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간호사 박도순 Sep 29. 2015

[포토에세이] 오래된 인연

그저 바라볼 수만 있어도

<오래된 인연>



"십오 년 전에 나한테 자동차를 구매했다는데, 도대체 누구인지 생각이 잘 안 나네." 평소와 달리 이른 아침부터 남편이 바쁘다. 서울까지 다녀와야 한다며 서둘러 출근을 재촉한다. 십오 년 전의 고객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남편은 그가 누구인지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K 씨는 서울에서 가죽 가방 염색업을 하는 분이었어.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되었다며 나에게 차량 문의 전화를 하셨었지. 가죽공장 사업장을 방문했을 때 K 씨 옆에서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이 놀고 있었어. 오늘 보니 그 꼬마가 멋진 청년으로 자랐더군. 계약 서류를 챙기느라 오가면서 내가 K 씨의 아들에게 빵을 사다 준 걸 기억하고 있더라고. 어렴풋이 생각이 났네. 사람들은 작은 친절을 기억하나 봐. 평소 잘하면서 살아야겠어."


고객 K 씨는 청년이 된 아들의 구매 계약서에 망설임 없이 사인했고, 일시금으로 승용차를 구매했다고 하였다. 그날 아침이었다. 막 진료실로 들어서니 메시지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때때로 예상치 않은 이렇게 반가운 메시지를 자주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고객님 안녕하세요? 오랫동안 우리 회사를 아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객님께 수령 가능한 만기보험금이 있사오니, 즉시 받으시어 유용하게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상품명, 계약번호, 만기일과 만기 지급 금액까지 상세히 안내되어 있다. 실제 지급금액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만기일 이후에는 계약이 완료됨에 따라 더는 보험 상품의 보장과 혜택이 제공되지 않는다는 안내까지 덧붙여 있다. 이내 만기 환급금 입금 메시지를 받고 보니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어 부자가 된 것 같았다. 온종일 기분까지 우쭐해졌다.


둘째 딸이 백일이 다가오던 즈음에 계약했던 것으로 십 년 동안 보험료를 내고, 십칠 년 동안 보장받는 내용의 상품이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보험료는 자동 납부로 끝났고, 보장받을 수 있는 기간도 만기에 이르게 된 것이었다. 백일이 채 되지 않았던 딸이 대학생이 된 지금, 큰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은 일 없었고, 납입한 보험금 이자까지 되돌려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가. 어른이 되어가는 딸을 위하여 새로운 상품에 가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회사에서 보내준 안내장에 적혀 있는(아직도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설계사에게 전화하면 될 것이나.


십 년, 아니 십칠 년이 지나도록 연락도 없이 지내던 설계사에게 전화해야 하는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빵 몇 개를 사준 일이 기억되어 십오 년이 지나고도 다시 남편을 찾은 고객을 생각한다. 십칠 년 전 나는 보험을 계약할 때 설계사에게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그 설계사 또한 나에게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지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남편이 말했다.


"오늘 고객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네. 나는 자동차를 판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사고 있었구나. 사람을 어찌 값으로 계산할 수 있겠는가마는. 차량 판매 조건은 회사에서 결정하는 것이고. 나는 그동안 값비싼 자동차를 팔면서 좋은 사람을 많이 사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네."


십칠 년 전 보험설계사는 나에게 자회사의 상품은 팔았는지 모르지만, 고객을 사지는 못한 것이며, 나는 설계사에게 상품은 샀지만, 그녀가 나를 기억할 수 있는 사소한 친절을 베풀지 못한 부끄러운 고객이 아니었을까. 지금 무엇인가를(유형이든, 무형이든) 팔고 있는가.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는 사람의 마음을 산다는 마음으로 고객을 대한다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작은 친절과 정성스러운 뜻에 대하여 생각한다. 나는 무엇을 팔까. 아니, 어떻게 사람을 살 것인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무심한 친절들, 작은 것들을 무심 중에 쌓고 또 쌓을 일 아니겠는가.


.

.

.

@적상면 포내리, 2014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