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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간호일기

여름 풍경

간호일기

by 간호사 박도순

여름 풍경



며칠 전이었다. 불콰한 얼굴, 땀에 젖은 머리는 이마에 달라붙어 있다. 처음에는 벌에 쏘였나 싶었다. 김 씨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튿날, 들깨 죽은 데 보식하러 갔어요. 식전에 끝내고 오려고 새벽 일찍 갔지. 호미질하면서 모종을 심는디, 어제랑 똑같은 증상이 일어나는 거여. 앞으로 꼬꾸라지더라고요, 하시는데, 아! 이것은 벌 쏘임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여름 신호, 온열질환의 언어 아닌가. 나는 어떤 처방을 해야 하나 골몰하며 당신의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


그런 꼴은 처음 겪었다니까. 자꾸 꼬꾸라져! 미식거리고 어지럽고, 머리가 깨지게 아프고, 말이지. 비지땀이라는 거 있잖아요, 끈적한 거. 하품이 나고 다리가 풀리면서 저절로 주저앉아지더라고요. 지주목을 잡고 일어서도 안 되아. 핸드폰은 집에 두고 왔지,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지, 이러다가 죽을 수 있겠구나 싶더라고. 일흔다섯 김 씨가 일하는 밤나무골 새벽 풍경에 나도 이미 함께 서 있다.


어르신은 며칠 전에 겪은 일을 더 보태어 설명하셨다. 검게 그을린 팔뚝에 혈압계 커프를 감는 동안에도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깨밭에 제초제 한 통, 노린재 살충제 한 통 작업 중이었다고. 금방 끝날 것이라서 그날따라 마스크도 안 쓰고, 방호복도 입지 않았다고. 기운이 빠지면서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라고. 평소 같으면 반 시간도 안 걸릴 일을 두 시간 넘어 어거지로 끝냈다고 하셨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자 기어 오다시피 집으로 와서 찬물 샤워 후 누웠다고. 다음 날 새벽에 밭으로 또 가신 것이다. 같은 증상이 나타나자, 겁이 나서 보건진료소에 왔다고 하셨다. 혈압 110/70mmHg, 체온 36.9℃. 겉보기에 특이 사항은 없었다. 나는 지역보건의료정보시스템을 열어 작년 7월 질환별 내소자 분포를 조회하였다.


오늘은 최 씨가 오셨다. 올해는 5월 이후 7월 중순에 이르기까지 두 건의 사례를 만난 것이다. 최 씨는 보건진료소에 오기 전에 근무 확인 전화를 하셨다. 나는 전화기 너머로 당신이 말씀하시는 증상들을 받아 적으며 통화를 이어갔다. 식전에 고추밭 소독 중에 어지럽기 시작했다는 것부터 곧 머리가 아파지더라는 것. 기운이 없다는 증상. 나는 농약 스프레이 중독 증상부터 온열질환의 증상을 추정했다. 어르신을 기다렸다. 진료실에 들어선 당신은 밭에 뿌렸다는 농약 사진을 보여주셨다. 어지러운 중에 혼자 운전하고 오시다니, 대단해 보였다.


최 씨는 일본에서 가족 모임이 있어 다음날 출국 예정이라고 하셨다. 외국 여행이라 평소 개인병원에 다니며 수액을 맞는 등 나름대로 컨디션 조절 중이라고 하셨다. 보름 정도 집을 비워야 해서 심어놓은 작물에 농약을 치고, 쌈 채소에 그늘막을 만들던 중 평소와 다른 불편을 경험했다고 하신다. 신경 쓰다 보니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곤했던 모양이라며 멋쩍게 웃으셨다.


우리 지역에서 온열질환이 작년보다 이른 시기에 발현했다.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다. 좁은 지역에 나타난 두어 건의 사례로 질환의 발생 시기나 위중성을 논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올여름이 얼마나 더 힘든 계절이 될지, 사뭇 작은 각오를 더 해본다. 새벽에 잠에서 깨면 휴대전화를 찾는다. 아침 최저 기온부터 살펴보고, 최고 기온도 확인한다. 체감 온도, 강수량, 구름양, 습도와 자외선, 대기질 지수(AQI:Air Quality Index), 달의 궤적까지 훑어본다.


질병관리청의 온열질환 응급실 감시체계 신고 현황에 따르면, 7월 14일까지 온열질환자 누적 수는 1,566명, 사망자는 9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년 대비 2.5배나 증가한 수치라는 설명이 뒤따르고 있다. 이 숫자 너머에는 병원을 찾지 않은 사람들의 기록은 제외되었을 것이다. 의식 세계에서 우리는 삶의 계획을 세운다. 반면에 무의식은 때로 몸과 연결된 감정, 깊은 불안 등을 조종한다.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 의도와 다른 반응이 나타나기도 한다. 프로이트(Freud)는 억압된 감정이 신체 행동이나 증상으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나는 천천히 하자고 마음먹어도 상황에 쫓기거나 빨리 끝내야 한다는 조급증이 무의식적 압박으로 작동하면 노련함이 때로 무력해진다.


마스크도 안 썼고, 그날따라 방호복도 안 입었으니, 몸은 불편 증상을 일으켜 생명을 지키라는 신호를 보낸 것이 아니었을까. 위험에 노출된 나를 지키려는 내 몸의 방어기제가 작동한 덕분일 것이다. 전해질과 포도당, 수분 공급을 위한 5% DS 수액을 IV 했다. 환자 옆에서 잠시 지켜보다가 문을 닫고 조용히 나왔다. 서너 시간 후 어르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항 근처 아들네 집으로 올라왔다고 하신다. 다행스러웠다. 이전보다 맹렬한 폭우, 잦은 폭염이 오래 갈 것이라는 예보가 두렵다. 이 여름이 더 길-게 느껴지는 이유다.



@무주읍,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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