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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블블랙 May 15. 2021

2010 트위터 기생충 오디세이

스마트폰이 대중에 널리 보급될 때쯤의 일이다. 군 전역 후에 복학이라는 멍청한 선택을 한 후, 한 학기도 지나지 않아서 난 공부에 흥미를 잃었다. 나에게 애초에 '공부에 흥미'라는 게 존재 가능한 것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공부가 아니면 다 재미있었던 것 같다. 특히나 재밌었던 것은 IT 유행이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쪽은 새로 나왔다 싶으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최소 계정까지는 만들어 본다.


그중에서도 나를 사로잡은 것은 트위터였다. 단순하고 직관적인, UI와 기능은 스마트폰의 작은 화면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당시는 아직 스마트폰에서 공식적으로 애플리케이션이 있지는 않았지만,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단은 PC 환경에서 웹 브라우저로 트위터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트위터 계정을 팔로워 순으로 정리한 페이지가 있었다. 높은 순으로 100위까지의 계정을 일단 팔로우했다. 아무 트윗도 하지 않고 타임라인을 훑어보았다. 여러 토픽이 있었다. 트위터 이용자들이 대체로 어떤 성격을 갖는지에 대해 대략 파악했다. 뚜렷한 목적이 있지는 않았지만, 오랜 인터넷 커뮤니티 생활에서 배운 기본기였다. 소위 '닥눈삼', 닥치고 눈팅 삼일은 어디서나 통용되는 예의이며 기술이다.


일단은 나도 팔로워 수가 많아야 할 것 같았다. 트위터라는 세상에서는 팔로워 수가 힘으로 보였다. 팔로워 상위 100명의 계정. 그 사람들이 나를 언급하게 하는 것이 아무래도 제일 빠른 출세의 길이었다. 그 사람들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영향력 있는 사람이어서 그렇게 추종자(팔로워)들이 있었다지만 난 아니니까.


당시는 리트윗이 '기능'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앞에 RT를 붙이고 원본 트윗을 그대로 옮겨 적는 것이 리트윗이었다. 지금처럼 터치 한 번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투박했지만, 지금의 리트윗보다 더 강조하는 느낌이었다. 그 사람들이 날 그렇게 날 리트윗 하기 위해서 내가 선택한 것은, 맞장구였다.


새로고침을 반복했다. 그러다 내가 그럴듯한 멘션을 달 수 있는 트윗이 올라오면 급하게 멘션을 달았다. 그러다 보면 간혹가다 내 트윗이 그 사람들에게 리트윗 당하기도 했다. 그럼 내 팔로워 수는 급격히 또 올라갔다. 멘션을 달 때도 여러 전략을 사용했다. 그냥 동조하는 멘션은 달기는 쉬웠지만, 리트윗 당하는 빈도는 낮았다. 빈틈 있는 반론을 제기하는 멘션이 확실히 효과적이었다. 그 사람들은 적당한 구멍이 있는 내 트윗을 리트윗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보완하며 입지를 굳히곤 했다. 나로서는 그저 좋은 일이었다.


'아이패드. 화면만 큰 아이폰이라고 생각했는데 완벽한 오판이었습니다. 확실히 혁신이네요. 더 써보고 사용기 올리겠습니다. #아이패드 #애플'. 내 팔로워 수가 네 자릿수를 넘자 스스로 트윗을 올리기 시작했다. 트위터상에서는 난 이미 IT 전문가였다. 적당히 호응을 얻을만한 트윗을 꾸며 써댔다. 위 구절을 트윗할 때, 난 아이패드가 있지도 않았다. 그냥 다들 쓰길래 썼다. 껍데기만 있는 트윗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리트윗되고, 팔로워 수는 올라갔다.


팔로워 수가 다섯 자리에 달하게 되자, 조금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이거, 돈이 될 수도 있겠다. 막연하게 타임라인을 보고 있자니 팔로워 수에 10을 곱한 만큼 할인해준다는 곱창집이 보였다. 홍대 근처에 있었다. 만만한 친구를 데리고 갔다. 생각보다 음식 가격이 비쌌다. 십만 원이 넘게 나왔다. 하지만 내 할인 금액이 더 컸다. 그저 그 곱창집에 관한 트윗 한 번으로, 돈을 내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요식업에는 조예가 깊은 그 친구도 그 가게의 곱창을 매우 칭찬했다. 상당히 좋은 곱창을 쓴다고 하면서. 그런 곳에서 돈을 내지 않고 나와도 되는 건가? 세상이 이렇게 변했나? 심지어 팔로워 수로 이득을 볼 수 있는 곳은 그 가게만이 아니었다. 전액 할인까지는 아니어도, 50%까지 할인해주는 곳은 이따금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런 곳만 돌아다니면서 맘껏 즐겼다.


지금의 프리랜서라면 누구나 가는 원숭이 로고의 사이트가 있다. 그 사이트가 fiver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홍보 트윗을 해주고 돈을 받는 일을 시작했다. 밥값과 담뱃값은 해결할 수 있었다. 그나마 그럴듯해 보였던 내 계정은 홍보 문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팔로워가 아주 조금씩, 떨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위터에는 돌풍이 불었다. 소위 '맞팔 대란'이라고 불리는 사건이었다. 모 사이트에 자기 트위터 계정으로 로그인만 해놓으면, 로그인한 사람들끼리 계속 맞팔을 시켜줬다. 해당 사이트 개발자가 문제를 느끼고 금방 사이트를 폐쇄했지만, 유사한 사이트가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노년층을 대상으로 트위터 강의를 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방법은 비슷했다. 팔로우를 마구잡이로 하라는 강의였다. 그러면 맞팔을 해줄 거고, 팔로워 수는 자신의 영향력이라고 했다. 자신조차도 쏟아지는 타임라인을 다 소화하지 못할 거면서, 팔로워 수가 자신의 영향력이라는 것이 무슨 개소리인지. 이런 소식들을 듣고 나니 거품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 트위터 계정을 구매할 기업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가격을 조금 더 올려 받고 싶은 마음에, 꽤 공들였던 기억이 난다. 팔로워 수의 백 배에 달하는 돈을 받고 그 계정을 넘겼다. 잠깐의 사치를 부릴 수 있었다. 한 달쯤 후에는 트위터 계정 및 홍보 시세가 급락했다. 거품이 꺼지는 느낌이 들었던 건, 다행히도 당시 내 촉이 좋았던 것 같다.


공허해졌다. 다시 트위터 계정을 만들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 밥값을 충당해주던 수단이 외부 요인으로 인해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무력감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학교에서는 나의 학적을 제거했다. 마냥 한량같이 함께 놀던 선배는 회사에 취업했다. 이제 어디에도 기생할 수 없었다. 트위터에서는 내 존재 자체가 없어졌다. 학교에서도 나를 제거했다. 주변에 같이 놀던 사람들은 모두 정신 차리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으로 마음을 먹었다. 어떻게든 취업을 해야겠다. 돈 버는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하는 그런 나로 남을 순 없었다. 어딘가에 소속되어야겠다. 남들처럼 회사에 다녀야겠다. 그렇게 나는 취준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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