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말자는 다짐
내가 곧잘 따르던 한 선배는 내게 종종 이런 말을 했다.
“훌륭한PD인 동시에 좋은 사람일 수는 없어. 좋은 사람이 되는 걸 포기해야 좋은 PD가 되는 거야.”
실제로 많은 방송계 종사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팀일록 보수적이고 군주적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단다. 모PD는 인성은 개차반이지만 프로그램 하나는 기깔나게 잘 만들고, 또 모PD는 참 좋은 사람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가 만든 프로그램은 영 지루하다고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끝없이 무력해지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쉬이 무력해지기 전에 ‘훌륭한/좋은 사람이 뭔지, 훌륭한/좋은 PD가 뭔지’에 관한 질문이 선행됐어야 한다. 하지만 하루빨리 PD로서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던 저연차 시기엔 그 둘 중 하나를 빨리 선택해야만 한다는 초조함이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마음을 빨리 정하지 않으면 훌륭한 PD고 좋은 사람이고 자시고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무능한 PD이자 그저 그런 사람으로 평생 살게 될 것 같았다.
영화 공부를 하고 있는 한 친구가 비슷한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녀는 영화 연출부에 속해있었는데, 좋은 연출가의 기준을 어떻게 삼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했다. 이를테면 촬영 현장에서 현실감 넘치는 연기를 연출하기 위해 실제로 폭행하도록 지시하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배우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생동감은 다소 떨어지더라도 안전하게 촬영하는 것이 옳은지 같은 문제였다.
고민의 계기는 이랬다. 관객이 숨 막혔다 표현할 정도의 실감나는 연출로 정평이 나있는 선배 연출가 밑에서 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실제 촬영 현장에서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물리적으로 고통 받고 심리적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정말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나는 울적해하는 그녀에게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으로 연출하면 안 되지!’라고 곧장 반응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왜냐하면 나도 초보 연출자로서 ‘완성도 있는 연출’과 ‘인간적인 너그러움’ 사이에서의 선택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방송은 1인 콘텐츠가 아니기에 스태프들과 함께 제작하다보면 PD가 연출에 욕심을 내는 경우 팀원 누군가에게는 너그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게 된다. 끝나지 않는 회의를 한다거나, 자꾸만 연락을 한다거나, 과도한 업무 로드를 주게 된다거나, 더 참신한 창작을 계속 요구하는 행동들 말이다. 조금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내가 하고 싶은 연출에서 어느 부분은 포기해야만 했다. 잔혹한 사실이지만 양쪽 중 무엇을 택할지는 철저히 PD의 의지에 달려있었다.
PD로서 답답한 지점은 바로 이것이다. 대중들에게 화제가 된 프로그램은 대체로 자극적이고, 악마의 편집은 욕을 먹을지언정 뜨거운 주목을 받게 된다. 평화롭고 올바른 프로그램은 평단의 호평은 받을지 몰라도 많은 대중들에게 기억되긴 어렵다. 하지만 우리는 대중매체의 종사자다. 많은 대중을 포기하면서 대중매체의 PD라고 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래서 자꾸 그 말이 머리에 맴돈다. “훌륭한 PD이면서 훌륭한 사람일 수는 없어.” 이 말은 진실인가?
중학생 때로 시간을 돌려본다. 당시 나는 한 독립영화계의 신성이라 불리던 배우를 매우 좋아했는데, 어떻게든 그가 출연한 독립 영화를 구해보려고 애썼다. 그 중에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영화가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많은 장면들이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오직 엔딩 장면만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초등학생이나 되었을 법한 소년이 이미 성인이 되어버린 주인공에게 평소 자주 듣던 질문을 반대로 묻는 장면이다.
“훌륭한 소년이 될 거예요?”
아마 모두에게 기시감이 드는 질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 가족친지들이 이런 종류의 질문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렇다. 꼬마들에게 ‘우리 ○○이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라는 질문을 곧잘 하고, 꼬마들의 투정을 달래기 위해 ‘우리 ○○이 착하지?’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마치 그들이 착하거나 훌륭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듯이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주문이다. 응당 착한 아이나 훌륭한 소년이 되는 게 옳으니 그렇게 되라는 주문 말이다. 특이한 건, 꼬마들이 저 말에 딱히 저항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저 말에 정색하고 “싫은데요”라고 대답하는 꼬마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경쾌하게 “네!” 대답하며 화사하게 웃을 따름이다.
“훌륭한 PD인 동시에 좋은 사람일 수는 없어. 좋은 사람이 되는 걸 포기해야 좋은 PD가 되는 거야.”
내게 이 말은 거역할 수도 없고 응당 그래야만 한다고 믿어야 하는 마치 유언 같았다. 자극적인 웃음 포인트를 살리기 위해, 팀원들을 몰아붙이기 위해, 대중에게 화제가 되기 위해 등등… 각종 이유로 사람으로서의 올바름이나 너그러움을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에 처할 때 자꾸 저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자꾸만 저 말 뒤에 숨고 싶어지곤 했다. ‘사람들이 그랬단 말이야, 선배들이 그랬단 말이야’ 라고 되뇌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나는 더 이상 꼬마가 아니다. 어른들의 말에 저항 없이 곧장 ‘네!’라고 대답하지 않을 수 있다. 저 말도 ‘훌륭한 소년이 될 거냐’는 말처럼, 사실은 발화자의 주문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투명 장막 같은 것일지 모른다. 내가 그 말 뒤에 숨고 짚어진다는 건 그 말이 옳아서가 아니라 편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해버리면 모든 것이 쉬워지기 때문이다. 나의 과오를 굳기 반성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내가 포기해버린 가치들이 떠올라 괴로운 밤을 보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일종의 헤게모니와 작동원리가 같다. 내가 동의하고 믿어버리는 순간 저 말은 점점 진실로 굳어질 거다.
그렇게 인지하자 사회학과생 특유의 반골기질이 흑염룡처럼 서서히 깨어났다. 내가 스스로 그 반증이 되어보고 싶단 욕심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훌륭한 PD이자 좋은 사람까진 몰라도 괜찮은 PD이자 사람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뜻조차 모호한 ‘훌륭한’이라는 단어에 집중하기보다, 어떤 가치를 준거로 삼아 어떻게 살아갈 건지 수차례 고민하고 다짐하기로 했다. 대신 입은 좀 다물고 말이다. ‘좋은’ ‘훌륭한’ 이란 단어같은 건 입으로 뱉고나면 문장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대부분 위선적이거나 위악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 쓴 건 대충 못 본 셈 쳐주시길….)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이야기하며 남들에게 상처를 주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하찮아보이는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한때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쉽게 입을 놀리는 사람들 모두를 불신하기도 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보다 차라리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목표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낫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심지어는 훌륭한 PD는 좋은 PD가 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엾게 느껴졌다. 좋은 사람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할 현실의 벽에 부딪힌 자조적 스토리를 나 혼자 상상 했다.그러니 아마 저 문장은 위악일 거라고, 짐짓 겉으로는 못된 척하지만 실제론 누구보다 순수하고 고결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확대해석했다. 하지만 거짓이다. 내가 숱한 순간에 그러했듯, 저 문장은 서툰 위악을 부리는 용도로 사용될 때보다 자기합리화나 변명으로 쓰일 때가 더 많았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쓴다. 훌륭하거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목표는 없느니보단 있는 게 낫다고. 다만 입으로만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사람들은 조심하자고 말이다. 입만 산 사람들을 조심하자기보다는 내가 입만 산 사람이 되지 않기로 조심하자는 다짐이다.
요즘은 일부러라도 후배나 같은 팀 스태프들에겐 ‘훌륭한PD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은 물론이고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말조차도 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우리는 포기하지 말아야 하고, 아직 그렇게 포기하기는 너무 이르기 때문이다. 뜻을 같이하는 몇몇 방송국 사람들과 서로 이런 다짐을 재차 확인하고 함께 이야기한다.
물론 우리가 더 나이 들어 마흔이 되고, 쉰이 되다보면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이런 다짐을 공유했던 동료들이 끝내 실패하는 모습을 목격하며 회의를 느낄지도 모른다. 동료들까지 갈 것도 없이 나부터가 당장 머지않은 미래에 이 결심을 지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내 실패하더라도 좋은 PD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작정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편이 처음부터 포기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