가 인쇄된 책받침을 들고 어느 어르신이 오셨다. 나는 얇은 코팅 종이에 쓰여 있는 문장에서 안성 사람들의 두터운 지역 정신을 읽었다.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아끼며 남의 말을 좋게 하고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들. 이전 근무지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어떤 뿌듯함이 마음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마을 이름 유래에서부터 골목길 길이와 깊이, 주민들 과거 병력, 현재 병세, 거동 불편 정도 등 나의 간호 업무는 나날이 확장되었다. 보고 듣고 또 보고 들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면서 누군가는 된장, 누군가는 고추장, 누군가는 배추, 누군가는 무, 누군가는 토실한 햅쌀에 당신 마음을 비벼 주셨다. 나는 공진 땅에서 영근 곡식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안성 사람 화(化) 되어 갔다.


  폭설이 쏟아진 아침이면 제설기를 밀고 들어와 눈을 치워주고 가는 사람, 여름에는 키 큰 꽃나무를 예초기로 잘라주고는 말없이 가는 사람, 부서진 출입문 손잡이를 고쳐주신 택시 기사님, 바느질이 엉키는 재봉틀을 고쳐주신 세탁소 사장님, 물김치 열무김치 갓김치 김장 김치 나눠주신 어르신들. 돌아보니 온통 사랑 빚이다. 감히 혜량(惠諒)할 방법이 없다. 나는 마치 사랑의 배신자가 된 것 같은 무참한 기분이다.


  “정(情)이란 거이 참 무솨. 눈에 뵈지도 않는 것이 까시가 달렸당께. 맴을 걍 콱콱 찌르네. 언제 또 보겄능가요.” “한식구나 다름없이 농담도 하고 거칠거칠한 밥도 같이 먹고 그랬는디 인자 그런 꼴 못 보겄고만요. 못 만나것구나 못 만난다, 그 소리지요. 이생에 다시 만나지것능가요. 내생 인연이 있겄지. 소장님! 잘 가시요, 우리 동네 오셔서 수고 많았습니다. 즈들 같이 깝깝한 인생들 돌보니라고(웃음). 가신당게 참말로 여간 서운한 게 아니고만요.”


  간호라는 이름으로 만난 주민들은 나에게는 경험의 스승이요, 추억의 기저가 되어 주셨다. 우리 주민들 없이 어찌 보건진료소 존재 의미가 있으랴. 인사 발령으로 부남면으로 이동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하는 말씀에 ‘그게 먼 소리요? 쎄가 빠지네, 호랭이가 팍 물어가네.’ 어르신들은 들고 있던 숯불을 발등에 놓친 것처럼 깜짝 놀라시며 다시 바라보신다. 퉁! 험시나 심장이 널어지고 환장허겄다는 말씀에 내 심장도 막 더워진다. 날마다 호주머니에 지니고 다니던 귀한 소지품 하나 잃어버린 것만치 서운하다, 아랫사람 말도 좀 들어야는디, 소장들을 휘저서 놓으면 누가 존 것이여? 행정에 대한 불만과 원망 꼬리도 감추지 못하신다.


  산책을 나선다. 두 갈래 길에 서서 이쪽으로 걸어갈까, 저쪽으로 걸어갈까 마음을 달아본다. 낡은 건물 휘감아 덮은 보랏빛 등꽃이 우중에 애닯다. 서다 걷다 서다 걷다 바라본다. 나의 의지대로 앞길이 펼쳐진다면 혼자 노는 아이처럼 이내 심드렁해질 것이다. 봄날 반딧불시장에서 혹은 가을날 안성시장에서 우리는 우연처럼 만날 것이다. 만날 사람은 끝내 만나게 되어 있다는 영화 대사를 위안으로 이 아쉽고 아쉬운 아쉬움을 덜어본다.


그렇게

나의 길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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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읍,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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