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 [에브리맨]

죽음의 일상성에 대하여

by 민달이

short story


1.

황폐한 공동묘지에 있는 무덤 주위에는 전에 뉴욕에서 함께 광고일을 하던 동료 몇 사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그의 활력과 독창성을 회고하며 딸 낸시에게 그와 함께 일했던 것은 크나큰 즐거움이라고 말해 주었다.


...중략...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또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 때문에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삼십 초, 그리고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하던 세상, 아버지가 창조한 에덴, 구식의 보석상이라는 탈을 쓴 폭 5미터 깊이 12미터밖에 안 되는 크기의 낙원에서 이루어지던 영원한 삶을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것 외에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 빠졌다는 점이었다.

필립 로스 [에브리맨]


2.

그는 묘지를 다시 통과해 차 있는 곳으로 가다 삽으로 묘혈을 파는 흑인과 마주쳤다. 남자는 아직 다 파지 않은 50센티미터 깊이의 묘혈에 서 있다 그가 다가가자 삽으로 흙을 퍼 옆으로 던지다 말고 손을 멈추었다. ...중략... "이런 일은 기계로 하는 줄 알았는데." 그가 무덤 파는 사람에게 말했다. "큰 묘지, 무덤을 많이 파는 곳에서는 기계를 쓰는 일이 많죠. 맞습니다." ...중략... "나는 기계를 안 씁니다. 그걸 쓰면 다른 무덤들이 가라앉거든요. 흙이 꺼져서 안의 관 위로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묘석들을 피하는 것도 간단치 않아요. 내 경우에는 다 손으로 하는 게 더 편합니다. 그게 더 깔끔하죠. 다른 걸 건드리지 않고 흙을 버리는 게 더 쉽기도 하고요. 나는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아주 작은 트랙터만 사용하고, 흙은 손으로 팝니다."

필립 로스 [에브리맨]


3.

스위드. 내가 아직 초등학생이던 전쟁 시절, 뉴어크의 우리 동네에서 스위드는 마법의 이름이었다. 심지어 도심의 오래된 프린스 스트리트 유대인 게토에서 벗어난 지 딱 한 세대밖에 되지 않아, 아직은 고등학교 운동선수의 뛰어난 기량에 놀라 자빠질 만큼 완벽하게 미국화 되지 않았던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름은 마법이었다. 그 특이한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우리 공립 고등학교에는 피부가 흰 유대인 학생도 드물었지만, 시모어 어빙 레보브라는 이름으로 우리 종족에 태어난 이 눈이 파랗고 머리카락은 황금빛인 소년의 얼굴, 턱이 가파르고 왠지 비정해 보이는 그 바이킹 가면 같은 얼굴과 조금이라도 닮은 구석이 있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스위드는 풋볼에서는 엔드, 농구에서는 센터, 야구에서는 일루수로 활약했다. 이 가운데 농구팀만 좀 하는 편이었지만--도시 대항전에서 두 번 우승했고 스위드는 득점왕을 차지했다--학생들은 스위드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기만 하면 스포츠 팀 전체의 운명 같은 것엔 별 관심이 없었다.

필립 로스 [미국의 목가 1]








small talk


1.

필립 로스:

"저는 장례식에, 네 명의 친한 친구들의 장례식에 참석했죠. 하나는 작가였어요... 중략... 조부모님의 돌아가시죠. 곧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죠. 진짜 황당하기 시작하는 건 친구들이 죽기 시작할 때죠. 그건 전혀 예상에 들어 있지가 않아요." 로스는 이 경험으로 [에브리맨]을 쓰게 되었다고 말했다.

...중략...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가며 그들의 약력은 그들의 의료적 약력으로 좁혀집니다. 사람들은 의사의 치료, 병원과 약으로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여기 책에서 일어난 것처럼 의료적 약력과 동일해집니다" 3월에 일흔셋이 된 로스가 말했다. ... 중략... 책의 도입부는 로스의 친한 친구이자 문학적 스승인 솔 벨로의 장례식을 떠오르게 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묘혈을 파고 있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거의 백 퍼센트 로스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어요." 스트랜드가 말했다.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아요. 이용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이용하죠."

[존 프리먼의 소설가를 읽는 방법]



2.

[미국의 목가]의 주인공 시모어 '스위드' 레보브의 모델은 시모어 '시위드' 메이신이라는 실존 인물이다.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로스를 만난 적이 없지만, 현실의 스위드의 삶은 위케이크 고등학교를 나온 것에서부터 유명한 운동선수였다가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까지 소설 속 인물과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물론 결혼 이후부터는 소설 속 인물과 행적이 달라지지만, 그는 소설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놀라운 일이지만, 만일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책에 나오는 것과 거의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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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이해하려고 소설을 쓴다. 뒤집어 말하면, 소설로 쓰지 못한 일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가 두 번째 부인인 영국 여배우 클레어 블룸과의 결혼생활을 다루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반면 첫 번째 부인인 마러릿 윌리엄스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은 소설로 써내기까지 몇 번이나 실패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정신분석 상담을 받은 일은 [포트노이의 불평]으로 이어진다.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죽음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 흔해빠진 죽음에 대해 쓰는 일. 다채로운 '생'의 이야기가 아니라 '흔해빠진' 죽음 말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 죽음은 우리의 어깨에 늘 손을 얹고 있다. 고개만 돌려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우리는 애써 그것을 모른 체 하기 일쑤다.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삶을 살아간다. 누구나 자신만의 복잡성을 지닌 채 길고 지난한 삶의 궤적을 쫒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죽음은 모두에게 공평한 초대장을 보낸다. 각양각색의 복잡한 삶들과 결국엔 모두가 응답하게 되는 단순한 죽음의 부름. 그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주인공이 느끼는 아이러니는 이러하다. 주인공 아버지의 보석상의 이름은 '에브리맨 보석상'. 유니언 카운티 전역의 보통사람들이 그곳에서 다이아몬드를 고르는 것을 떠올리며 아들들에게 말한다. "노동자들이 다이아몬드를 사는 건 큰일이야. 아무리 작은 거라도 말이야. 마누라는 아름다워 보이려고 그걸 낄 수도 있어. 어쨌든 자기 마누라가 그걸 끼고 있으면 그 남편은 단순한 배관공이 아닌 거지. 다이아몬드를 손에 낀 마누라를 둔 남자가 되는 거야. 그의 마누라는 썩어 없어지지 않는 것을 소유한 거지. 다이아몬드란 건 그 아름다움과 품위와 가치를 넘어서서 무엇보다도 불멸이거든. 불멸의 흙 한 조각, 죽을 수밖에 없는 초라한 인간이 그걸 자기 손가락에 끼고 있다니!"


결국 흙 한 줌으로 돌아가게 되는 인간이 불멸의 상징인 '다이아몬드'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까. 일흔이 넘은 작가의 손에서 탄생한 [에브리맨]은 어쩐지 그 의미가 '다이아몬드'보다 더욱 크게 느껴진다. 죽음에 대한 의미를 탐구하고 이해의 길로 들어서기까지 노년의 작가가 마주했을 모든 감정들이 절실하게 와 닿기 때문이다.


또한 묘지에서 돌아가는 길에 바람이 불자 그의 입에 무덤가의 흙이 묻는 장면을 묘사하는 글은 삶을 뒤덮고 있는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는 묘지를 떠나 뉴욕으로 돌아간 뒤에도 오랫동안 입안을 막처럼 덮은 흙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필립 로스는 개인적인 이야기와 허구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평을 받는 소설가이다. 그만큼 개인적인 경험이 소설 속에 많이 녹아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와 [포트노이의 불평]이 그의 결혼생활에 대한 이야기라는 건 잘 알려져있다. 그렇다면 [에브리맨]에서 말하고 있는 죽음의 이미지는 노년의 작가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끌어냈을지 사뭇 궁금해 진다.


요즘엔 경사의 초대장보다 우울한 소식이 점점 많이 들려온다. 어쩔 수 없이 나도 나이가 먹고 있다는 증거 이리라. 해가 갈수록 전해지는 소식들은 그런 류의 것이리라 생각하니 울적한 날들이다. 필립 로스 또한 네 명의 친한 친구들의 장례식장에 다녀오면서 이 소설(에브리맨)을 구상했다고 한다. 책의 시작은 자신의 장례식으로 시작하고 책의 끝은 자신의 묘혈을 파게 될지도 모르는 한 남자와 대화를 나누며 끝이 난다. 이 두 묘지의 장면이 필립 로스의 일상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걸 생각하면 노년의 작가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어지간히도 탐닉했던 듯하다. 덕분에 우리는 죽음이라는 생의 정점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기회를 얻었고 감사할 따름이지만.





한 인간이 태어나 반짝이는 육체를 지니다가 푸석한 껍데기밖에 남지 않았음을 알게 됐을 때 느끼게 되는 감정들이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일련의 공포 속에서도 우리는 노년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인공은 계속 아프고 계속 입원하며 계속 죽음의 그림자를 밟는다. 그와 함께 노년을 보내는 나이 든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 몰라 읽는 내내 불안함을 감출 수 없다. 슬프다. 두렵고 괴롭다. 아아, 이것은 공포소설이 틀림없다. 읽는 동안 너무도 고통스러웠다. 인간이라는 것이, 인간이 저지른 실수라는 것이, 인간으로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인간으로서 맞이할 죽음의 순간들이 말이다. 책을 읽으면 그 모든 순간들이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이해하는 자만이 삶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제 죽음을 피하는 것이 그의 삶에서 중심적인 일이 되었고 육체의 쇠퇴가 그의 이야기의 전부가 되었다.'


'젊을 때는 중요한 게 몸의 외부지. 겉으로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거야. 하지만 나이가 들면 중요한 건 내부야.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아.'


'그가 본 것은 잠들어 있는 나이 든 여자의 높은 돋을새김 윤곽이었다. 그가 본 것은 돌이었다. 그 무겁고, 무덤 같고, 돌 같은 무게는 마하고 있었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해도 그이를 더 살아 있게 할 수는 없었어요. 노년은 전투예요. 이런 게 아니라도, 또 다른 걸로 말이에요. 가차 없는 전투죠. 하필이면 가장 약하고, 예전처럼 투지를 불태우는 게 가장 어려울 때 말이에요.'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대학살이다.'


'종말이 올 때까지 남아 있는 목적 없는 나날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목적 없는 낮과 불확실한 밤과 신체적 쇠약을 무력하게 견디는 일과 말기에 이른 슬픔과 아무것도 아닌 것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일.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그는 생각했다. 이거야 미리 알 도리가 없는 거지.'


케테 콜비츠 [죽음의 부름]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것을 직접 마주하진 않았지만 우리는 주위에서 종종 죽음을 보게 된다. 혹은 한 번쯤 앓게 되는 여러 가지 질병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마음과 정신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글뿐 아니라. 육체의 고통에 대한 글을 써 보는 것도 글의 외연을 넓히는 좋은 방법 중 하나이다. 자신이 경험했던 육체의 고통. 질병이나 사고로부터 얻게 됐던 순간의 이야기들 말이다. 정신과 육체의 고통에 대해 어떤 점이 다르고 비슷한 지를 생각 해 볼 수도 있다. 혹은 '고통' 자체에 대한 이미지를 상기해보고 그에 대한 글을 써보는 일도 좋다.


필립 로스는 자신이 경험한 정신과 육체의 고통 모두를 책 한 권에 녹여 넣은 것 같다. 노년이 되면서 느껴지는 육체의 덧없음과 지인들을 잃으며 겪게 되는 정신적인 충격들. 그것들은 한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도 만들며, 살아온 삶에 대한 감사와 분노를 느끼게도 해 줄 것이다. '삶'이라는 것은 죽음과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죽음'이라는 것은 어쩌면 고통의 범주를 넘어 선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맞이 하게 되는 많은 '생'의 이야기도 즐겁고 유익하지만 아직 맞이하지 못한 '죽음'의 이야기는 또 어떤 것일까를 상상해보는 것도 글쓰기에 많은 도움이 된다. 죽음의 두려움은 오히려 살아있음의 희열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지금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더 없는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일화를 덧붙이자면,

우리가 그의 책을 읽고 '죽음'과 '노년'의 여운을 씻어 내지 못한 채 먹먹한 감정을 지니고 있을 때, 존 프리먼의 깜짝 놀랄 이야기에 괜히 머쓱해진다. '로스가 떨리는 손으로 최후의 순간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 실수일 수 있다. 실제로 만났을 때 그는 건강하고 정정했으며, 방금 운동을 하고 온 양 더플백을 메고 인터뷰 장소에 도착했다. 그의 눈빛은 세고 강렬하다. 그는 죽음에 겁먹지 않는다.'


먼 곳의 작가를 말할 것도 없이 시인 안도현은 '스며드는 것'이라는 시를 통해 아이를 가진 부모들의 눈물을 모두 뽑아낸 적이 있다. 꽃게가 간장에 젖어들며 제가 품은 알들에게 '저녁이야, 끄고 시간이야'라고 말하는 마지막 절을 읽으며 울컥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우리가 다시는 간장게장 못 먹겠다는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시인 안도현은 맛있는 간장게장은 이제 자기가 다 먹을 수 있겠다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일화들은 우리가 작가와 작품을 너무 밀접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 작가라는 사람들은 작품에 오래 빠져들기보다 빠른 전환으로 자신의 작품에서 빠져나와 균형감각을 가져야 새로운 글을 쓸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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