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 샌프란 생존기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들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는데, 깨어 있더라도 대부분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이건 서울이건 샌프란이건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 곳은 서울의 내 방만큼 시간을 때울 만한 것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보통 방 정리를 하거나 서울도서관 전자책 신간이 나왔다 살펴본다던가 하게 된다. 방도 작아서 정리를 해도 상당히 금방 끝난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나인데, 뭔가 딴짓할 것이 없어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뭔가를 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샌프란시스코가 내게 준 소중한 경험이 아닐 수 없는데, '정말 이러고 있어도 시간이 잘 가는구나'하고 감탄하게 되었다.
오늘은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 해가 지자마자 온 창문을 꼭꼭 닫고 히터까지 켰는데, 목이 간질간질 거려 서울에서 가지고 왔었던 다 먹어버린 분말 쌍화탕이 그리워졌다. 그래서, 아쉬움에 친척들 다 돌아간 거실 한번 다시 내다보듯 냉장고 냉동실을 열었는데,
하나가 남아있었다
아이스크림 뒤 락앤락 비닐 안쪽에 구겨진 채로 말이다. 나는 내일 감기에 걸리지 않아도 돼. 이 시기적절하게 등장한 쌍화탕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다. 커피포트니 이런 것 없으니 라면용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 위에 그것을 올렸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따뜻한 가스레인지 옆에서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싫지 않다. '너무 빨리 끓어버리면 어쩌지'까지는 아니지만 말이다.
커피잔은 아직 설거지 전이니 쌍화탕을 속이 들여다 보이는 유리잔에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
그런데, 졸려
이거 큰 일인데, 난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