닷페이스 뉴 멤버 영이 기록한 닷페의 기획법
닷페이스 미디어의 내부 스터디 기록을 살짝 공개합니다. 새롭게 합류한 비디오 저널리스트 동료들에게 닷페이스의 기존 기획 접근 방식, 인터뷰, 편집 구성 노하우에 대한 이야기를 공유했어요.
첫 번째 FETS(.Face Energy Trading System)는 '기획' 세션으로 진행됐습니다.
- 뾰족한 영상 콘텐츠 기획하는 법 (by. 선욱 PD)
영상을 제작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자문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처음에는 분명 큰 그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버리기 아까운 소스가 많아서, 구성과 편집에 욕심이 생겨서 우리는 수많은 영상들을 산으로 보내곤 한다.
닷페이스 선욱 PD는 이런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지만, 그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줄이고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분명 있다고 말한다: 바로 뾰족한 기획을 하는 것!
아이템과 기획은 다르다. 아이템은 영상의 재료이고, 기획은 그 재료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 즉 레시피라고 할 수 있다. 재료만 가지고 요리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처럼, 좋은 소재만 가지고는 뾰족한 영상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이템:
백종원과 요리
기획:
➊ 백종원과 세계여행을 하며 다양한 음식들을 맛보기 ➔ <스트리트 푸드파이터>
➋ 백종원과 골목 식당을 찾아가 상인들에게 피드백 주기 ➔ <백종원의 골목식당>
➌ 백종원과 집에서도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레시피 배우기 ➔ <집밥 백 선생>
문제는 아이템이나 기획에 대한 개념을 알고 있다고 해도, 실무는 다르다는 것. 기획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이템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뾰족한 기획은 왜 어려운 걸까? 기획 과정에서 닷페가 겪고 있는 실질적인 어려움들을 하나씩 뜯어보자.
첫 번째, 예측 불가능성
닷페는 기본적으로 논픽션(또는 다큐멘터리) 콘텐츠를 만든다. 대본이나 연출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전 기획을 아무리 철저히 하더라도 현장 취재나 인터뷰에서 얼마든지 이를 뒤엎는 예측 불가능한 말이나 그림이 나올 수 있고, 그것을 PD가 인위적으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 그것이 논픽션의 매력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뾰족한 기획을 하기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한다.
두번째, 시간 제약
다큐멘터리 제작에는 짧으면 몇 개월, 길면 십수 년의 시간이 걸린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아이템을 비교적 오래 충실히 지켜보면서 뾰족한 기획을 잡을 수 있다. 그런데 닷페는 주로 4주~6주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을 제작 기간으로 잡는다. 그러다 보니 아이템을 기획으로 깎아낼 시간이 부족하고, 기존 다큐 제작 방식에 맞춰 유동적으로 기획 방향을 트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렵다.
세 번째, 주제 다양성
닷페는 디지털 성폭력, 퀴어, 노동, 장애, 기후위기 등 여러 변화가 필요한 지점들을 이슈로 다룬다. 한 가지 주제를 깊게 파고드는 기존 다큐와 달리 매번 피디가 다뤄야 할 주제, 카테고리가 바뀐다.
뭉툭한 기획, 망한 기획은 이런 반응을 낳는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첫 번째, 서사가 두루뭉술해질 가능성이 높다.
구성, 편집 단계에서 아무리 뾰족한 각으로 깎아보려고 해도, 기획 단계에서 아이템에 대해 가졌던 질문들이 평이했기 때문에 갖고 있는 촬영본으로는 돌이킬 수가 없다.
두 번째, 콘텐츠 편차가 커진다
출연자와 주제를 많이 타게 된다. 영상의 퀄리티가 그 자체의 서사에 더이상 의존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콘텐츠가 출연자와 주제를 전혀 안 탈 수는 없겠지만, 그 편차를 줄이는 일이 기획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세 번째, 제작 기간이 늘어진다
뭉툭하고 망한 기획을 고쳐보려고 기획 방향을 틀게 되면, 이미 짜 놓은 구성을 통째로 또는 상당 부분 바꿔야 한다. 일정이 한 주, 두 주씩 미뤄지기 시작하면서 마감도 따라서 미뤄지기 시작한다. 제작 기간이 늘어지면 고생하고 번아웃이 오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최초 기획 단계에서 최대한 뾰족하게 아이템을 깎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래 질문들을 따라가면서 아이템을 기획으로 만들어보자.
처음에 내가 그 아이템에 꽂힌 이유를 잊지 말아야 한다. 리서치 과정에서 기사, 논문을 찾아 읽고 전문가 의견을 듣다 보면 자기가 처음에 가졌던 새롭고 독창적인 관점은 사라지고 그들의 의견과 관점이 내 것을 대체한다. 그러면 콘텐츠가 콘텐츠로서 지녀야 할 재미와 가치를 잃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사례> 닷페이스 H.I.M.(Here I am)
H.I.M. 은 닷페가 '처음에 꽂힌 포인트'를 끝까지 잘 끌고 간 성공적인 기획 중 하나. "경찰이 성매수자를 가장해 10대 청소년들을 함정 수사한다고?"라는 포인트로부터 경찰의 수법을 180도 뒤집어버리자는 기획을 이끌어냈다. 실제로 닷페는 랜덤채팅앱에서 10대 청소년을 가장해 성매수자들을 '함정수사'할 수 있었다.
앞으로 다루고자 하는 아이템을 기획으로 풀어냈을 때 가치가 있어야 하고, 그 가치를 반드시 자신만의 언어로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 선욱PD의 체크리스트를 참고하여 아이템의 가치를 평가해보자.
새롭거나 특이한 사실인지?
지금 타이밍이 적절한지?
시의성 없더라도 닷페가 다룰 지점인지?
변화가 꼭 필요한 지점인지?
정말 대단하고 매력적인 사람의 이야기인지?
오랫동안 고질적인 문제였는데 마침 지금 변화가 일어나는 중인지?
한 문장 안에 기획 포인트가 명확하게 담겨야 한다. 영상을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좋지만, 영상을 제작하는 사람에게도 어떤 종류의 일을 어떤 사이즈로 하면 되겠다는 감을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사례> 소울푸드 시리즈
소울푸드 시리즈는 음식을 사람이나 동물과의 관계로 풀어내는 얘기를 하면 재밌겠다고 생각해서 나온 아이템이었다.
처음에 '고양이 츄르 공장이 고양이들에게 어떤 건강상의 도움을 주고자 하는지 다뤄보자'(...)는 식의 기획을 가져갔는데,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도 않고 너무 어렵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이후 피드백을 반영해 말하고자 하는 범주를 간추리고, "한국에 있는 이민자들(또는 인종적 소수자들)과 그들과 관련된 음식 얘기만 하자"고 기획을 명확히 하고 나니 제작 패턴도 분명해졌다. 예를 들면, 짜장면을 화교에 대한 차별과 엮어내기로 하니, 앞부분에서는 영상과 소리로 음식 프로그램들이 주는 자극과 쾌감을 주고, 뒷부분에서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하는 식으로 콘텐츠의 방향과 포맷이 얼라인 되었다. 이것이 소울푸드 시리즈만의 고유한 영상 언어로 자리매김한 것도 뾰족한 기획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질문들에 해당되지 않더라도, 아이템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힘, 즉 사람들을 압도하고 후킹 하는 에너지가 있다면 아이템 그 자체로 이미 뾰족한 영상이 될 수 있다.
사례> 성소수자부모모임 프리허그
2016년, 서울 퀴퍼에 주최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프리허그 이벤트가 있다는 소식만 듣고 부스로 갔는데, 그때 성소수자 부모모임 '엄마는 널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한단다' 영상이 탄생했다. 어머님들이 모두를 환대하며 안아주는 장면 자체가 지닌 강력한 힘이 이 영상을 완성시켰다.
가이드를 활용할 순 있지만, 결국 중요한 건 "나만의 기획법 찾기"라고 선욱 PD는 말한다. 가이드라인이라는 툴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기획은 결국 '훈련'이다.
직접 경험을 통해 내가 잘하는 방식을 찾고 그것이 숙련되면 그것 자체가 바로 가장 좋은 기획 가이드라인이 된다. 지금까지 닷페는 나만의 경로를 찾아왔다. 나는 어떻게 풀어야 잘 푸는지, 잘 통하는지. 내가 잘 뚫을 수 있는 길을 만드는 것이다. 아래는 PD들 각자만의 '경로', 즉 스타일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다.
은선 PD: 본인이 팬이 된 사람의 대단함을 다채로운 뽕으로 이야기하는 방식 예) 장혜영 의원 *"차분하지만 급진적인"*
모모 PD: 같은 말도 발화자에게 가장 매력적으로(간지 나는 톤으로) 뽑아내 전달하는 방식
소현 PD: 뚜렷한 영상적 서사(또는 행위)를 딥한 말들과 엮어내 전달하는 방식
선욱 PD: 역사적 맥락을 빠른 호흡으로 풀어내는 방식
문제는 '나만의 경로는 나만의 경로일 뿐'이라는 것. 노하우가 개인의 역량으로만 쌓이고 팀의 역량으로는 쌓이지 않고, 결국 다른 사람이 비슷한 콘텐츠를 만들면 편차가 너무 커진다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렇게 되면 팀 차원에서는 이 패턴을 반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떨어지게 된다. 아이템에 따라 포맷이 전부 다르면, 제작 과정에서의 효율성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영상을 보는 사람도 각각의 영상에 무엇을 기대해야 하는지가 막연해진다.
그래서 닷페는 작년 하반기부터 나만의 경로를 팀의 경로로 바꾸기 위해 콘텐츠를 반복 가능한 포맷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언커버드, 할 말 많은, 플러스 마이너스 등의 시리즈물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
사례> 할 말 많은 인터뷰
2018년 할 말 많은 간호사를 시작으로, 승무원, 라이더, 보조연기자, 보육교사, 소방관 등 다양한 '할 말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기획의 포인트는 '당사자성'이 있는 '4명'의 인터뷰이 + 그 사람들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장소'를 화면에 담는 것. 이것이 하나의 포맷으로 자리 잡아 시리즈물로서 성공을 거뒀다.
콘닷의 올해 목표는 "반복 가능한 좋은 시리즈를 3개 이상 만들어서 반복하기"! 닷페가 팀으로서 반복할 수 있는 템플릿을 일종의 무기로 갖춰놓고, 각각의 성격에 맞는 아이템들에 넣어서 그때 그때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닷페이스는 올해 상반기에 어떤 아이템들을 기획으로 발전시키게 될까? 지금까지는 밀레니얼(1.0), 소수자(2.0) 이슈에 집중해왔지만, 지난해부터는 '변화가 필요한 지점'을 찾아내어 말하고 있다. 성폭력 그 이후, 쓰레기의 이동, 정상가족 뽀개기, 차별금지법, 한국인 되기, 장애, 사회 접근성 등.
이 아이템들 중에는 이미 기획 단계를 거쳐 영상으로 완성된 것들도 있고, 진행 중인 것들도 있고, 아직 전혀 손을 대지 않은 것들도 있다.
올해 상반기 동안 이 아이템들이 어떤 모습으로 '뾰족해질지' 기대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상들은 분명 그들 스스로 말할 것이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라는 질문에,
"우리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라고.
펫츠 진행한 사람: 선욱
기록한 사람: 영
편집 검수: 썸머
영
닷페이스 비디오 저널리스트
뾰족해지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