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 [개인적인 체험]

슬픔을 마주하는 방법

by 민달이

[short story]


1.

... 그런데 어느 순간 나는 바위틈으로 들어왔던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옮아가 갑자기 머리와 턱이 바위틈에 꽉 끼어 버렸다.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극도로 당황해서 버둥거리면서 물을 마시며 꺽꺽거리다가 거대한 힘을 가진 팔에 내가 탈출하려던 방향과는 반대로 황어 떼 쪽으로 쑥 처넣어졌다가 양다리를 비틀린 채 끌려 나온 거였다.

[분노의 대기에 차가운 갓난아이가 솟아올라]


2.

누이여, 내가 구조대로 온 소방 단원들에게 잡힌 다음 그렇게 끝없이 울며 절규한 것은 그 파괴자의 육체를 복원하는 일. 내게 시련으로서 주어진 그 과업을 거기서 포기해야만 했기 때문이야.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


3.

일고여덟 살 즈음의 저는 혼자서 숲 속을 돌아다니다가 저녁나절이 되어야 집이 있는 골짜기로 내려오는, 지금 생각하면 참 이상한 습성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한 번은 숲 속에서 열이 나는 바람에 사흘이나 내려오지 못하다가 마침내 소방대원에게 업혀 내려와 '덴구의 남창'이라는 별명이 붙어 버렸죠.

['울보' 느릅나무]


4.

"우리 아기는 처음 태어났을 때 머리 둘 달린 괴물로 보일 정도로 큰 혹이 머리 뒤에 붙어 있었어. 그걸 의사가 뇌헤르니아로 오진했던 거지. 의사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D는 나와 자기 자신을 그 엄청난 재앙으로부터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그 의사와 상담해서 아기를 죽이고 말았어...."

[공중 괴물 아구이]


5.

"놀란다니, 어떤 상태인가요?"

"외관? 보기에? 머리가 두 개 있는 것처럼 보여요, 바그너의 [쌍두의 독수리 깃발 아래]라는 것도 있지만, 놀랄걸요!"

....중략...


"그런, 뇌헤르니아의 갓난아기가 정상적으로 자랄 희망이 있는 건가요?"하고 버드는 망연히, 수습되지 못한 기분 그대로 물었다.

"정상적으로 자랄 희망!" 하고 원장은 느닷없이 거칠게 소리를 높여 분개한 듯이 말했다. "뇌헤르니아라니까요. 두개골을 잘라내고 빠져나온 뇌를 밀어 넣는다고 해봤자 식물인간이라도 된다면 정말 운이 좋은 거라고요. 정상적으로 자란다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개인적인 체험]






[small talk]


1.

오에 겐자부로:

하지만 모든 소설은 어딘가 저 자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젊은이로서, 장애아를 가진 중년으로서, 노인으로서 생각한 것에 대해서이지요.
...중략...

히카리와 40년 동안 살았고, 그 아이에 관해 쓰는 것은 제 문학 표현의 커다란 기둥 중 하나입니다.
... 중략...

두 가지, 그러니까 제 소설의 숲과 소년 시절의 집은 서로 겹쳐집니다. 제 어린 시절에 대해서 여러 번 썼지요 거기엔 실제와 상상이 뒤섞여 있습니다.

[파리 리뷰- 작가란 무엇인가]


2.

오에 겐자부로:

머리에 이상이 있는 신생아로 태어난 아들에게 촉발되어 나는 이 [개인적인 체험]을 비롯한 몇 개의 작품을 써왔다. 그것들은 모두 출발점이 되어 준 장편소설과 마찬가지로 현실 생활과 완전히 겹쳐 있는 것은 아니지만(다시 말해 일본 문학의 전통적 장르, '사소설'처럼은 아니지만), 역시 그러한 자신으로서의 깊은 경험에 뿌리가 닿아 있었다.

[개인적인 체험]


3.

중후기 작품에는 장애자 아들과의 문제가 많이 등장한다. 그것이 작가의 인생의 당면한 명제임을 알게 하는 장면이다.
... 중략...

[분노의 대기에 차가운 갓난아이가 솟아올라]에서 어린 시적의 '내'가 이상한 고양감에 이끌려 깊은 강물 속으로 잠수하여 황어 떼를 관찰하다가 그대로 익사할 뻔한 이야기나 ['울보' 느릅나무]와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에서 나오는 소년인 '내'가 혼자 산에 올라 헤매 다니다가 소방대원에게 구조되는 이야기는 실제로 소년 오에 겐자부로에게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그 사건들을 통해 자신의 아들은 일부러 생의 방향으로부터 일탈을 할 놈이라고 분노 속에서 단념한 바가 있었다.

[세게 문학 단편선-오에 겐자부로]





소년 오에 겐자부로가 산속을 뛰어다니거나 물속에서 헤엄치는 모습을 상상하면 즐겁다. 내 주위의 그런 개구쟁이들을 보며 저 중에 어느 녀석이 커서 예술가가 될까 생각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하지만 막상 딴 세상 사람인 양 이런저런 튀는 행동을 하는 아이 부모의 입장은 또 다를지도 모르겠다. 마치 소년 오에의 어머니처럼. 오에 겐자부로의 어머니가 소년 오에를 두고 했다는 말이 흥미롭기도 하고 어쩐지 조금 웃음이 난다.


['울보' 느릅나무], 와 [새로운 사람이여 눈을 떠라]에서 나오는 소년이 혼자 산에 올라 구조되는 이야기나, [분노의 대기에 차가운 갓난아이가 솟아올라]에서 익사할 뻔한 이야기가 모두 소년 오에가 직접 경험한 이야기라니 흥미롭지 않은가. 게다가 오에의 어머니는 그 사건들에 단단히 화가 나 '자신의 아들은 일부러 생의 방향으로부터 일탈을 할 놈'이라고 분노했다고. 이런 작가의 에피소드들은 재미있고 흥미롭지만 당시 소년 오에의 어머니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작가에게 과거의 추억이나 일상의 일들은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소소한 일상의 사건들도 그럴진대, 하물며 사랑하는 자식에 대한 일이야 오죽하랴. 아이를 기다리는 부모들은 누구도 자신의 아이에게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태중의 아이를 만나기 전에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을 오래 붙들고 있지 않으려 애쓰고 더구나 입 밖으로 내려하지 않는다.


그런 간절한 마음들로, 미래의 행복을 꿈꾸는 마음들로 아이를 기다리는 중에 태어난 아이의 장애를 발견한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감히 타인들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완전히 '개인적인 체험'일 테니까. 작품의 제목을 정했던 작가의 의도 또한 어쩌면 그러하리라 짐작해 본다. 그의 아들 히카리는 2009년에 마흔여섯이라고 했으니 올해로 쉰여섯이 되셨겠다.

'빛'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지닌 오에의 아들 히카리.


오에 겐자부로 부부와 아들 히카리




장애를 가진 아이가 태어나자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었던 꿈이 박살 나는 것을 느낀 버드는 순식간에 자기기만이라는 함정에 빠져 버린다. 부인이 봐서는 안된다는 명목 하에 아이를 서서히 쇠약사 시키고자 마음먹는 버드. 아이가 자신들의 미래를 발목 잡아 불행만 남길 것이라는,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합리화하고 버드는 점점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자기기만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구원을 바라듯 동창 히미코의 습하고 어두운 방으로 기어 들어간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기 괴물로부터 도망쳐야만 한다. 그렇지 않았다간 아아, 나의 아프리카 여행은 어떻게 되는 걸까? 버드는 자기 방어의 열망에 사로잡혀, 마치 보육기 속의 아기 괴물이 우리 칸막이 너머로 자신을 노리고 있기라도 하듯 방어 자세가 되었다. 동시에 버드는 회충처럼 자기에게 들러붙은 에고이즘이 수치스러워 온몸에 땀이 배며 얼굴이 붉어졌다.'


아이에게 설탕물만 먹여 쇠약사 시키려는 버드. 그에 동조하며 죽으면 해부해 보고 싶다고 말하는 의사. 자신의 딸이 볼까 봐 빨리 처치해 줄 수 없냐고 다그치는 장모. 작가는 무서운 이기심으로 가득한 인물들을 등장시킨 후 버드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단순한 책략을 아내가 눈치 채지 않을까? 모든 것이 연극 같아. 게다가 등장인물은 모조리 기만의 대사만을 말하는 연극이군. 하고 버드는 생각했다.'


자기기만은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소개된 방어기제 중 억압, 부인, 합리화, 투사와 연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인지행동적 관점에서는 파국적 사고, 감정적 추론, 과잉 일반화와 연관되어 있으며 또한 사실이 아닌 일에 대하여 혹은 반대되는 증거가 충분히 있는 일에 대하여 사실과 다른 방향으로 합리화하고 믿고자 하는 경향을 의미한다고. -출처: 두산백과-


자기기만이란 얼마나 써먹기 쉬운 수인가. 의식 중이건 무의식 중이건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며 그릇된 쪽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은 주위에 어디에나 존재한다. 크고 작은 일들을 두고 자신을 속이며 진실을 피해 다니는 사람들. 혹은 종종 그것은 나이기도 하다. 자기기만은 자신의 선택에 의미 없음을 정의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심리적 특성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이렇게 하지만 사실 이렇게 하는 게 틀리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채 끝없이 탐하게 되는 일들.


'내가 내면에 있는 기만의 가려움증을 견디며 아무리 악전고투해 봤자 이미 그것은 내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 있다. 버드는 기만의 당의 아래 있는 또 하나의 쓰디쓴 진실을 씹어 맛보았다.'


다행히도 버드는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는 내면에 존재하는 기만의 가려움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아래 존재하는 진실의 쓴 맛. 자기기만의 존재 조차 인정하지 않던 버드의 내면이 조금씩 가려워지며 자신의 기만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아이를 죽이고 아프리카로 함께 떠나자고 말하는 히미코는 사실 죽은 참새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스포츠카를 웅덩이에 처박는 태도의 사람인 것이다. 어린 남편이 자살한 뒤에 히미코는 히미코대로 자기기만의 삶을 살아왔지만 히미코 역시 아이를 처리하러 가는 길에 내면에서 움찔거리는 진실의 존재를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다.


결국 버드는 폐렴까지 겹친 위독한 아이를 대학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급히 택시를 탄다. '만약 내가 지금 아기를 구해 내기 전에 사고로 죽는다면 지금까지 27년의 내 삶은 말짱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린다고 버드는 생각했다. 일찍이 맛본 적이 없는 끔찍한 공포감이 버드를 사로잡았다.' 아기 괴물의 공포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자기기만을 부렸던 버드는 다행히 자기기만으로부터 비롯되어 질 수 도 있었던 끔찍한 진짜 공포를 맛보기 바로 직전에 아이를 살린다.





[개인적인 체험을] 처음 읽었을 땐 내용의 불편함에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내용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정상적인 정신상태라고 볼 수 없을 정도다. 여자를 인간이 아닌 도구이거나 물건처럼 대하는 장면이나, 거북한 성 묘사는 물론, 무엇보다 장애 아이를 두고 함부로 말하거나 킥킥 대는 의사라던가, 장애아와 막 출산한 부인을 두고(아무리 자기기만의 설정을 위해서라지만) 다른 여자에게 가서 괴물 같은 짓을 한다거나(그게 또 너무 구체적이야)하는 불쾌한 설정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이것은 문화의 차이인가?)


더구나 [공중 괴물 아구이]를 먼저 읽었던 나는 [개인적인 체험]이 그것과 '형제' 작품이라는 말에 내심 기대를 하고 있어서 더 충격이었던지도 모르겠다. [공중 괴물 아구이]를 읽고 느꼈던 슬픔과 비애. 그리고 작품 속에 흐르는 특별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던 터라, 버드의 악행에 놀란 나는 꾸역꾸역 읽던 책을 치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본 [개인적인 체험]은 그때와는 다르게 느껴졌다. 처음 읽었던 때는 사회적으로 불편한 부분, 문화적, 정서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 집중했기에 너무 불쾌하고 마치 보이지 않는 폭력을 당한 듯 느껴졌지만 '자기기만'이라는 키워드에 집중해서 읽고 난 뒤의 느낌은 조금 달랐던 것이다.


[공중 괴물 아구이]에서 부모는 아이를 죽이는 선택을 하고 [개인적인 체험]에서는 결국엔 아이와 공생하는 삶을 선택한다. 슬프고 애잔한 정서가 흐르는 작품에서는 아이의 죽음이, 다분히 폭력적인 정서의 작품에서는 공생이 선택되는 부분이 어쩐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오에 겐자부로가 장애아를 키우기로 마음먹은 부모의 감정 중 긍정적인 부분만을 소설의 소재로 썼다면 오히려 거부감이 들었을지 모른다. 장애아이를 만난 그 순간의 감정이 긍정적일 뿐이라고 확언하는 건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인간의 감정은 긍정의 면만을 지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작가도 그 당연한 명제를 알고 있으므로 그 순간 아이에게서 달아나고 싶은 한 인간의 처참한 모습을(결국엔 돌아왔다!) 그리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이 지닌 양가적 감정을 감추거나 가식을 떨지 않은 솔직한 표현으로 작품성을 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장애를 지닌 사람이나 그 가족들에게 무례한 눈빛을 보내거나 생각없는 말을 건네곤 한다. 악의 없는 무례함은 어쩌면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원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굳이 도움을 주려 한다거나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누구의 동정도 원하지 않으며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에와 이요(히카리)의 내용 중 읽다가 웃음을 터트리게 되는 부분이 많다. 이요가 기숙사에 들어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는데 아무래도 부모 마음이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지. 그런 와중에 이요가 말하는 부분.


"기숙사에 들어가는 순서가 되었습니다! 준비는 되어 있습니까?" 이어서 이요는 이런 소리도 했다. "다음 주 수요일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없는 동안 아빠는 괜찮을까요? 아빠가 이 위기를 잘 넘길 수 있을까요?" 뭔가를 씻고 있던 아내가 그만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또한 일주일의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이요의 이런 귀엽고 행복한 일들도.

커다란 가방을 어깨에 멘 이요가 막 거실로 들어오는 참이었다. 이요는 소파에서 일어나기 위해 불쑥 치켜든 내 왼발을 재빨리 잡더니 악수하듯 흔들며, "착한 발, 착한 발, 괜찮아요? 잘 지냈습니까?"하고 인사했다. 누운 채로 움직일 수 없게 된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들 방에서 달려 나온 동생들과 부엌에 있던 아내가 모두 깔깔 웃었다. 확실히 이요는 특별히 의식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우리 집에 축제 기분을 불러오는 제사장이다.


이요의 행동과 식구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그 따듯하고 행복한 기운이 나에게까지 전해지는 기분이라 한참동안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히카리로 인해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많은 행복과 웃음 속에서 살고 있을까? 그들의 가정엔 이해와 배려, 그리고 서로를 향한 존경과 존중이 또 얼마나 넘쳐 날까? 오에는 이요가 집안에 '축제의 기분'을 불러오는 제사장이라고 말한다. 생각해 보면 부러울 따름이다. 신체에 어떤 장애도 지니지 않은 우리들은 가족들과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고, 얼마나 많은 스킨십을 나누며, 또 얼마나 웃으며 살고 있을까?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엄마에게 어제 살가운 전화 해 보신 분 손 들어 보시오.)


신은 장애로 인한 약간의 불편함 대신, 그보다 더 많은 웃음과, 행복과, 사랑을 선물로 주시는지도 모르겠다. 이렇듯 오에 겐자부로의 중후기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부분은 히카리. 장애를 지닌 그의 아들이다. 오에는 히카리에게 히카리는 오에에게. 서로에게 빛이 되는 존재. 서로를 밝혀 줄 마지막 등불. 빛. 히카리.


오에 겐자부로는 슬픔을 슬픔으로 마주하지 않았다. 자신의 슬픔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한동안 서서 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그 빛은 홀로 빛나는 게 아니라 작가 자신을 환하게 비추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오에 겐자부로와 아들 히카리-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따뜻한 눈빛이 그대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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