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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 바다 위에서
검은 바다가 77미터 아래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여수 케이블카 곤돌라 안, 박말순의 손톱이 투명한 바닥을 긁어댔다. "아, 어지러워..." 며느리 정유나가 다가와 팔을 붙잡았다. "어머니, 바다 보세요. 얼마나 예뻐요." 그 순간, 뒤에서 아들 윤상호의 손이 곤돌라 문걸쇠를 살짝 건드렸다. '딸깍.' 미묘한 금속음이 바람 소리에 섞였다. "아빠, 뭐 해?" 손자 지후가 폰 카메라를 들이댔다. 유나의 허리 파우치가 바닥에 떨어지며 지퍼가 터졌다. 위임장 원본, 상해보험 증권 여러 장이 흩어졌다. 말순의 눈이 커졌다. "이게 뭐야?" 바로 그때, 곤돌라가 크게 흔들렸다. 유나가 말순의 등을 힘껏 밀었다. "어머니!" 비명과 함께 문이 열렸다. 77세 할머니가 하늘 위에 매달렸다.
# 2장 — 평범했던 사람들
군산 중앙시장 골목 끝, 말순의 '옛날잔치국수' 앞엔 새벽 6시부터 줄이 섰다. 칠순 넘은 몸집에도 국자를 휘두르는 손목은 여전히 탄탄했다. 굵은 뿔테안경 너머 매서운 눈빛으로 육수를 맛보는 모습은 마치 화학자 같았다. "면발이 살짝 덜 익었네." 배달기사들이 "사장님, 오늘도 맛있어요"라고 인사하면 까칠하게 "당연하지"라고 받아쳤다. 남편 잃고 혼자 아들 키워낸 억척스러움이 주름 깊은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아들 상호는 키 180에 넓은 어깨, 한때 잘나가던 중고차 딜러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골드 체인목걸이에 명품 시계를 차고 다니며 "아버지, 요즘 전기차가 대세예요"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모습은 성공한 사업가 그 자체였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하고, 고객들과의 만남에서는 항상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가끔 혼자 있을 때 보이는 깊게 파인 눈가 주름이 그가 품고 있는 무언가를 암시했다.
며느리 유나는 165센티미터의 늘씬한 키에 단정한 보브 머리, 항상 깔끔한 정장 차림으로 피부관리숍을 오갔다. 밝은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로 시어머니를 모시는 모습은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어머니, 오늘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매일 아침 안부를 묻고, 병원 갈 때마다 정성스럽게 챙겼다. 하지만 때때로 휴대폰을 보며 굳어지는 표정과 밤늦게 누군가와 나누는 짧은 통화가 그녀만의 비밀을 품고 있었다.
17세 지후는 아버지를 닮은 큰 키에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훤칠한 청소년이었다. 학교 영상동아리 에이스로 드론 촬영과 편집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할머니, 이거 봐요. 제가 찍은 영상이에요." 노인의 눈높이에 맞춰 차근차근 설명하는 모습은 어른스러웠다. 하지만 가족들의 미묘한 긴장감을 민감하게 포착하는 예리함도 갖고 있었다. 특히 부모님이 속삭이는 대화를 우연히 들었을 때 보이는 불안한 눈빛이 그의 내면을 드러냈다.
겉으로 보기엔 화목한 4대 가족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집안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 3장 — 달콤한 함정
"어머니, 봄바람 좀 쐬실래요?" 상호가 밝은 목소리로 제안한 건 어느 화요일 저녁이었다. 저녁 식사 후 거실에서 '미스터트롯' 재방송을 보고 있던 말순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제주도는 비행기 타셔야 하니까 부담스러우시고... 여수 케이블카 어떠세요? 바다도 보시고." 유나가 즉시 거들었다. "맞아요, 어머니.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완전 핫플이에요."
지후는 아버지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 할머니와 시간 보내는 걸 귀찮아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더 이상한 건 어머니였다. 유나는 핸드폰 메모장에 뭔가를 부지런히 적어내려가고 있었다. "스카이정류장 13시 10분 도착, 케이블카 탑승 20분..." 세밀한 시간표를 작성하는 모습이 마치 군사작전 같았다.
"어머니, 지팡이 안 가져가셔도 될 것 같아요. 곤돌라 안에서는 불편하시잖아요." 유나의 제안에 말순은 잠시 망설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니에요, 제가 꼼꼼히 살필게요." 유나는 지팡이를 현관 구석에 세워두며 상호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순간 지후는 두 사람의 표정에서 뭔가 계산적인 것을 포착했다.
여행 전날 밤, 지후는 우연히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었다. "정말 괜찮을까?" 상호의 떨리는 목소리. "지금 아니면 언제 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유나의 차갑고 단호한 대답. "그래도 우리가..." "당신이 코인으로 날린 돈 생각해봐. 이제 이 방법밖에 없다고." 지후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자 유나는 더욱 이상했다. 평소보다 화장을 진하게 했고, 가방을 두 개나 챙겼다. 하나는 평범한 핸드백, 다른 하나는 방수 처리된 허리 파우치였다. "오늘 바다 근처니까 습할 수 있어서요." 그럴듯한 설명이었지만, 지후는 그 파우치를 너무 꽁꽁 감싸는 어머니의 손길이 부자연스러웠다.
출발하면서 말순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오랜만에 가족여행이네. 고맙다." 그 순간 상호와 유나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죄책감? 아니면 조급함? 지후는 액션캠을 목에 걸며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 4장 — 빚의 늪
새벽 3시, 상호는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또 다시 빨간 숫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트코인 선물거래 계좌 잔고: -4억 8000만원. 손가락 끝이 차갑게 식었다. "이런 젠장..." 중고차 매장 보증금, 어머니 가게 운영자금까지 모두 코인에 쏟아부었다. 한 방에 회복하겠다는 욕심이 파멸로 이어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전기차 리스 사업 실패로 발생한 연대보증 책임. 채권자들의 독촉 전화가 하루 종일 울려댔다. "윤상호 씨, 이번 주까지 2억 마련 안 되면 법적 절차 들어갑니다." 냉랭한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상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머니의 분식집마저 담보로 잡힌 상황. 이대로 가면 3대째 이어온 가게마저 날아갈 판이었다.
한편 유나의 상황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피부관리숍은 겉모습일 뿐, 실제로는 보이스피싱 조직에 연루된 오빠 때문에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유나야, 3억만 대신 갚아줘. 안 그러면..." 협박 문자가 또 왔다. 오빠는 '전화금융사기 수익 환수작전'에 실패하며 조직에게 거액을 빚지게 됐다. 그 빚이 고스란히 유나에게 떠넘겨진 것이다.
유나는 떨리는 손으로 말순의 인감증명서를 꺼내 봤다. 지난달 "어머니, 민생회복지원금 신청하려면 필요해요"라고 속여서 받아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인감으로 벌써 8건의 보험을 가입했다. 종신보험 5억, 상해보험 10억, 질병보험 3억... 보험료만 월 200만원이 넘었다. 물론 말순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신, 정말 이 방법밖에 없을까?" 상호가 유나에게 속삭였다. "이미 늦었어. 우리 둘 다 망하거나, 아니면..." 유나는 휴대폰으로 케이블카 운행시간표를 다시 확인했다. "사고사로 처리되면 보험금은 72시간 내에 나와. 그러면 우리 빚은 모두 해결돼."
밤 깊도록 두 사람은 계획을 다듬었다. 케이블카 운행 중 갑작스러운 추락사고. CCTV 사각지대를 노린 완벽한 계획. 상호는 메모지에 끄적거렸다. '바람이 강한 날 선택, 곤돌라 문 안전장치 사전 조작, 목격자 최소화...' 두 사람의 눈빛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생존이냐 파멸이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지후는 방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부모님의 대화 중 '보험금'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설마 할머니한테? 하지만 부모님이 그럴 리 없다고,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5장 — 77미터 상공의 절규
케이블카가 중간 지점을 지나며 높이 올라갔다. "와, 정말 높다!" 말순이 창밖을 내려다보며 감탄했다. "지후야, 사진 찍어줘." 환한 미소로 손자에게 포즈를 취하는 77세 할머니는 이 순간이 마지막 행복한 시간이 될 줄 몰랐다.
지후는 할머니를 찍으려 액션캠을 들었다가 순간 멈췄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이 이상했다. 상호는 계속 문 쪽을 훔쳐보고 있었고, 유나는 시계를 자꾸 확인하며 긴장한 얼굴이었다. "왜 저러지?" 지후는 직감적으로 액션캠 녹화 버튼을 눌렀다.
"어머니, 이쪽으로 오세요. 바다가 더 잘 보여요." 유나가 말순을 문 근처로 유도했다. "정말? 어디?" 말순이 순진하게 따라가는 그 순간, 상호가 문 걸쇠를 살짝 만졌다. '딸깍.' 미묘한 소리가 났다.
"아빠?" 지후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아, 아니야. 그냥..." 상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때 유나가 "어머니, 손잡이 잡고 계세요"라며 말순의 손을 문 손잡이에 올려놓았다.
곤돌라가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그 순간을 노린 유나가 말순의 등을 강하게 밀었다. "아악!" 예상치 못한 충격에 말순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동시에 상호가 미리 조작해둔 문이 '쾅' 하고 열렸다.
77미터 상공, 말순의 몸이 문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간신히 문틀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였다. 검푸른 바다가 아래서 입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케이블카 중간 지점. 말순의 손이 문 손잡이에서 미끄러졌다. "아악!" 순간적으로 몸이 기울어지며 반쯤 열린 문 밖으로 상체가 빠져나갔다. 77미터 아래 검푸른 바다가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 지후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상호와 유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말순은 한 손으로 문틀을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77세의 노쇠한 팔힘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상호야! 유나야! 도와줘!"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아들과 며느리는 냉정하게 내려다만 볼 뿐이었다.
"어머니, 그냥 놓으세요." 유나가 차갑게 말했다. "뭐라고?" 말순의 눈이 커졌다. "이제 그만 가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 오래 사셨잖아요." 유나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평온했다. 마치 날씨 얘기를 하듯이.
"유나야, 너 지금 뭔 소리를..." 말순의 손가락이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손톱 밑으로 피가 배어나왔다. "엄마, 제발 그냥 떨어져 죽어." 상호가 입을 열었다. 친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우리 더 이상 어머니 때문에 못 살겠어요."
"상호야, 니가 지금 뭔 소리 하는 거냐!" 말순의 목소리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절절히 배어 있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아버지 없이도 굶지 않게 밤낮으로 일했는데!"
"그래서 더 죽어야 해요." 유나가 핸드백에서 손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어머니가 없어야 우리가 살 수 있어요. 보험금으로." 그 순간 모든 진실이 드러났다. 보험, 위임장, 인감도장...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말순의 몸이 더 아래로 미끄러졌다. 이제 팔꿈치까지만 곤돌라 안쪽에 걸쳐있었다. "니들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77세 노인의 절규가 바다 위로 퍼져나갔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뭘!"
"잘못한 거 없어요." 상호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그냥 돈이 필요할 뿐이에요. 어머니 목숨보다 더." 말순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사랑한 아들이 이런 괴물이었다니.
"지후야! 지후야!" 말순이 손자를 불렀다. 지후는 울음을 터뜨리며 할머니 쪽으로 달려들려 했지만, 상호가 거칠게 막았다. "너도 죽기싫으면 가만히 있어."
"뭐?" 지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바람이 더 거세게 불었다. 말순의 손가락이 점점 풀리고 있었다. "제발... 제발..." 77년을 살아온 한 인간의 마지막 간청이었다. "니들도 부모가 될 거 아니냐... 어떻게 이럴 수가..."
그때 곤돌라가 크게 흔들렸다. 말순의 손이 완전히 미끄러지는 순간—
"할머니!" 지후가 번개같이 달려들어 할머니의 손목을 붙잡았다. 17세 청소년의 근력으로는 버거웠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지후야, 비켜!" 상호가 아들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 순간 케이블카 관제센터에서 비상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후의 액션캠과 드론이 모든 것을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람 소리, 비명 소리, 그리고 인간의 가장 추악한 욕망이 77미터 상공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6장 — 떨어진 건 가면
"비상정지! 비상정지!" 관제실 직원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케이블카가 급정거했다. 곤돌라가 크게 흔들리며 말순은 간신히 안쪽으로 끌려들어왔다. 온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구조대가 달려들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다치신 곳은 없으신지?" 하지만 말순은 아들과 며느리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전 들은 말들이 악몽이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으로.
유나는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서류들을 주웠다. 하지만 한 장이 문틈으로 빠져나가 바람에 날려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사고사 보험금 처리 절차'라고 적힌 메모지였다. 구조대원 중 하나가 그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구조대원이 메모를 읽어보더니 표정이 굳었다. '1. 케이블카 문 안전장치 조작, 2. 추락 유도, 3. 보험금 청구 72시간 내 처리...' 치밀하게 계획된 살인 시나리오였다.
상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건 제가 드라마 대본 연습용으로..." "드라마?" 구조대원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때 지후가 액션캠을 내보였다. "이 안에 다 들어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CCTV 확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상호가 문 걸쇠를 조작하는 장면, 유나가 말순을 문 쪽으로 밀어내는 장면, 그리고 할머니가 대롱대롱 매달렸을 때 냉정하게 내려다보던 장면까지.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아들이... 며느리가..." 말순은 충격으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평생을 함께 산 가족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호였다. 젖먹이 때부터 품에 안고 키운 아들이.
유나의 파우치에서는 더 많은 증거들이 쏟아져나왔다. 말순 명의로 된 각종 보험증권, 위조된 진단서, 그리고 보험금 수령 계획서까지. 총 보험금액은 18억원에 달했다. 77세 노인의 목숨값이 18억원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그런 게 아니에요!" 유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 실수였어요!" 하지만 영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매달렸을 때 '그냥 떨어져 죽어'라고 말한 음성까지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경찰이 현장에 도착했다. 수사관들은 곤돌라 문의 안전장치가 인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정교하게 계획된 살인미수 사건이었다. 상호와 유나는 그 자리에서 긴급체포됐다.
지후는 할머니를 부축하며 말했다. "할머니, 이제 괜찮아요. 제가 증거 다 모았어요." 17세 손자의 기지와 용기가 77세 할머니의 목숨을 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말순의 마음에는 더 깊은 상처가 남았다. 돈보다,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가족이라는 믿음이 산산조각나버린 것이다.
# 7장 — 기록된 진실
여수 경찰서 조사실. 세 대의 모니터에는 같은 장면이 서로 다른 각도로 재생되고 있었다. 케이블카 CCTV, 지후의 액션캠, 그리고 우연히 스카이워크 아래를 비행하던 드론 영상까지. 삼중으로 기록된 완벽한 증거였다.
"이거 봐요." 수사관이 영상을 일시정지했다. 상호의 손가락이 문 걸쇠를 비트는 순간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여기." 유나가 말순의 등을 미는 장면도 여러 각도로 포착됐다.
가장 결정적인 건 음성이었다. "제발 그냥 떨어져 죽어"라고 말하는 상호의 목소리, "너무 오래 사셨잖아요"라는 유나의 차가운 음성. 액션캠의 고성능 마이크가 모든 대화를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나의 가방에서 압수된 서류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말순 명의 보험증권 18건, 총 보상금액 18억원. 그중 15건은 말순이 전혀 모르는 사이에 가입된 것들이었다. 인감도장을 위조해 불법으로 체결한 계약들이었다.
더 큰 충격은 따로 있었다. 지후 명의로도 5억원 상당의 보험이 가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랑 같이 사고 나면 23억이 한 번에." 유나의 메모장에 적힌 차가운 계산서였다. 17세 아들의 목숨도 돈으로 환산한 것이다.
조사 과정에서 상호의 도박 기록도 드러났다. 3개월간 코인 선물거래로 날린 돈이 8억원. 어머니 분식집을 담보로 받은 대출금까지 모조리 투기에 쏟아부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가게 상속받아서 팔 수 있잖아요." 친어머니의 죽음마저 부동산 거래로 생각한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네요." 담당 검사가 파일을 덮으며 말했다. 계획적 살인미수, 사문서 위조, 보험사기 시도... 모든 혐의가 명백했다. 영상과 물적 증거, 그리고 당사자들의 육성까지. 변호사도 포기할 정도의 완벽한 범죄 증거였다.
말순은 조사실 한켠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아들과 며느리가 수갑을 차고 끌려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허탈할 뿐이었다. "18억이면 그렇게 큰 돈이었나..." 평생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을 살아온 노인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액수였다.
지후가 할머니 손을 잡았다. "할머니, 이제 괜찮아요." 하지만 말순은 알고 있었다. 진짜 고통은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8장 — 더 깊은 늪
구치소 면회실. 상호가 수척해진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면회객은 뜻밖에도 말순이었다. "어머니... 왜 오셨어요?" "마지막으로 물어볼 게 있어서."
말순이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아냐?" 안에는 병원 진료기록이 들어있었다. '췌장암 말기, 여명 6개월.' 6개월 전에 발급된 진단서였다.
"어머니가... 아프셨다고요?" 상호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응.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죽어가고 있었어." 말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더 충격적인 건 따로 있었다. "내가 먼저 보험을 들었어. 20억원짜리로." 말순이 서류를 꺼냈다. "병원에서 6개월이라고 했을 때, 너희한테 유산을 남겨주고 싶어서."
"그럼... 그럼 어머니가 먼저?" "응. 내가 죽으면 너희가 받을 돈이 있어야 빚을 갚을 거 아냐." 말순은 아들의 코인 투자 실패와 유나의 오빠 문제를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상호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 왜... 왜 가만히 있으셨어요? 우리가 어머니를 죽이려는 걸 알면서도?" "확인하고 싶었어. 돈 때문에 정말 어머니를 죽일 수 있는지."
가장 참혹한 진실이 드러났다. 말순은 케이블카에 탈 때부터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아들과 며느리의 계획, 보험증서들, 심지어 케이블카를 선택한 이유까지. "진짜 실망스러웠어. 6개월 기다리지도 못하고..."
"어머니..." 상호가 울음을 터뜨렸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미안하다고 달라질 건 없어. 이제 3개월 남았거든." 말순은 최근 검사 결과를 보여줬다. 암이 더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유나도 면회실에서 진실을 털어놓았다. "사실 오빠 빚은 제가 대신 갚아줄 수 있었어요. 피부샵이 생각보다 잘 돼서..." "그럼 왜?" "탐욕이었어요. 더 많이 가지고 싶었던 거죠."
검찰 조사에서 밝혀진 또 다른 사실. 상호와 유나가 가입한 18억원 보험 외에, 말순 본인이 가입한 20억원 보험도 있었다. 총 38억원. 하지만 고의 살인으로는 보험금을 받을 수 없었다.
"결국 우리가 어머니 유산까지 날려버린 거네요." 상호의 절망적인 깨달음이었다. 탐욕이 더 큰 손실을 불러온 것이다.
말순은 마지막 면회에서 말했다. "지후한테는 진실을 말하지 마. 부모가 할머니를 죽이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상처받았어." 죽어가는 할머니의 마지막 배려였다.
"어머니, 정말 죄송해요. 용서해주세요." "용서는 했어. 하지만 이해할 수는 없다." 말순이 일어서며 말했다. "6개월 기다렸으면 38억을 깨끗하게 받을 수 있었는데... 왜 그렇게 급했니?"
면회실 문이 닫히며 상호는 깨달았다. 자신들의 범죄로 인해 어머니의 마지막 선물마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탐욕은 모든 것을 파괴했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탐욕의 대가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 9장 — 법정의 심판
대법원 제3법정. 방청석은 기자들과 시민들로 가득 찼다. '케이블카 살인미수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었다. 피고석에 앉은 상호와 유나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피고인 윤상호, 정유나는 피해자 박말순씨를 고의적으로 살해하려 했습니까?" 판사의 질문에 유나가 절규하듯 외쳤다. "우리만 나쁜 게 아니에요!" "다들 돈 때문에 사는 거잖아요! 왜 우리만!"
상호가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저는... 저는 그냥 실수였어요. 정말로 어머니를 죽이려던 게 아니라..."
"그럼 이 음성은 뭡니까?" 법정에 상호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엄마, 그냥 떨어져 죽어. 우리 더 이상 어머니 때문에 못 살겠어요." 방청석에서 탄식이 새어나왔다.
증언대에 선 77세 노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저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를 용서 못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용서할 수 없어요."
"그들은 저만 죽이려 한 게 아닙니다. 제 손자 지후까지도 죽이려 했습니다...." 말순의 증언에 법정은 숨죽였다. "이 나라에서 나이 든다는 게 이렇게 위험한 일인 줄 몰랐어요."
지후의 증언은 더욱 결정적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저도 보험에 가입시켰어요. 5억원짜리로요." 17세 청소년의 담담한 목소리가 법정에 울렸다. "할머니랑 저랑 같이 죽으면 23억원이라고 계산해뒀더라고요."
변호인은 최후 변론에서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우발적 범행"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반박했다. "18건의 보험 가입, 케이블카 사전 답사, 안전장치 조작 연습... 이 모든 게 우발적입니까?"
재판부는 4시간의 평의 끝에 결론을 내렸다. "피고인들의 범행은 계획적이고 잔혹합니다. 특히 피해자가 친어머니라는 점에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판사의 목소리가 법정에 울려퍼졌다.
"주범 윤상호, 살인미수 및 사문서위조 등으로 징역 18년." "공범 정유나, 살인미수 및 보험사기 시도 등으로 징역 16년." 예상보다 무거운 형량이었다.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왔다.
"돈은 다시 벌 수 있어도, 한 번 죽은 신뢰는 되살릴 수 없습니다." 말순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었다. 그 순간 상호와 유나의 얼굴에 진짜 후회가 스쳐갔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판결 후 기자회견에서 지후가 말했다. "저는 부모님을 원망하지 않아요. 다만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17세 청소년의 성숙함에 모든 이들이 숙연해졌다.
# 10장 — 새로운 시작
2년 후, 군산 중앙시장. 말순의 분식집이 있던 자리에는 작은 교육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말순 할머니 보호센터'라는 간판 아래로 여전히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전혀 다른 목적이었다.
"오늘 수업 참석자가 30명이나 되네요." 지후가 21세가 된 모습으로 출석부를 정리했다. 대학에서 미디어학을 전공한 그는 이제 노인 대상 범죄 예방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남긴 보험금으로 이 공간을 마련했고, 매일 어르신들에게 각종 사기 수법과 예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센터 한쪽 벽면에는 말순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지후가 제작한 케이블카 사건 다큐멘터리가 받은 대상 트로피가 놓여 있었다. '기록은 진실을 말한다'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노인 대상 범죄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린 공로를 인정받았다.
"할머니, 오늘도 많이 배우고 가세요." 지후가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수업을 시작했다. "오늘은 보험 관련 전화 거절법을 배워볼 거예요."
70대, 80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메모하며 들었다. "낯선 사람이 보험 가입을 권유하면 일단 끊으세요. 그리고 가족들한테 먼저 상의하고요."
한 할머니가 손을 들었다. "우리 아들도 보험 하나 들어보라고 하는데..." "그럴 때는 이렇게 하세요." 지후가 실제 상황극을 보여주며 대처법을 가르쳤다. "아들이 직접 와서 설명해달라고 하세요. 전화로는 절대 결정하지 마시고요."
수업이 끝나고 어르신들이 하나둘 돌아간 후, 지후는 혼자 센터를 정리했다. 말순의 영정사진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할머니, 오늘도 30분이나 교육했어요. 할머니가 겪었던 일을 다른 분들은 당하지 않도록 열심히 알려드리고 있어요."
벽에 걸린 또 다른 액자에는 지후의 최근 활동 기사가 담겨 있었다. '젊은 영상 제작자, 노인 범죄 예방에 앞장서다'라는 제목이었다. 할머니의 보험금으로 시작한 이 일이 이제는 지역사회 전체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상호의 편지가 센터로 배달됐다. 감옥에서 보낸 다섯 번째 편지였다. "지후야, 할머니 제사는 잘 지냈니? 출소하면 할머니 무덤에 먼저 가서 사과드리겠다." 하지만 지후는 편지를 읽고 바로 서랍에 넣었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할머니, 아버지가 또 편지 보냈어요." 지후가 영정사진을 보며 혼잣말했다. "하지만 전 할머니 일만 할 거예요. 할머니가 마지막에 하신 말씀 기억해요. '다른 할머니들도 지켜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날 밤, 지후는 새로운 영상을 편집하고 있었다. '할머니를 지키는 10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이었다. 마지막 자막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관심과 소통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의심도 필요합니다. - 말순 할머니를 기리며"
새벽 2시, 지후는 혼자 센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77미터 높이에서 할머니가 떨어진 그날이 벌써 2년 전 일이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그 뜻은 지후를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더 많은 어르신들을 범죄로부터 지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센터 문을 잠그며 지후가 중얼거렸다. "내일도 바쁠 거예요, 할머니." 어르신들 교육하는 일도, 새로운 예방 콘텐츠 만드는 일도. 하지만 그 모든 게 의미 있었다. 할머니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더 밝고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지후의 사명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순 할머니의 유지를 받든 지후는 오늘도 세상을 조금 더 밝게 만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