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북 유튜브 풀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JKcmgfZlZvI
1장 — 깊은밤, 갯벌에 잠기다
오전 2시 17분. 서해 갯벌.
"시동이 꺼지려고 해!" 정서준이 키를 돌렸지만 엔진만 헛돌았다. 검은 SUV 바퀴가 진흙에 완전히 박혀 있었다.
박영숙이 떨리는 손으로 비상등을 눌렀다. "물이… 물이 들어 오고있어!"
차문 아래틈으로 차가운 바닷물이 솟구쳤다. 달빛 아래 검은 바닷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안전벨트 버클에 모래가 끼어 풀리지 않았다.
"문이 안 열려!" 서준이 문손잡이를 당겼지만 수압에 눌려 꿈쩍 않았다.
물은 순식간에 차올랐다.
차창을 조금 내리자 바닷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두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119는?"
"우리 위치를 못찾나봐!"
헤드라이트가 물에 잠기며 깜빡였다. 차체가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안 돼"
그때, 멀리서 드론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정확히 이 위치를, 이미 알고 있었다.
차가 옆으로 기울어지며 두 사람을 바다가 삼키려 했다. 두남녀는 어쩌다 이렇게 된걸일까
2장 — 세 사람의 얽힌 운명
한기석, 51세. 키 175cm, 다부진 체격. 20년간 시내버스 정비반장으로 일해온 그의 손은 기름때로 검었고, 굳은살로 거칠었다. 무뚝뚝한 인상에 말수가 적지만, 망가진 것을 고치는 일에는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새벽 5시면 작업복을 입고, 밤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다. 아내와의 대화는 하루 평균 스무 마디를 넘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취미는 휴대폰으로 날씨예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박영숙, 45세. 키 162cm, 단정한 외모에 항상 피곤해 보이는 눈. 대형마트 계산원으로 15년째 근무 중이다. 야간·주말 근무가 잦아 생체리듬이 엉망이었다. 결혼 전엔 댄스학원 강사였지만, 지금은 그 시절의 활기는 온데간데없다. 최근 들어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졌고, SNS를 뒤적이며 시간을 보낸다.
정서준, 33세. 키 178cm, 잘생긴 얼굴에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 프리랜서 여행 가이드이자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다. 갯벌 체험, 바다 드론 촬영이 전문 분야. 밝고 유쾌한 성격으로 사람들을 금세 매료시킨다. 고급 카페에서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며, 항상 최신 스마트폰과 액세서리로 무장하고 있다. 하지만 통장 잔고는 들쭉날쭉했고, 다음 달 월세가 항상 고민이었다.
결혼 20년 차 부부인 기석과 영숙, 한때는 서로를 향해 웃었지만, 이제는 같은 공간에서도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영숙이 SNS에서 발견한 '바다걷기 동호회' 그 리더가 바로 서준이었다. 드론으로 찍은 푸른 바다 사진들, 자유롭게 웃는 사람들의 모습은 영숙에게 마법 같았다.
첫 모임에서 서준은 영숙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누나, 사진 정말 잘 나오세요." 달콤한 말과 세심한 배려. 20년간 잊고 있던 가슴 뛰는 감정이 되살아났다.
기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집안 곳곳에 쌓이는 모래알갱이들, 바닷바람 냄새가 밴 영숙의 머리카락.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지켜보았다. 매일 밤, 자신도 모르게.
운명의 실들이 서서히 꼬이기 시작했다. 세 사람 모두 자신이 무엇을 향해 걸어가는지 모른 채로.
3장 — 틈은 이렇게 생긴다
"또 야근이야?" 전화기 너머로 기석이 작업복을 벗으며 물었다.
"폐점 정산이 복잡해져서..." 영숙의 대답은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거짓말도 자꾸 하다보니 실력이 점점 느는 것 같았다.
실제로는 서준과 함께 24시간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의 노트북 화면에는 각종 여행 블로그와 광고 제안서들이 켜져 있었다. "누나, 제가 찍은 사진들 보세요. 조회수가 장난 아니에요." 영숙의 미소가 담긴 갯벌 사진. 좋아요와 댓글이 폭주하고 있었다.
"나한테도 이런 삶이 있을 줄 몰랐어." 영숙이 커피잔을 감쌌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을 특별하게 봐주는 기분이었다.
서준은 속으로 계산했다. 팔로워 증가율, 예상 광고수익, 다음 컨텐츠 기획안. 하지만 영숙 앞에서는 순수한 청년의 얼굴만 보였다.
기석은 눈치챘다. 새로 산 립밤, 미묘하게 달라진 화장법, 휴대폰을 뒤집어 놓는 새로운 습관. 그는 말 대신 행동했다. 고장 난 보일러를 고치고, 삐걱거리던 현관문에 기름을 쳤다. 20년간 방치했던 것들을 하나씩 손봤다.
"이거 언제 고쳤어?" 영숙이 새로 바뀐 세탁기를 보며 놀랐다.
"어제." 기석의 대답은 언제나 짧았다.
하지만 고쳐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들 사이의 거리였다.
어느 날 밤, 기석은 영숙의 휴대폰을 보게 됐다. 화면 보호기에 걸린 메시지 미리보기.
"다음엔 물 들어오기 전에 찍어요 누나. 하트
발신인에는 “귀요미 서준”이라는 이름이 찍혀 있었다.
기석의 손이 떨렸다. 20년간 함께 살아온 사람이 이렇게 쉽게 멀어질 수 있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서랍을 뒤져 오래된 휴대폰 낡은 충전기를 꺼내 꽂았다. 위치공유 앱이 깜박이며 켜졌다.
"형, 이번 건 대박 날 것 같아." 서준이 카페 단골 테이블에서 친한 형에게 전화했다.
"뭔데?"
"중년 여성 타겟 컨텐츠. 반응이 미쳤어. 스폰서들이 줄 서고 있다고."
영숙은 그가 단순히 여행 가이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진짜 정체는 달랐다. SNS 마케팅 전문가, 인플루언서 매니지먼트, 그리고... 더 어두운 무언가.
"누나한테는 비밀이야. 순수하게 생각하고 있거든."
전화를 끊은 서준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사랑? 그런 것은 없었다. 처음부터.
세 사람의 운명이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무도 진실을 모른 채로.
4장 — 유혹의 바다
"누나, 특별한 촬영 어떠세요?" 서준이 갯벌 카페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영숙의 심장이 뛰었다. "특별한 촬영이라니?"
"야간 갯벌 커플 컨셉. 달빛 아래서... 로맨틱하게." 그의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눈빛 깊숙한 곳에 계산적인 빛이 스쳤다. "요즘 이런 감성 컨텐츠가 대세거든요. 누나 같은 분이 나오면 반향이 엄청날 거예요."
영숙은 망설였다. 선을 넘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20년간 숨죽여 살아온 자신에게 이런 특별한 순간이 다시 올까?
"위험하지 않을까?"
"제가 다 준비해 놨어요. 비상장비, 안전장치 완벽해요." 서준이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중요한 것 하나를 확인하지 않았다. 조수간만표의 빨간 경고선을.
그날 밤, 기석은 정비소에서 홀로 남았다. 동료들이 모두 퇴근한 후, 그는 특별한 상자를 꺼냈다. 20년간 숨겨온 것들. 군 복무 시절 특수부대 인증서, 수상구조 자격증, 그리고... 소형 드론.
"이제 써야 할 때가 왔나."
휴대폰 위치공유 앱에 영숙의 위치가 점점 바다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기석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러 가는지, 누구와 함께인지.
드론 배터리를 충전하며, 기석은 20년 전을 떠올렸다. 서해안 어느 밤, 침몰하는 어선에서 세 명을 구해낸 그 날. 하지만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가라앉는 배에 갖힌 사람들의 비명과 절규가 여전히 기석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 이후로 그는 다시는 바다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오후 11시. 서준의 차가 갯벌 진입로에 도착했다. 달은 밝았고, 바람은 잦았다. 물이 빠진 갯벌이 거대한 무대처럼 펼쳐져 있었다.
"와... 정말 아름답다." 영숙이 차창을 내리며 감탄했다.
서준은 트렁크에서 촬영 장비들을 꺼냈다. 드론, 조명, 삼각대. 그리고 비상용이라며 보여준 망치와 로프. "혹시 모르니까요." 그는 웃었다.
하지만 그가 놓친 게 있었다. 조수표 어플의 빨간 경고 알림. '위험: 대조기, 만조 시간 단축 예상.'
두 사람은 차를 갯벌 끝자락에 세우고 내렸다. 발밑 갯벌이 부드럽게 발을 감쌌다.
그때, 멀리 언덕 위에서 한 남자가 망원경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석이었다. 그의 옆에는 조종 준비가 완료된 드론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작되는군." 기석이 중얼거렸다.
바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아무도 모른 채로, 생과 사의 경계에서.
5장 — 물의 복수
서준은 연신 영숙의 사진을 찍어댔다. 달빛 아래 영숙의 표정이 빛났다.
이순간 만큼은 현실을 잊고 아름다운 동화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서준의 부드러운 눈빛 따뜻한 미소, 모든 것이 영숙을 황홀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멈추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사진찍기에 몰두하다보니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급히 차로 돌아 왔지만 타이어가 갯벌의 진흙에 완전히 잠겨있었다.
차를 바다쪽으로 너무 바짝 대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급히 차에 탄 두사람은 급히 시동을 걸었다. 다행히 시동은 걸렸다.
"차가 안 움직여!" 서준이 액셀을 밟았지만 바퀴만 공회전했다.
"괜찮아, 금방 빠져나갈 거야." 영숙이 안정적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그런데 문제는 진흙이 아니었다. 물이었다.
달빛 아래, 검은 물줄기가 갯벌 사이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발목을 적시는 정도였다. 하지만 5분 후, 무릎까지 차올랐다.
"이상해... 물이 너무 빨리 차오르는데?" 영숙의 목소리에 불안이 섞였다.
서준이 급히 조수표 앱을 확인했다. 그제야 보인 빨간 경고문. '대조기 주의보: 만조 시간 2시간 단축 예상.'
"젠장..." 서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물은 용서하지 않았다. 차문 아래틈으로 바닷물이 빠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차가운 염수와 함께 비릿한 바다 냄새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문이 열리지 않아!" 영숙이 문손잡이를 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외부 수압이 문을 완전히 봉쇄해버린 것이다.
서준이 비상망치를 꺼내 차창을 쳤다. 하지만 강화유리는 쉽게 깨지지 않았다. "젠장, 이게 왜 안 깨져!"
안전벨트 버클에는 모래가 끼어 풀리지 않았다. 영숙의 손가락이 파랗게 질렸다. 찬 바닷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119에 신고했어?" 영숙의 목소리가 떨렸다.
"했는데... 위치를 모르겠대. 여기가 정확히 어딘지..." 서준도 당황했다. 갯벌에는 표지물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이 똑같아 보였다.
그때였다. 차창 위로 작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드론이었다.
"저게 뭐야?" 영숙이 고개를 들었다.
드론은 마치 그들을 찾고 있는 것처럼 차 주위를 맴돌았다. 그리고 밝은 LED 조명으로 그들의 정확한 위치를 비췄다.
"누가... 누가 조종하는 거야?" 서준이 중얼거렸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물은 이미 가슴까지 차올랐고, 차체가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론이 다시 한 번 그들 위를 맴돌더니, 마치 "이쪽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정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있어." 영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차가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바다가 그들을 완전히 삼키려 하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 누군가는 제때 도착할 수 있을까?
6장 — 구출, 그리고 대가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어둠 속 갯벌에서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 해변 끝자락에서 손전등 불빛이 깜박였다. "여기! 여기 있어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람을 가르며 들려왔다.
해경 구조대가 그 불빛을 따라 보트를 몰았다. 차체는 이미 80% 이상 잠긴 상태였다. 턱끝까지 차오른 바닷물을 피해 서준과 영숙은 고개를 처들고 겨우 숨만 쉬며 비명과 절규를 쏟아내는 중이었다. 5분만 늦었다면...
"유압장비 준비!" 구조대장이 외쳤다.
파랑에 크게 흔들리는 차 안에서 서준이 창문 틈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조개껍데기가 손목을 깊게 그었다. 피가 바닷물과 섞여 흘러나왔다.
영숙은 이미 저체온증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입술이 파래지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차창이 깨지며 구조대가 들어왔다. 로프에 몸을 맡긴 채 두 사람이 차례로 끌려나왔다.
들것에 누운 영숙이 희미한 의식 속에서 본 것은 방수자켓을 입고 모자를 깊이 눌러쓴 한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그 실루엣이 묘하게 익숙했다.
"신고자 맞으시죠?" 구조대장이 그 남자에게 물었다.
"예."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까지 익숙했다.
"위치공유 기록과 드론 영상 덕분에 바로 찾을 수 있었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 남자는 대답 대신 구급차 쪽으로 고개만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졌다.
구급차 안에서 영숙의 의식이 돌아왔다. "방금... 방금 그 사람..."
"누구요?" 구급대원이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영숙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설마... 설마 그가?
서준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론을 조종한 사람이 누구인지, 어떻게 정확한 위치를 알았는지. 그리고 왜 자신들을 구해줬는지.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은 후, 영숙과 서준은 각각 다른 병실에 입원했다. 영숙은 다발성 골절과 저체온증, 서준은 신경손상과 깊은 열상으로 수술이 필요했다.
다음 날 아침, 영숙의 병실에 첫 방문객이 왔다.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은채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여보..." 영숙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석은 20년간 함께 살아온 아내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봤다. 이마에 난 상처, 핏기 없는 입술, 그리고... 죄책감에 젖은 눈동자.
"미안해." 영숙이 간신히 말했다.
기석이 짧게 답했다. "살아서 다행이다."
그 한 마디 속에 담긴 20년의 무게를 영숙은 느꼈다. 그리고 알았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누구인지.
7장 — 진실들
영숙의 병실에 기석이 앉아 있던 그 시각, 복도 끝 서준의 병실에서는 또다른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었다.
"서준오빠!" 문이 열리며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들어왔다. 지유, 29세. 긴 생머리에 명품 가방을 든 그녀는 서준의 진짜 연인이었다.
"지유야..." 서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지유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괜찮은거야 오빠? 그러게 내가 너무 위험한 촬영은 하지 말랬잖아! 조금만 늦었어도 다신 나 못 볼뻔했잖아”
투정인지 원망인지 모를 지유의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미안해 지유야. 걱정 많이 했지? 오빠 괜찮아. 조금만 더 치료하면돼~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우리 공주님.”
“약속해. 다시는 위험한 촬영 하지 않겠다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나는 오빠 없으면 못산단 말이야.”
“그래 지유야. 약속할게.” 서준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지유를 품속 가득 안았다.
30분 후 잠든 서준을 확인한 후 차가운 표정의 지유가 조용히 병실밖으로 나왔다.
복도에서 지유와 영숙이 마주쳤다. 영숙은 링거 스탠드를 끌고 화장실에 가던 중이었다.
"혹시... 서준씨 아시죠?" 지유가 먼저 말을 걸었다.
"네... 그런데 당신은?"
"그 사람 약혼자예요. 3년째 사귀고 있고, 다음 달에 혼인신고 할 예정이었죠."
영숙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아, 모르셨구나." 지유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 사람이 당신한테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거짓말이에요. 당신은 그냥... 그 사람한테 돈벌이 수단이었어요."
영숙이 벽에 기댔다. 다리에서 힘이 빠졌다.
"우리 둘 다 속은 거네요." 지유가 쓸쓸하게 말했다.
두 여자는 서로를 바라봤다. 같은 남자에게 속은 두 명의 피해자로서.
8장 — 의문의 배달
사고 발생 3일 후, 병원 보안팀에 의문의 택배가 도착했다. 수취인은 '박영숙'. 발신인은 '익명'
상자 안에는 USB 하나와 쪽지가 들어있었다.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양심 있는 누군가로부터"
영숙은 떨리는 손으로 USB를 노트북에 꽂았다. 파일이 하나 있었다. '서준_진실_20240315.mp4'
영상이 재생되었다. 서준이 카페에서 친구와 만나는 모습이었다. 화질은 선명했고, 음성도 또렷했다. 누군가 은밀하게 녹화한 것 같았다.
"형, 이번 프로젝트 진짜 대박이야."
"무슨 프로젝트?"
"중년 여성 타겟 감성 마케팅. 실제 인물로 스토리텔링하는 거지."
친구가 흥미롭게 물었다. "실제 인물?"
"박영숙이라고, 45세 기혼 여성. 완전 심심한 인생 살고 있던 여자야." 서준이 웃었다. 그 웃음이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그래서?"
"내가 접근해서 감정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었어. 이제 뭘 시켜도 할 상태야."
"위험하지 않아? 불륜이잖아."
"불륜?" 서준이 키득거렸다. "난 처음부터 사랑 따위 없었어. 그냥 비즈니스야, 비즈니스."
영상은 계속되었다.
"그 여자 남편은 어떻고?"
"한기석? 완전 둔한 아저씨야. 아무것도 모를 걸." 서준이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솔직히 불쌍하기도 하지만... 뭐, 내 일 아니잖아."
영숙의 손이 떨렸다. 노트북 화면이 흐릿해졌다. 눈물 때문이었다.
영상 속 서준이 계속 말했다. "어차피 그 아줌마, 진짜 사랑인 줄 알고 있어. 귀여워 죽겠다니까."
친구가 물었다. "계획이 뭔데?"
"일단 컨텐츠로 돈 벌고, 그 다음엔 자연스럽게 정리하는 거지. 뭐" 서준의 목소리에 소름 끼치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영숙이 USB를 뽑았다. 온몸이 떨렸다. 정말로 자신은 서준의 가스라이팅에 속은 바보같은 아줌마 였을까?
9장 — 복수의 씨앗
그 시각, 지유는 서준의 병실에서 나와 복도 벤치에 앉아 있었다.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네, 영상 잘 받으셨죠?" 지유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전화 너머에서 기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습니다."
"저도 속은 피해자예요. 서로 도와야죠." 지유가 복도 끝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획대로 진행하시면 돼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요. 그 인간이 우리 모두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지유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3년을 속이고, 결혼 약속까지 했는데...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기석이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걱정마세요. 저는 이미 다 각오했거든요."
전화가 끊어졌다. 지유는 깊게 숨을 쉬고 서준의 병실로 돌아갔다.
"오빠..." 문을 열며 들어온 지유의 목소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까의 차가움은 온데간데없고, 애절함이 가득했다.
"지유야 어디갔다와?" 서준이 물었다.
“아빠랑 통화했어. 오빠 걱정 많이하시더라고. 오빠 빨리 회복하도록 옆에서 잘 간호하라셔.”
“정말? 퇴원하면 찾아 뵙고 정식으로 인사드려야겠다.”“우리 혼인신고도 얼른 서두르자.”“지유야 너가 옆에 있어줘서 정말 든든해 고마워.”
“고맙기는.... 남자친구가 죽다 살아왔는데 이정도는 기본이지.” “오빠 얼른 퇴원구 같이 바람쐬러 가고싶다.”
“그럼 퇴원하면 바다 구경 갈래? 예전에 보러가기로 약속했던 그 방파제 말이야."
"좋지." 지유가 활짜ᆞ각 웃었다. 서준은 몰랐다. 지유의 뒤에서 어떤 계획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10장 — 방파제의 만남
서준이 퇴원한 지 일주일 후, 지유가 약속한 방파제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해질녘이었다. 붉은 노을이 바다를 물들이고 있었다.
"여기 정말 예쁘다." 지유가 서준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치? 내가 촬영 장소로 자주 오는 곳이야." 서준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때였다. 방파제 중간 지점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누구세요?" 서준이 경계심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걸어왔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한기석이었다.
"당신... 혹시 박영숙 남편?" 서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기석이 멈춰 서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요, 저는 그냥..." 서준이 변명하려 했지만, 기석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할 말이 있다."
기석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 무언가 위험한 것이 깔려 있었다.
지유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저... 저는 정말 아무 의도 없이..." 서준이 말을 더듬었다.
기석이 서서히 다가왔다. "의도 없이?"
"네, 그냥... 그냥 일이었어요. 촬영 때문에..."
"일?" 기석이 멈춰 서며 서준을 바라봤다. "내 아내를 가지고 노는 게 일이라고?"
서준의 얼굴에서 피가 가셨다. "아니에요, 오해예요."
기석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영상을 재생했다. 서준이 카페에서 친구와 나눈 대화였다.
"완전 심심한 인생 살고 있던 여자야..."
"그냥 비즈니스야, 비즈니스..."
서준의 목소리가 방파제에 울려 퍼졌다.
"이것도 일이냐?" 기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서준이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방파제 끝이라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저... 저기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정말 미안해요." 서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고?" 기석이 한 걸음 더 가까이 왔다. "20년간 함께 살아온 사람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고?"
그때 지유가 뒤에서 말했다. "오빠도 나를 3년간 속였어요. 결혼한다고 해놓고."
서준이 뒤돌아봤다. "지유야, 너 왜...?"
"미안. 나도 이제 복수할 시간이야." 지유의 목소리에 얼음이 깔려 있었다.
서준이 좌우를 둘러봤다. 앞에는 기석, 옆에는 지유, 그리고 뒤에는 바다.
"잠깐만요, 이야기해요." 서준이 손을 들었다.
기석이 말했다. "이야기? 너는 20년간 아무 말도 없이 참고 있던 한 여자의 마음을 농락했다."
"제발..."
"그리고 나까지 바보로 만들었지." 기석의 목소리에 분노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서준이 옆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기석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20년간 버스를 수리하며 다져진 몸과 특수부대에서 익힌 기술이 합쳐졌다.
"아아악!" 서준이 비명을 지르며 방파제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살려주세요!" 서준이 간절히 외쳤다.
기석이 멈춰 섰다. "내 아내도 그렇게 말했을 거다. 차에 갇혀서."
그 순간, 서준이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다 발을 헛디뎠다. 미끄러운 방파제 가장자리에서 균형을 잃었다.
"아아아악!"
첨벙!
서준이 바다로 떨어졌다. 차가운 바닷물이 그를 삼켰다.
기석이 가만히 바다를 내려다봤다. 서준이 허우적거리며 도움을 요청했지만, 기석은 움직이지 않았다.
"도... 도와주세요!"
차가운 물과 거센 파도, 그리고 공포가 서준의 몸을 마비시켰다.
지유가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119 신고는... 하지 않을게요."
기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 후, 바다가 조용해졌다.
11장 — 떠나는 남자
사흘 후, 영숙이 집에 돌아왔을 때 기석은 짐을 싸고 있었다.
"어디 가는 거야?" 영숙이 문 앞에서 물었다.
기석이 잠시 손을 멈췄다가 다시 옷을 개기 시작했다. "멀리."
"얼마나 멀리?"
"모르겠다."
영숙이 다가가 그의 손목을 잡았다. "왜? 왜 가야 해?"
영숙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기석이 그녀를 바라봤다. 20년을 함께 살아온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낯설게 느껴졌다.
기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방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
영숙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당신이 나를 구해준 건, 그건 진짜였잖아. 갯벌에서."
"그래." 기석이 짧게 답했다.
"그럼 왜 가는 거야? 우리 다시 시작할 수 있잖아."
기석이 문 앞에 서서 돌아봤다. "영숙아."
"응."
"난 20년간 너를 사랑했어. 지금도 그래." 기석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이제는 함께 살 수 없다."
"왜?"
"네가 그 사람을 보던 눈을 봤거든. 나는 한 번도 그런 눈으로 본 적이 없었지."
영숙이 주저앉았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기석이 현관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위험해."
"무슨 뜻이야?"
기석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잘 살아."
문이 닫혔다. 영숙 혼자 남았다.
창밖으로 기석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등이 점점 작아졌다. 영숙은 창문에 손바닥을 댔다.
"여보..." 하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12장 — 3년 후
2027년 가을. 서울 강남의 한 카페.
지유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32세가 된 그녀는 예전보다 더 성숙해 보였다. 검은 정장에 차분한 화장, 그리고 왼손 약지에 반짝이는 반지.
"실장님, 3시 회의 준비됐습니다." 후배가 다가와 말했다.
"알겠어요." 지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제 대형 광고회사의 마케팅 실장이었다. 서준 사건 이후, 그녀는 완전히 달라졌다. 더 차갑고, 더 냉철하고, 더 성공적으로.
카페를 나서던 그때, 맞은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박영숙이었다.
영숙은 많이 변해 있었다. 머리는 짧게 자르고, 예전보다 말라 있었다. 혼자서 마트 봉지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잠시 멈춰선 지유와 영숙.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지유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영숙도 자신의 길을 계속 갔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저 사람과 함께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들을. 하지만 이제 그것들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 후. 인천 월미도 선착장.
기석은 어선에서 내려와 물고기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3년간 혼자 살면서 그는 어부가 되어 있었다. 검게 탄 피부에 거칠어진 손, 그리고 더 깊어진 주름.
"기석씨,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선장이 인사했다.
"네." 기석이 짧게 답하며 트럭에 짐을 실었다.
수산시장에서 물고기를 내린 후, 기석은 혼자 작은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그가 매일 나가는 그 바다.
계산을 마치고 나오던 길에,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여자를 봤다. 영숙이었다.
그녀도 기석을 봤다.
3년 만의 재회였다.
영숙은 많이 늙어 보였다. 하지만 기석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세월의 무게를 온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버스가 왔다. 영숙이 탔다.
기석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떠나는 버스를 바라봤다. 창문 너머로 영숙의 옆얼굴이 보였다. 그녀도 창밖의 기석을 보고 있었다.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았고, 아무도 쫓아가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다시 헤어졌다.
에필로그 — 각자의 바다
2028년 봄.
지유는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대학교수였다. 차분하고 신중한 남자. 지유가 원하던 정반대의 타입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지유는 오래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서준과의 사진들과 편지들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태웠다. 마지막까지 남겨두었던 과거를.
"다시는 바보 같은 짓 하지 않을 거야." 지유가 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영숙은 작은 카페를 운영하게 되었다. '바다 전망 카페'라는 소박한 간판을 달았다. 혼자 사는 중년 여성들이 주로 찾아왔다. 모두들 자신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영숙은 더 이상 SNS를 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아침 카페 문을 열고, 저녁에 문을 닫는 단조로운 일상만 반복했다.
가끔 바다를 바라보며 그날 밤을 떠올렸다. 차가운 바닷물과 기석의 드론, 그리고... 서준의 마지막 모습.
기석은 여전히 어부로 살고 있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배를 타고 나가고, 해질녘에 돌아왔다. 말수는 더욱 적어졌고, 사람들과의 교류도 최소화했다.
어떤 날은 바다에서 서준의 환상을 보기도 했다. 물속에서 손을 뻗으며 도움을 요청하는 모습을. 하지만 기석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정말 가끔씩 영숙이 그리웠다. 함께 살던 그 작은 집과, 저녁마다 들리던 그녀의 발소리가.
세 사람은 각자 다른 바다에서 살고 있었다. 지유는 성공이라는 바다에서, 영숙은 후회라는 바다에서, 기석은 고독이라는 바다에서.
그들을 한때 하나로 묶었던 그 끔찍한 인연은 이제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다. 때로는 파도처럼 밀려와 마음을 휘저었지만, 결국은 다시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바다는 또한 모든 것을 씻어내기도 한다.
그렇게 세 사람은 각자의 바다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