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사랑받는 절대 원칙
여긴 왜 이렇게 더운 거냐. 평일 퇴근시간 전이라 사람도 별로 없는 데다 오늘은 늦가을 날씨인데 이렇게까지 히터를 빵빵하게 돌리다니.
썩 익숙지 않은 백화점 1층을 돌아다니고 있어서 그런지 점원들이 다 나만 쳐다보고 있는 것 같고, 나에게 말을 걸기 위해 호시탐탐 내 눈과 마주치려 노리고 있는 것 같아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벌써 등과 허리춤은 땀으로 흥건하다.
애써 자연스러운 척 빠르게 눈동자만 굴리며 주얼리샵 위치를 파악한다.
마음 같아서야 그렇게나 유명하다는 명품 주얼리샵으로 당당하게 직진하고 싶다마는.
아서라, 우리 집에서 정녕 온전히 우리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건 겨우 안방 정도나 될까. 거실이며 나머지 방은 은행느님의 소유임을 잊지 말지어다. 못 살건 아니지만 저걸 선물로 꺼내는 순간 등짝 스매싱 감이다.
그래 저기다. 언제였던가 저 브랜드 정도면 퀄리티며 네임밸류며 나쁘지 않다 했었지.
다른 손님과 대화 중인 점원이 나를 발견하기 전에 얼른 골라보자.
저건 너무 화려하니 싫어할 것 같고, 저건 너무 심플한가?
액세서리라곤 결혼 첫 해 사준 목걸이와 늘 끼는 반지 말고는 별 필요도 없고 거추장스럽다며 관심도 없어하더니, 얼마 전에 장모님한테서 팔찌 하나를 받아오고선 너무 맘에 든다며 팔찌 하나 더 레이어드 하면 더 이쁘겠다고 친구와 통화하던 걸 잊지 않은 나 자신 칭찬해.
점원이 나를 발견했다. 아뿔싸 쓸데없는 생각 하느라 방심했다.
어머 여자친구분 크리스마스 선물 고르시나 봐요?? 이 디자인이 이번 크리스마스 에디션인데 엄청 많이들 사가셨어요.
그 디자인 말구요 아내한테 줄 팔찌 보고 있는데 피부가 하얗고 귀여운 스타일이고 심플한 걸 좋아하는 편인데 이거 괜찮을까요?
뭐야 엄청 민망할 줄 알았는데 나 왜 이렇게 자연스럽냐.
아내분이 너무 좋아하시겠다. 그럼 이거랑 이거 그리고 저거 한번 보시겠어요?
저건 큐빅이 너무 크니까 탈락. 둘 중에 어떤 게 나으려나. 그래 레이어드 한다고 했으니 저게 좋겠다.
뭐야 나 좀 고르는 센스도 있는 것 같잖아.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는 게 그리 대단한 서프라이즈도 아니고 남들 다 하는 그런 건데 이게 뭐라고 이렇게 벌써 괜히 뿌듯하고 뭔가 스스로 대견하군.
그렇게 스스로 취한 상태로 집에 다다르니 그제야 평소의 나로 각성이 좀 되면서 슬그머니 걱정이 고개를 든다.
디자인 호불호가 확실한 여자인데 괜찮으려나? 그래 점원분도 무난하게 누구나 부담 없이 착용할만한 디자인이라고 했으니 뭐. 근데 너무 무난하다고 싫어하면? 하 어렵다 어려워.
크리스마스 전까지 잘 숨겨서 들키지나 말자 일단. 여름옷 옷장 깊숙하게 넣어 놓으면 모르겠지.
그렇게 혼자 쓸데없이 마음 졸이며 보내길 나흘째,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두고 아내가 도발을 한다.
남들은 남편이 서프라이즈도 그렇게 잘해준다던데 내가 눈치가 빨라서 서프라이즈가 안 되는 건지 남편이 서프라이즈를 모르는 건지 어휴.
뭐야 갑자기. 설마 여름옷 정리를 했나 이 12월에? 이렇게 실패한다고? 휴 다행이다. 선물이 발각된 건 아니군. 서프라이즈는 못하지만 평소에 말 잘 듣는 남자로 살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고 있지 않냐며 얇디얇은 방어막으로 우선 위기를 넘겨보자.
결혼한 지 10년이 다되어가는데 한번 정도는 깜짝 선물이나 데이트 정도 준비해 줄 수 있는 거 아냐? 너무해 정말. 으휴. 무드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남편 만나서 이게 뭐람.
내가 깜짝 이벤트 약한 거 인정! 하지만 무드가 눈곱만큼도 없다는 참을 수가 없네?! 내가 이번엔 준비했다 이거야!!
눈이 휘둥그레 커져버린 아내가 말없이 눈만 깜박인다.
모스 부호인가. 해석해 보자. 응? 너 누구냐니? 거 장난이 너무 심한 거 아니오?
뒤늦게 터져 나오는 돌고래 소리.
웬일이래? 센스 뭐야? 내가 이쁘다고 했던 브랜드네? 대박 이거 팔찌 아냐? 내가 팔찌 하나 더 갖고 싶었던 거 어떻게 알고?
진심으로 반성하자. 지난 10여 년 간 아내가 저렇게나 밝고 환하게 웃었던 적이 몇 번이더라.
그렇게 뜻하지 않은 타이밍에 뜻하지 않게 성공한 깜짝 이벤트가 끝나고 아내가 묻는다.
어떻게 팔찌를 선물할 생각을 했어? 진짜 놀랬어.
지난번에 친구랑 통화할 때 뭐 팔찌 어쩌구 얘기한 거 아니냐고 적당히 무심하게 적당히 시크하게 말해줬더니 왜 통화하는 거 엿듣냐 앞으로 통화할 때 방에 들어가서 해야겠다는 아내.
팔찌를 바로 꺼내보더니 너무 예쁘다며 팔찌 레이어드하기 딱 좋다고 방방 뛰는 아내.
뭔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편이 된 것만 같은 착각에 크으 또 취한다.
아내가 갑자기 쭈뼛쭈뼛 거리며 다가온다. 팔찌가 옷에 걸려서 풀어보려고 이리저리 당겨보다가 끊어졌단다.
어디 보자. 해를 넘기고 열흘쯤 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끊어지다니.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하는 아내를 다독이고서 화장대 서랍에 넣어두었던 보증서를 꺼내오자 아내가 나중에 본인이 직접 갈 거라며 보증서를 다시 서랍에 가져다 놓는다.
커피를 마시는 아내의 팔목이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데 뭔가 휑한 느낌이다. 팔찌가 하나밖에 없다.
팔찌 레이어드 하고 다닐 거라더니 수리하러 안 가? 벌써 두 달 전인데?
헤실거리며 아내가 수줍은 고백을 한다.
사실 지금 팔찌랑은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건 나중에 수리해서 따로 차긴 할 거야.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그럼 그때 바로 디자인을 바꾸러 가지 그랬어.
아니야 아니야. 이것도 디자인 너무 맘에 들어. 지금 차고 있는 거랑 조금 안 맞을 뿐이지. 그리고 이게 어떤 팔찌인데. 무심한 줄 알았던 남자가 내가 우연히 통화한 걸 듣고 혼자 백화점 몰래 가서 나한테 줄 선물을 열심히 골라서 몰래 숨겨놓았다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건데 이걸 어떻게 바꿔. 절대 못 바꿔. 안 바꾸지. 이거 나 평생 간직할 거야. 건들지 말어.
영양제 잘못 줘서 바꿔줄랬더니 이미 준 건데 건들지 말라며 오로롱 거리는 우리 반려견 대발이처럼 잔뜩 털을 세우며 도리질을 하는 아내의 말속에서 다시 한번 문득 깨닫고야 만다.
사실 정작 중요했던 것은 작고 반짝이는 그것이 아니라 아내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귀 기울이고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 아내를 생각하며 아내를 위해 무언가를 고민하고 준비하는 모습이었던 거다.
그렇다. 이 글은 내 자랑이다. 아내에게 넘치게 사랑받고 있는 남자의 자랑글이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여.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 아내에게 사랑받기 위해 뭘 해야 할지 모르고 고민하는 남자들이여.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어려워하지 말지어다.
절대적 원칙 하나. 내 여자의 말에 늘 귀를 기울여라. 그 안에 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