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사랑이 아닐 리가 없다.
첫 회차가 송출된 이후로 종종 포털사이트에 <빅 리틀 라이프>를 검색해보곤 했다. 그러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의 글을 발견했다. 15회차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들’ 을 듣고 쓴 후기였는데, 듣다가 속이 뒤집혀서 바로 꺼버렸다는 내용이었다. 글쓴이를 그토록 화나게 했던 대목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고 아끼는 모녀가 등장하는 스토리였다. ‘엄마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집. 집이라고 할 수 있지!’라는 대목에서 속이 뒤집혀 정지를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뒤로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줄줄이 엄마로 고통 받는 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텐데...)
내가 불행할 때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언제나 쉽지 않은 법이지만, 가족관계에 한해서라면 더욱 그렇다. 직장 때문에 고통스럽거나 연인이나 친구 때문에 힘이 들 땐 무언가를 잘못 선택한 나를 자책하고 반성하면 되지만, 가족관계 때문에 힘들 때엔 탓하고 원망할 뚜렷한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고통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자니 내 고통이 너무 억울하고, 격렬하게 반항하자니 무력감을 느낄 뿐이다. 그런다고 이미 정해져있는 나의 엄마가, 나의 아빠가, 혹은 가정환경이 달라지지는 않기에. 이런 상황에서 화목한 가정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속이 뒤집히는 게 당연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그랬다. 정상가족의 그림에 거짓말처럼 딱 들어맞는 환경에서 살아가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의 결핍이 되레 증명되는 것만 같아 괴로웠던 때가 있었다.
나는 10대 시절 내내 엄마와 불화했고 그 때문에 가족 전체와도 불화했다. 엄마는 남매 중 첫째인 내게 유난히 엄격하고 모질었고, 나는 성인이 된 이후까지도 (사실상 <빅 리틀 라이프>를 시작하기 전까지도) 엄마가 나를 싫어한다고 진심으로 믿었다. 동생만큼 곰살 맞지도 않고, 애교도 없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집에서 사랑받는 동생과 비교해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건 그런 감정적인 교류가 아니라 주어진 일을 알아서 잘 해내는 것이었다. 10대엔 그것이 공부와 대학입시였고, 20대엔 그것이 취업이었다. 알아서 대학입시와 취업을 해낸 나는 부모에게 더할 나위 없이 ‘믿음직스러운 첫째 딸’이었는데, 사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내내 원했던 이미지는 그게 아니라 ‘사랑받는 첫째 딸’이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스스로 쥐어짜낸 책임감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이었으면 했다.
흔히 미디어에서 정형화해서 다루는 방식의 모성을 경험하지 못한 나는 내가 모성애 자체를 경험한 적이 없다고 여겨왔다. 하여 모성애를 다루는 소설, 드라마, 영화를 잘 보지 못했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연극 <친정 엄마>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정형화된 모성이 실은 신화에 가까운 허상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왜 나에게는 이런 엄마가 없을까. 이런 엄마만이 엄마라면 나는 엄마가 없는 것과 같다’ 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은 태가 난다던데, 나한테서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태가 날까봐 늘 전전긍긍했다.
이런 내게 “장도수PD는 어린 시절에 정말 사랑 많이 받으며 자랐나봐”라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건넨 지인이 한 분 계셨다. 나는 그 말을 듣곤 내심 안심하면서도 슬펐는데, 적어도 겉보기에 사랑받지 못하고 자란 티가 나진 않는가보구나 하며 안심했고 속 빈 강정처럼 허위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슬펐다. 아무래도 그 분 앞에선 영원히 솔직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분 앞에서 내 장막을 걷어 올린 건, <빅 리틀 라이프> 12회차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들’에 섭외요청을 드리면서였다. 나 역시 그 분을 바라볼 때마다 어떤 가정에서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저렇게 따뜻하고 사랑이 많은 어른이 될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온지라 부탁드린 인터뷰였다. 헌데 인터뷰에서 들려주신 이야기는 내 예상과 거리가 멀었다. 사실관계만 나열하고 보자면 행복보다는 오히려 불행에 가까운 유년시절이었다. 나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에게서는 사랑받은 태가 난다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말이다.
그 분은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 등장하는 ‘박완(고현정 분)’ 캐릭터를 예시로 들어 설명했다. 극 중에서 박완은 어렸을 적 바람난 아빠 때문에 상처받은 엄마가 자신과 동반자살 하고자 농약을 먹이려 했던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끝내 엄마를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지만 마침내는 엄마를 용서하고 화해한다.
“거기서 박완은 어렸을 때 아빠랑 헤어졌으니까 아빠한테도 사랑 받지 못했을 거야. 그리고 엄마가 자길 죽이려고 했던 기억 때문에 엄마는 내내 불신했을 거고. 근데 박완은 엄청 단단해 보이잖아. 사랑받고 자란 태가 나. 이유가 뭘 것 같아?”
나는 박완의 유년시절 결핍에 집중한 나머지, 현재 그녀에게서 완전한 빛이 난다는 걸 단 한 번도 자각하지 못했었다. 그 분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현재의 박완에게선 분명 빛이 났다. 왜일까? 내 지론대로라면 유년시절에 부성을 경험하지 못하고, 엄마로부터 살해위협까지 느꼈던 박완에게선 빛이 나면 안 됐다.
“외할머니, 그리고 엄마의 수많은 친구들. 그 사람들이 완이를 사랑해줬잖아. 그게 얼마나 큰 사랑이었을지 생각해봐. 그 사랑이면 부성에 대한 결핍도 채워질 수가 있는거야. 나도 그랬어. 아버지에 대해선 좋은 기억이 없지만 할머니한테서 큰 사랑을 받았으니까 결핍이 채워 진거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나는 유년시절의 나를 완성하는 게 꼭 생물학적 부모의 사랑뿐이라고만 생각해왔을까. 입을 쉽게 떼지 못하는 내게 그분은 마치 ‘네가 왜 이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토닥이며 이야기했다.
“나는 도수PD가 어떤 유년시절을 보냈는지 몰라. 하지만 내가 언제나 이야기했지. 도수PD한테도 사랑받은 태가 난다고. 잘 생각해봐. 할머니든, 이모들이든, 선생님이든, 친구들이든. 유년시절에 도수PD를 사랑을 채워준 사람이 분명 있을 거야.”
대답할 새도 없이 어린 시절 외조부모에 대한 기억이 밀려들었다. 나는 어릴 때 외조부모와 같은 아파트 위아래 층에 살았다. 맞벌이였던 부모님은 출근하는 길에 내복차림의 나를 안아들고 외조부모의 집으로 올라가 맡겼다. 그러면 나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당신들의 체온으로 이미 덥혀놓은 이부자리에 쏙 들어가 남은 아침잠을 마저 자는 것이다. 느즈막히 일어나면 밥을 먹을 때다. 할머니는 내 옆에 나란히 앉아 밥 위에 반찬을 올려주시고 나는 그걸 참새처럼 받아먹은 뒤, 할아버지와 함께 산책에 나선다. 가을이면 단풍을 주워와 베란다 창문에 잔뜩 붙여놓고 가을을 만끽했고, 봄이면 꽃 송이송이마다 향기를 맡으러 뛰어다녔다. 겨울에는 할아버지의 손재주를 빌려 동네에서 제일 멋진 눈사람을 만들었으며, 비가 많이 오는 여름에는 쪼그려앉아 물웅덩이에 떠다니는 소금쟁이를 구경한답시고 할아버지가 내 뒤에서 우산을 받친 채 몇 분이고 서계시는 줄도 몰랐다. 다시 집에 돌아와선 할머니 품에 안겨 한글 학습지를 푼 뒤에, 할머니의 투박한 토닥임과 자장가로 낮잠에 들곤 했다.
마침 결혼을 하지 않고 외조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막내이모도 있었다. 여행에 다녀오면 꼭 내 선물을 사오고 그 선물을 소개하면서 나보다 더 신나하던 모습, 취미로 사진을 배우러 다닌다며 어딜 가든 나를 피사체로 사진을 찍어주던 모습 같은 것들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것이 사랑이 아닐 리가 없었다.
엄마가 삶에 지치고, 생활에 바쁜 나머지 내게 조금은 덜 온전한 사랑을 주었다지만, 외조부모와 막내이모는 그 부족함을 충분히 채워줄 수 있는 사랑을 주었다. 나는 여태 그들이 내게 준 추가적인 사랑은 외면한채 엄마로부터의 사랑에만 천착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자 흑색으로 기억해온 내 유년시절이 그제야 유색으로 채색되는 느낌이었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긍지, 그것이 내게도 생겼다. 나도 썩 나쁘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앞서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들’ 회차에 등장하는 지혜가 나만큼 불행해서 좋았다고 썼다. 우리가 친구로 지내온 기간 동안 나는 엄마와 갈등의 골이 깊어져만 가는데 지혜는 엄마와 화해의 길로 들어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면 차라리 처음부터 혼자라고 믿었던 때보다도 더욱 외로워졌다. 나만 여기 어두운 곳에 혼자 두고 지혜는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빅 리틀 라이프>에서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들’ 회차를 기획한 이유는 그 어두운 곳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꼭 엄마를 용서하거나 화해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된 유년시절의 기억을 가지고도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중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는 운 좋게도 <빅 리틀 라이프>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유년시절의 결핍을 가지고도 현재를 빛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그들을 보면서 용기가 조금씩 차올랐다. 그들이 멈추지 않고 버티면서 살아간다면 어쩌면 나도 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게 되었다.
영화 <우리가 사랑이라 믿는 것>의 한 장면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들을 모아 시선집을 내려고 하는 ‘그레이스’에게 아들 ‘제이미’가 이렇게 묻는다.
- 제목은 뭐로 붙일 거예요?
- “여기 와본 적이 있다”라고 할까 해. 나보다 먼저 이런 감정을 겪은 이들이 있다는 의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게 위안이 되거든.
- 그들이 살아남아서요?
- 누군가는 그렇고 누군가는 아니지.
그러니까 이 글은 <빅 리틀 라이프>에 선뜻 자신들의 유년시절의 결핍을 털어놓아준 사람들에게 보내는 감사인사이기도 하다.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위안을 받고 용기를 내게 되었다고. 나도 당신처럼 또 누군가의 위안이 되기 위해 반드시 잘 살아낼 거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