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를 휴학하고 일을 구하려 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났던 것은 인력사무소였다. 재학 중에는 그래도 대학생다운 일을 생각할 수 있었다. 과외나 학원 강사 등. 그 대학에 적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내가 나를 평가하는 기준은 한없이 낮아졌다. 애초에 대학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자존감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나를 객관적으로, 담백하게 봤던 것뿐이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근처 인력사무소를 검색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내가 있던 고시원과 학교 사이에도 몇 군데나 나왔다. 심지어 내가 자주 가던 PC방 건물에도 있었다. 평소에는 인식하지 못했었나 보다. 전화를 걸었다. 오후 다섯 시에 주민등록증을 갖고 오라는 말을 들었다.
다음 날 오후 네 시 반에 주민등록증을 꼭 쥐고 찾아갔다. 생각보다 큰 사무실이었다. 책상에는 뚱뚱한 모니터가 있었다. 책상 너머 의자에는 좀 덜 뚱뚱한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담배를 피우며 신문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 남자는 용기 내서 내뱉은 내 인사를 듣고서, 나를 한번 쳐다보고 신문을 소리 내서 접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한 모금 더 빨더니 눌러 껐다. 처음 와(요)? 네. 민증이랑 통장 저기서 복사해와(요). 통장이요? 통장 안 갖고 왔어(요)? 네. 그럼 민증만. 통장은 내일 갖고 와요.
나보나 나이가 곱절은 더 많은 사람이었으니 반말을 한다 해도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반말도 아니고 존댓말도 아닌 말투로 말하는 건 참 신기한 기술이었다. 그 남자가 말한 미묘한 묵음은 괄호로 처리해봤는데, 그 느낌이 살지 모르겠다. 요새 트렌드라는 반존대랑은 다르다. 어렵지 않게 주민등록증을 복사해서 건넸다. 뒷면도. 네? 뒷면도 있어야 한다고. 확연하게 반말로 바뀌어버린 그 남자의 말투에 난 이유도 물을 수 없었다. 뒷면까지 복사해서 건네고 나서야 조금 마음을 놓았다. 일 처음이에요? 네. 잡다한 일을 해보긴 했지만 여기서 말해봤자 도움이 안 될 것 같았다. 지게차나 그런 거 없고? 네. 일단 저(기) 앉아 있어(요). 네.
일단 저기 앉았다. 적당하게 낡은 가죽 소파는 필요 이상으로 푹신했다. 푹 퍼져있기에는 좋았겠지만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차라리 조금 불편한 의자가 나았겠거니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한 둘씩 들어왔다. 처음인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생각보다 많은 소파는 금방 채워졌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그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신문을 읽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혹은 둘 다 하거나.
와중에 모두가 들어오자마자 하는 행동이 있었다. 바로 커피를 타서 마시는 일이었다. 생수통을 꽂아서 쓰는 냉온수기가 있었고, 그 생수통 위에는 빨간색 맥심 커피믹스가 있었다. 모두가 들어오자마자 종이컵을 하나 뽑더니 커피믹스를 꺼내 흔들더니 종이컵에 부었다. 뜨거운 물을 받아서는 커피믹스 껍데기로 휘휘 젓고서는 입으로 한번 쭉 빨았다. 김이 올라오는 커피를 들고선 아이고 소리를 내며 소파에 푹 기대앉곤 했다. 그 소파는 그렇게 푹 기대앉기 퍽 좋았다.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예에. 예에. 그냥 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무언가 물어보고 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삼분지 일은 이름이 끝끝내 불리지 않았고, 나도 그중에 속했다. 끝났어요. 가세요. 그렇게 첫날은 공쳤다. 못내 먹지 못한 커피가 아쉬웠다.
다음 날 통장을 갖고 다시 인력사무소에 방문했다. 별 말 없이 복사해서 그 남자에게 건넸다. 그 남자 역시 별 말 없이 받았다. 용기 내서 커피를 타려고 냉온수기로 향했다. 학생이야? 예? 예. 근데 여기서 뭐 해. 공부를 해야지. 예. 괜히 머쓱해서 그냥 소파로 가서 앉았다. 나 학생인가? 학생도 아닌데 왜 예.라고 답했지? 사회에서 봤을 때는 휴학생 신분일 것이다. 근데 내가 휴학생이 맞을까.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시 돌아가도 될까. 다시 돌아갈 자격이 있을까. 아무리 자문해도 긍정적인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도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결국 커피도 마시지 못했다. 고시원 방에 들어가서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난 뭐지 대체.
세 번째 날, 들어가자마자 커피를 탔다. 커피믹스 두 봉지를 타서 종이컵에 부었다. 물은 커피믹스 한 봉지보다 조금만 더 많이 부었다. 그네들이 했던 것처럼, 나도 커피믹스 껍데기로 휘휘 젓고서는 입으로 한번 쭉 빨았다. 한 모금 마셨다. 달콤 쌉싸름한 맛이 강렬하게 혀를 감싸더니 식도 위치를 뜨겁게 알려주었다. 잇몸에 텁텁함이 느껴졌다. 소파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그리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텁텁함이 뭔가 다른 것으로 덮인 듯했다. 그 남자가 날 흘끗 쳐다보고는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렸다. 그날은 내 이름이 불렸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큰 버스에 몸을 맡겼다. 옆에 있는 아저씨가 물었다. 학생이야? 아니요. 말끝을 내리며 고개를 돌리자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인력사무소에서 처음 가게 된 일은 물류센터 상하차였다. 체력적으로만 보면 손에 꼽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알고 보니 그 인력사무소는 물류센터 전문인 듯했다. 그 이후로 줄곧 물류센터 상하차 일을 하곤 했다.
그날 그렇게 난, 찢어진 우산을 버렸다. 비는 제대로 막아주지도 못하면서 내 손 한편을 차지하던 학생이라는 찢어진 우산을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