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식당'과 슬로우라이프

서울, 오늘 날씨는 맑음

by Aprilamb

최근 몇 주 동안 주중은 말할 것도 없고, 주말에도 일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었다. 하루 온종일 회의를 하며 결론을 도출하거나, 주거니 받거니 자료를 만들어야 하는 일이었는데, 이런 건 성격상 내겐 상당히 힘든 작업 중 하나이다. 특히 네 시간 다섯 시간 계속 이어지는 회의라니, 견뎌낸 것만 해도 기적 같은 일로 뭔가 내게 큰 상을 주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다.
개인적으로 오랜 시간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어서 학생일 때에도 무척 힘들었던 기억인데, 한 문제 풀고 나면 화장실에 가거나, 냉장고 문을 열어 본다든가, 색연필을 깎는다던가, 방 청소를 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로 회의가 길어지면 내겐 불리해질 수 밖에 없는데,

'아, 그래그래, 그렇게 하자고요!'

해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회의라면 한 시간이 넘고 두 시간이 되어간다 해도 어쩔 수 없이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회의가 끝나고 나면 모든 에너지가 방전되어서 그 이후로 몇 시간 동안은 다른 사람과 말도 하기 싫어져 버린다. 얼마 동안 계속 그런 상태였다.

그래서, 연휴로 진입하는 주말 아침 눈을 뜨자마자 이불 속에서 '오늘은 아무 생각도 안 할래.' 해버리고 말았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텔레비전을 켠다.


아무 생각도 안 하는 데는 텔레비전만 한 것이 없다. 오랜 경험을 통해 습득한 지식, 여러 사람을 통해 일반화된 진리. '어떤 방송이 송출되고 있더라도 나는 그것을 볼 것이야.' 의 정신 자세로 소파에 엎어져 화면을 쳐다보았다.

저건 대체 뭐지?

겉으로 보기에는 흔하디흔한 요리 관련 예능인 것 같은데, 뭔가 느낌이 그것들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마디로 상당히 느리다. 서로 쉴 새 없이 대사를 치고, 열두 대의 카메라로 출연자들의 재미있는 표정을 교차 편집해 보여주는 그런 방송이 아닌 것이다.
'세상에 없었던 미션'도 존재하지 않고, 생전 들어보지 못한 퓨전 요리도 소개하지 않으며, 튀김옷과 돼지고기 사이에 공기가 들어가도록 탕수육을 튀겨내는 명쉐프도 없었다. 심지어는 출연자들이 말도 별로 안해. 그들은 묵묵히 혼잣말 - '아이. 칼이 왜 이렇게 안 들어?' 따위의 - 을 하며 제 할 일을 하고, 손님들도 배가 고파서 식당에 들어온 사람들이라 대부분 조용히 음식만 먹는다. 카메라는 건물 천장의 CCTV나 자동차 대시보드 위 블랙박스처럼 정적으로 출연자들을 담고, 출연자들 또한 자리에 서서 신중하게 파를 다듬거나 테이블 청소를 한다. 한 마디로 심심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걸 왜 보고 있어야 하나 싶으면서도 채널 한 번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40분 동안 계속 쳐다보게 되었던 '윤식당'. 시청하는 동안은 세상에서 제일 천천히 가는 시계를 벽에 걸어두고 있는 기분이 었다고 할까?

다음에 또 봐도 오늘처럼 계속 보고 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던 오늘에 딱 어울리는 프로그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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