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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amb Dec 15. 2020

커피와 사약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일하는 건물에는 커피 아웃렛이 두 개 달린 커다란 네스프레소 머신이 있는데, 도착하면 제일 먼저 그 머신 앞으로 걸어가는 게 의식처럼 되어 버렸다. 캡슐을 인렛에 밀어 넣고 버튼을 누르면 이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커피 향이 주변에 가득 퍼진다. 이게 좀 느낌이 묘한데, 공사장 옆에서 초봄 은은한 라일락 향기를 맡는 느낌이랄까? 

내려지던 커피가 방울지기 시작하면 머신의 굉음도 점점 줄어드는데, 내가 늘 감탄하는 부분은 그다음이다. 커피의 마지막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머신의 모터 소리도 함께 멈춰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마지막 방울 이후에 소리가 멈추는 것일 수도 있고, 소리가 멈추자 더 이상 방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님)


소리는 사라지고, 향기는 남아있다.
마치 육신은 죽고, 기억은 남아있는 것처럼.


집에도 오래된 네스프레소 머신이 있는데, 크기는 작지만 커피를 추출할 때 나는 소리는 일하는 건물의 머신에 절대 지지 않는다. 십 년이 넘도록 사용했으니 고장이 날만도 한데, 아직까지는 심통 부리는 고집쟁이 노친네 바리스타처럼 그럭저럭 커피를 잘 내려준다. 물론 모터 소리와 마지막 방울은 따로 놀지만... (처음부터 그랬음)



개인적으로 커피 향은 좋아하지만, 마시면서 맛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별로 없다. 아니, 오히려 쓰다고 생각한다. 사극 등에서 사약을 보면 커피와 색깔도 비슷하고 맛도 꽤 비슷할 것만 같다. 사약을 앞에 둔 죄인들은 대부분 일그러진 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만약 커피 향의 사약이 있었다면 사형장의 모습은 꽤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 향긋해.’


하며 죄인은 즐거웠던 시간이나 사랑했던 사람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구경꾼들은 그런 사형수를 보며 '그의 연인이 이 자리에 와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겠지. 인생의 마지막에서 참 행복을 느낀 사형수는 그래도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생각하며 - 쓴 커피를 들이마셨을 때처럼 - 살짝 찡그린 미소를 머금은 채 사망死亡. 왠지 우아한 느낌이 든다. 죄인에게 평온하게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죽기 직전이니 그 정도 배려는 괜찮지 않을까? (나무아미타불)


그건 그렇고, 커피가 맛있다는 게 대체 뭔지 좀 알고 싶다. 허세 아닌가요?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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