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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 절망의 순간
부엌 바닥에는 깨진 그릇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뾰족한 파편 위에 무릎을 꿇은 주연의 다리는 이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픔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뺨이 불에 덴 듯 뜨겁게 달아올랐고 입술 사이에서는 비릿한 쇠맛이 스며들었다. 도현의 손에 들린 국자는 여전히 뜨거운 김을 내뿜었으며 사정없이 허공에 흔들리며 주연을 위협했다.
“너, 또 나한테 대들었지?” 도현의 목소리는 낮고도 서늘했다. 마치 사냥감을 궁지에 몰아넣은 맹수의 으름장 같았다.
옆방에서 돌쟁이 소현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이의 울음은 가늘지만 절박했다. 주연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제발, 아이만은… 이 장면을 또 보게 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온몸이 부서져도 아이의 눈과 귀를 막아주고 싶었다.
도현이 국자를 높이 들어 올리자 뜨거운 국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순간 주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이 공포의 장면은 17년간 반복되어온 악몽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이번엔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그때, 현관문이 거칠게 열렸다. “주연아!”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 친정아버지 춘식이었다. 반찬 봉지를 든 그의 눈이 부엌의 참혹한 광경에 고정됐다. 바닥에 흩어진 그릇 조각, 무릎 꿇은 딸, 국자를 든 사위, 그리고 방 안에서 울부짖는 손녀.
춘식의 주먹이 떨리며 굳어졌다. 평생 온화하고 순박하게 살아온 남자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눈동자 속에서 평생 억눌러온 분노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하나뿐인 딸이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현실 앞에서 그의 심장은 거세게 요동쳤다.
주연은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빛 속에는 분노와 동시에 죄책감, 그리고 결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속으로 외쳤다. ‘아버지, 제발… 이제 저도 더는 못 참겠어요.’
2장 | 그녀의 운명
최주연, 서른여덟. 키 160센티미터, 단정한 체구. 하지만 그녀의 내면은 이미 오랫동안 부서져 있었다. 25살 어린 나이에 혼전임신으로 결혼하면서부터, 그녀는 늘 남편의 그림자 속에 갇혀 살았다.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일하며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웃음을 건넸지만, 그 얼굴 뒤에는 수많은 멍과 상처가 숨겨져 있었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파운데이션으로 얼굴을 덮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에게 속삭였다. “오늘도 버텨야 해. 나에겐 하나뿐인 자식이 있잖아. 소현이를 생각해서라도.....”
장도현, 서른하나. 건장한 체격, 택배기사라는 힘든 직업. 낮에는 누구보다 성실한 일꾼이었으나,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술 한 잔에 억눌렸던 분노가 폭발하며, 손아귀는 곧 주먹이 되고, 주먹은 주연의 몸을 향했다. 그는 아내를 ‘자기 것’이라 여겼다. 다정했던 결혼 초의 모습은 기억 속 그림자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딸 소현, 이제 막 돌이 지난 아이. 말도 제대로 못 하지만 본능적으로 집안의 공기를 읽는다. 아빠의 발소리만 커져도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울음을 터뜨렸고, 엄마의 얼굴에 상처가 나 있으면 어린 눈에도 그 고통이 전해졌다. 아이의 울음은 언제나 주연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찔렀다.
이말순, 쉬흔다섯. 억척스러운 반찬가게 주인. 결혼 후 달라진 딸의 태도를 보면서도 ‘시집살이는 다 그런 거다’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매일같이 후회와 죄책감이 차올랐다.
최춘식, 쉬흔아홉. 평생 온순하게 살았던 남자. 마당의 화초를 돌보며 평온하게 사는 듯 보였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에라도 뛰어들 수 있는 애끓는 부정을 가지고 있다.
평범하게만 보였던 가정에 검은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춘식은 딸아이의 운명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아직은 알지 못했다.
3장 | 행복한 척
“엄마, 이거 좀 더 담아줘.” 주연은 친정 부엌에서 억지 웃음을 지으며 반찬을 담았다. 그녀의 웃음은 얇은 종이처럼 가볍고 쉽게 찢어질 듯 위태로웠다. 긴팔 블라우스는 또 하나의 갑옷이었고, 두꺼운 화장은 그녀의 상처를 가리는 가면이었다.
말순은 딸의 눈빛이 예전과 다르다는 걸 알아챘다. 결혼 전엔 밝고 생기 넘치던 아이가 언제부턴가 조심스럽고 소극적으로 변했다. 특히 남편 이야기를 꺼낼 때면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주연이 김치통을 들다가 소매가 흘러내렸다. 그 아래에는 선명한 붉은 자국. 말순의 호흡이 멎었다.
“주연아… 그건 뭐니?”
“아… 그냥, 급식실에서 물건 나르다 긁혔어.” 주연은 황급히 소매를 내렸다. 하지만 손끝이 떨렸다.
말순은 침묵했지만, 가슴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딸이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의 시선은 목덜미에 남은 선명한 손자국을 포착했다. 순간 숨이 막히며 눈물이 솟구쳤다.
뒤이어 들어온 춘식도 딸의 절뚝이는 걸음걸이를 보고 무언가 잘못됐음을 느꼈다. 부부는 서로 눈을 마주쳤다. 말은 없었지만, 표정이 모든 것을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늦게 알아챘다.’
4장 | 더 깊어지는 상처
그날 밤, 현관문이 쾅 열리며 술 냄새가 거칠게 안방까지 밀려 들어왔다. 도현은 한 손에 비닐봉지를, 다른 손에는 소주병을 들고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동자는 번들거리며 빛을 잃고 있었다. 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거실을 가로질러 주연을 노려보았다.
“밥 차려놨냐?” 낮게 깔린 목소리에는 이미 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주연은 두 손으로 앞치마를 꼭 움켜쥐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금방.....”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현은 밥상을 힘껏 밀어엎었다. 국물이 사방에 튀며 뜨거운 김이 허공에 흩날렸고, 그릇들은 산산조각 나 바닥을 메웠다. 깨진 조각 하나가 주연의 팔목을 스쳤다. 날카로운 통증이 전해졌지만, 그녀는 아픔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기다려? 내가 니 종이야?” 그의 목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주연이 몸을 숙여 파편을 치우려는 순간, 도현은 그녀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어 벽으로 몰았다.
“죽고 싶어?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그의 손가락이 주연의 목을 조여왔다. 처음에는 목덜미를 감싸는 압박감이었지만, 곧 점점 힘이 더해지며 숨이 막혔다. 눈앞이 번쩍이며 시야가 흐려졌다. 심장은 미친 듯이 두근거렸고, 귓가에서는 ‘쿵, 쿵’ 하는 고막이 터질 듯한 박동 소리가 울려댔다.
그 순간, 방 안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현의 작은 울음은 단순한 울음이 아니라, 어머니의 고통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비명 같았다.
“조용히 시켜!” 도현은 고개를 홱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 눈빛은 아이마저 위협의 대상으로 삼을 듯 날카로웠다. 이어 그는 주연을 바닥에 힘껏 내던졌다. 순간 갈비뼈가 바닥과 부딪히며 ‘뚝’ 하는 둔탁한 충격이 퍼졌다. 숨이 턱 막히고, 입술이 바닥에 부딪혀 터졌다. 따뜻한 피가 흘러내리며 쇠맛이 입안 가득 번졌다.
도현의 발길질이 이어졌다. 발끝이 복부를 차고, 허벅지를 차며, 다시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고통은 하나하나 뼛속에 각인됐다. 주연의 몸은 스스로 웅크려졌고, 두 팔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나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주연은 온몸이 떨리며 바닥에 엎드린 채 숨을 죽였다. 그리고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깨달음이 솟구쳤다. ‘이건 결코 끝나지 않아.’
주연의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은 무너진 자신을 향한 절망의 눈물, 그리고 아직 작고 연약한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두려움의 눈물이었다.
5장 | 붉은 손목
며칠 동안 말순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딸의 손목에서 보았던 그 선명한 붉은 자국이 눈을 감으면 더욱 또렷하게 떠올랐다. 반찬가게에서 손님을 대하면서도, 손님이 떠난 뒤 빈 그릇을 정리하면서도 자꾸만 딸의 떨리는 손목이 겹쳐 보였다. “내가 왜 그때 못 물어봤을까… 내가 왜 그렇게 방관했을까…” 죄책감이 칼날처럼 가슴을 찔렀다.
춘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밤마다 서재에 들어가 법률서적을 뒤적였다. 가정폭력, 상해죄, 접근금지명령… 조항들을 읽고 또 읽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법이 지켜줄지라도, 그 법이 딸의 지난 고통을 없던일로 되돌려줄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법으로는 부족하다. 놈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해.’ 그 결심이 점점 굳어졌다.
며칠 뒤, 주연이 친정에 들렀을 때 말순은 더는 참지 않았다. 부엌으로 딸을 데리고 가 조심스레 소매를 걷어 올렸다. “엄마, 하지 마…” 주연은 저항했지만 이미 늦었다. 팔뚝과 손목, 목덜미 곳곳에 새겨진 선명한 흔적들. 누군가 손으로 세게 비틀고 조른 듯한 잔혹한 상처였다.
말순은 딸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내 새끼야… 너 혼자 이걸 다 버텼니….” 그동안 외면했던 진실이 눈앞에 펼쳐지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때 춘식이 들어왔다. 상처를 본 그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평생 화를 내본 적 없는 그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는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저 짐승 같은 놈, 반드시 내 손으로 끝장내겠다.’
그날 이후 주연과 돌쟁이 소현은 친정집에 머물렀다. 도현이 찾아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았다. 그 집 문은 이제 다시 열리지 않을 성이었다.
6장 | 시댁의 저항
소식은 금세 시댁으로 흘러들어갔다. 며느리가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시어머니 박옥례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전화기를 움켜쥔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부부싸움이 뭐라고 집을 나가! 저년이 며느리로서 제 할 일을 못 하니까 그렇지!”
옥례의 목소리는 날카롭게 떨렸다. 그녀는 아들이 잘못했다는 가능성조차 머릿속에 두지 않았다. 아들은 늘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믿음 속에 갇혀 있었고, 그 믿음은 그녀의 오만이자 방패였다.
도현 역시 당황했다. 늘 조용하고 순종적이던 주연이 감히 집을 나가 친정으로 들어가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고, 집에 찾아가도 굳게 닫힌 문은 미동도 없었다.
결국 옥례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반찬가게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자 가게 안에 있던 손님들이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운터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소리쳤다.
“당장 며느리 돌려보내! 부부싸움은 부부끼리 해결하는 거야. 부모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칼로 무를 썰던 말순은 손을 멈추고 조용히 칼을 내려놓았다.
“박 여사님, 그동안 우리 주연이가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고나 계세요?” 말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뭐라구?” 옥례는 눈을 부릅떴다.
“주연이가 당신 딸이라도 이렇게 하실 거예요? 매일 멍을 가리고, 목에 자국을 숨기고, 아이까지 겁에 질려 울부짖는데… 그게 부부싸움입니까? 그건 학대예요. 살인이나 다름없다고요.”
가게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손님 몇 명은 눈치를 보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옥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말순의 단호한 목소리에 밀려 할 말을 잃었다.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은 달싹였지만 뱉어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말순은 마지막으로 차갑게 덧붙였다. “이제 그만 가세요. 주연이를 그집으로 다시는 보내지 않을 겁니다.”
결국 옥례는 씩씩대며 빈손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가게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좁은 골목을 울렸다.
그날 밤, 도현은 술에 절어 친정집 앞 골목에 나타났다. 흔들거리는 가로등 불빛 아래, 그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내 아내 내놔! 내 딸 내놔! 나는 남편이자 아버지라고!”
목소리는 갈라지고 술 냄새가 골목에 진동했다. 이웃 몇 명이 창문을 열어 쳐다보다 이내 창문을 닫았다. 누구도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집 안에서는 불빛만 희미하게 새어나올 뿐,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주연은 소현을 품에 꼭 안은 채 가만히 귀를 막았다. 아이의 울음이 혹여 밖으로 새어나갈까,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말순은 문 옆에 서서 두 손으로 문고리를 붙잡았다. 춘식은 신발장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숨을 죽였다.
문밖의 고함은 한동안 이어지다 점점 약해졌다. 도현의 발소리가 휘청이며 골목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적막이 다시 찾아왔지만, 집 안 사람들은 쉽게 숨을 고르지 못했다. 오늘 밤, 그들은 또 한 번 결심했다. 반드시, 이 악의 고리를 끊어내겠다고.
7장 | 마지막 기회
춘식은 며칠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친정집에 머무는 주연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소현은 작은 인기척에도 몸을 움찔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대로는 안 된다.” 춘식은 결국 결심했다. 사위를 마지막으로 만나, 경고라도 하고 싶었다. 혹여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면 확인하고 싶었고, 동시에 이 인간이 정말 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약속 장소는 집에서 멀지 않은 카페였다. 햇살이 유리창을 비스듬히 가르고 있었지만, 창가에 앉은 두 남자 사이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도현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입가에는 얄팍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눈빛은 건방지고 느슨했다.
“아버님이 먼저 보자 하셨다면서요. 무슨 얘길 하시려구요?” 그는 마치 자신이 피해자인 듯 태연하게 말을 꺼냈다.
춘식은 잠시 도현을 똑바로 바라보다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니가 주연이를 때린 걸… 후회하지 않느냐?”
도현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얼음을 휘젓듯 아이스커피 빨대를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아버님, 요즘 세상 살다 보면 부부끼리 싸울 수도 있죠. 말로 안 되면 손이 오갈 수도 있는 거고. 다들 그렇게 살잖아요. 저만 그런가요?”
그 말에 춘식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주연의 목에 선명히 남은 손자국과 손목의 붉은 자국을 떠올렸다. 그리고 방에서 울부짖던 어린 손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우리 딸의 목을 졸랐어 그게 단순히 싸움이라고? 니 말은 폭력을 생활 습관으로 정당화하는 거다.”
도현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다시 뻔뻔한 웃음을 지었다. “아버님, 너무 과장하시네. 주연이도 성질 있어요. 제가 화 좀 낸 거지,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경찰에 신고라도 하실 건가요?”
춘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면, 그래야지.”
그러자 도현은 의자를 뒤로 젖히며 어깨를 으쓱했다.
“신고하세요. 벌금이나 집행유예 나오겠죠. 요즘 판사들, 이런 건 다 그냥 부부 문제라면서 넘어가더라구요. 저라고 할말 없는줄 아세요? 어디 누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시죠”
그의 입에서 나온 말 하나하나가 칼날처럼 춘식의 가슴을 베어갔다. 이 남자에겐 뉘우침도, 책임도, 인간적인 후회조차 없었다. 그저 자기 입장만 합리화할 뿐이었다.
순간 춘식의 머릿속이 맑아졌다. 뜨겁던 분노가 사라지고, 차가운 확신이 자리 잡았다. ‘이 자식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경찰에 넘겨도, 법정에 세워도 소용없다. 벌금 몇 푼 내고 나오면 다시 주연이와 소현을 괴롭힐 게 분명하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손에 쥔 종이컵이 살짝 구겨지며 찌그러졌다.
“도현아.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오늘 확실히 알았다. 이젠 더 이상 우리 가족을 괴롭히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넌 감당하지 못할 일을 맞게 될 거다.”
도현은 비웃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협박으로 들리는데요? 아버님, 그렇게 점잖으시던 분이 이제 와서 무슨 영웅이라도 되신 거예요?”
춘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눈빛으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그 눈은 평생을 온순하게 살아온 남자의 눈이 아니었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선택도 주저하지 않는 아버지의 눈빛이었다.
카페를 나서며 그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눈꺼풀 뒤로, 어린 시절 마당에서 뛰놀던 주연의 모습과 지금 겁에 질린 소현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두 얼굴이 겹쳐지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결심은 굳건해졌다. ‘법이 막아주지 못한다면, 내가 막아야 한다.’
그날 밤, 춘식은 서재에 앉아 오래된 서류철을 꺼냈다. 혼인관계증명서, 보험 약관, 이혼 조정 신청서. 종이들이 책상 위에 차곡차곡 놓였다. 그는 손가락 끝으로 종이의 모서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마치 앞으로 펼쳐질 일을 미리 점검하듯.
잠시 후 말순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어둡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그녀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동시에 섞여 있었다.
춘식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내를 바라보았다.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춘식의 눈빛을 읽은 말순은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알았다. 남편은 이미 돌아오지 못한 강을 건너고 있다는 것을.
창문 너머로 새벽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춘식은 창밖 어둠 속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평범한 노인의 것이 아니었다.
# 8장 | 반전의 법정
춘식은 책상 위에 놓인 법률서적을 천천히 덮었다. 가정폭력으로 도현을 경찰에 넘긴다고 해도, 그는 곧 집행유예나 가벼운 형벌로 풀려날 것이 뻔했다. ‘형량이 고작 몇 년일 텐데… 그 사이 우리 주연은 또 얼마나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의 눈빛은 결연했다. 그래서 그는 경찰에 넘기지 않고, 오히려 이혼 절차만 밟게 하려 했다. 그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자, 자신이 직접 준비한 더 큰 계획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길이었다.
“여보, 그건 말도 안 돼!” 말순은 목소리를 높였다. “저 인간을 그냥 놔두고 이혼만 한다고? 우리 주연이가 그 동안 어떤 꼴을 당했는데!” 그녀는 손에 힘을 주어 앞치마를 움켜쥐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춘식은 잠시 말없이 아내를 바라보다 낮게 대답했다. “여보, 나한테 생각이 있어. 너무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고… 나를 믿어 줘.” 그의 목소리엔 흔들림이 없었다. 말순은 눈치를 챘다. 남편이 무언가 결심했음을. 그러나 더 캐묻지는 않았다.
가정법원 법정. 주연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꼭 움켜쥐었다. 그녀의 옆에는 말순이, 그리고 앞줄에는 도현이 앉아 있었다. 그는 여전히 뻔뻔했다. “저는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다만 부부 사이에 흔히 있을 오해가 있었을 뿐입니다.” 태연히 거짓을 늘어놓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주연의 가슴은 찢어졌다. 말순은 치를 떨며 이를 갈았다. 춘식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고개를 숙였지만, 안쪽에서 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 있었다.
재판은 길게 이어졌고, 결국 조정 절차로 넘어갔다. 모두가 지친 얼굴로 법원을 나서던 그날 밤, 사건은 예기치 않게 흘러갔다.
# 9장 | 진실의 무게
도현이 야간 택배 배달 중이던 도로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대형 트럭에 치여 혼수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주연에게 전해졌다. 사고 원인은 불분명했다. 목격자도 없었다. 주연은 알수 없는 감정에 휩쌓였다.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더 놀러운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직 이혼 조정 기간이었기에, 주연은 도현의 상해보험금을 수령할 권리를 가진 상태였다. 수십억에 달하는 거액의 보험금.
말순은 딸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녀석 천벌을 받은게야.”
그런데 왠일인지 춘식은 무심히 창밖을 바라볼뿐이었다. 눈빛은 어둡고 깊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현의 교통사고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야간 배달 중 대형 트럭에 치여 혼수상태”라는 짧은 문장이 모든 걸 설명하는 듯했지만, 춘식의 마음속엔 누구도 모르는 무거운 비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날 밤, 어둠을 가르며 달리던 트럭의 운전석에는 다름 아닌 그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순 역시 남편의 눈빛을 보고 직감했다. 이 사고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묻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법과 제도가 딸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결국 가족이 나서야 한다는 걸. 남편의 결심은 무모했지만 동시에 단호했고, 그녀는 그 진실을 함께 짊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침대 맡에 누워 있는 도현의 얼굴은 평소의 오만함이 사라진 채 무력하게 누워 있었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겨우 생명을 이어가는 모습은, 과거의 위협적인 그림자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춘식은 병실 앞에서 잠시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연민은 단 한 조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네가 뿌린 씨앗의 결과다. 딸을 짓밟은 대가치고는 너무 가벼운 벌일지도 모른다.”
주연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아버지… 이게 정말 운명일까요? 아니면….” 말끝을 잇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음 한편에서 설명할 수 없는 불안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곧 소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귀를 채웠다. 아이의 웃음은 마치 그녀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엄마, 이제 괜찮아. 이제 무서워하지 마.”
보험금 수령 절차가 진행되었다. 수십억 원의 거액은 주연에게 너무 낯설고 무거웠다. ‘돈이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 있구나….’ 그녀는 돈을 쥐고도 웃을 수 없었다. 하지만 춘식은 딸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이건 너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앞으로 니가 아이와 함께 살아갈 삶의 기반이 될 거다.” 그의 눈빛에는 단호함과 동시에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병실에 도현을 찾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어머니조차 연락이 닿지 않았다. 삼십년 동안 주변에 뿌린 독이 결국 그를 완전히 고립시킨 것이다. 주연은 병실 복도를 걸으며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이제 내 인생에서 끝났어. 내가 지고 있던 쇠사슬은 끊어진 거야.”
10장 | 새로운 시작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주연은 이제 매일 아침, 카페 문을 열며 햇살을 맞이했다. 작은 카페였지만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창가에 놓인 화분, 직접 고른 원목 테이블, 그리고 늘 은은히 풍기는 원두 향기. 이곳은 그녀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세운 공간이었다.
“엄마!” 소현의 옹알이 섞인 목소리가 가게 안을 울렸다. 이제 걸음마를 떼고 종종걸음을 치며 엄마 곁으로 달려오는 아이. 주연은 아이를 품에 안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은 과거의 고통과는 전혀 닿아 있지 않은, 순수한 현재와 미래의 웃음이었다.
카페 한편에는 춘식과 말순이 앉아 있었다. 춘식은 손녀에게 책을 읽어주며 눈가에 잔잔한 주름을 만들었고, 말순은 작은 도시락을 열어 소현의 입에 반찬을 넣어주며 행복해했다. 세 사람은 지난 몇년 동안 잃었던 가족의 온기를 천천히 되찾고 있었다.
주연은 가끔 창밖을 바라보았다. 길을 걷는 사람들,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손님들, 따스한 햇살.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누군가의 아내’도, ‘폭력에 억눌린 그림자’도 아니었다. 스스로의 이름, 최주연으로서 살아가고 있었다.
도현의 소식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병원에서 여전히 혼수상태라는 얘기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주연의 마음속에 그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었다. 더 이상 그녀의 삶에 발을 들일 수 없는, 지워진 그림자.
어느 날, 카페 문 앞에서 춘식이 주연을 불렀다. “주연아.”
“네, 아버지.”
“이제야 니가 웃는 걸 보니… 나도 맘이 놓이는구나.” 그의 눈빛은 묵직했다. 그는 결코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딸의 웃음을 보는 순간, 그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주연은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아버지, 이제 괜찮아요. 저… 진짜 행복해요.”
창밖으로 봄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살짝 흔들었다. 카페 안에는 커피 향기와 아이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주연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 공기는 자유의 냄새였다.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제 두려움은 없다. 나는 나답게 살 것이다. 그리고 이 아이에게는 절대 어두운 기억을 물려주지 않을 거다.”
그 순간, 모든 고통의 세월은 과거로 흘러갔다. 남은 건 새로운 시작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