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의 탄생과 우주배경복사에 관한 훌륭한 입문서
“우주를 연구할 때 놀라운 일은 우주 초기의 특정한 시점을 우리가 아주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점은 우주 탄생 38만 년 후이고 우리가 정밀하게 관측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순간에 나타난 태초의 빛이다. 이 빛은 우리 우주 전체에 고르게 퍼져 있고 우주의 어느 방향에서든 볼 수 있다. 마치 우리 우주의 바탕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빛을 우주배경복사라고 부른다.”
이강환, <빅뱅의 메아리> 74쪽. 마음산책
기사를 쓰기 위해 도서관이나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검색하다 보면 ‘아직 이 주제에 대한 책이 나오지 않은 거야?’하고 놀랄 때가 있고, ‘이런 주제로 책이 나온 거야?’하고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이강환 선생님의 <빅뱅의 메아리>는 후자에 속하는 책이었습니다. 우주배경복사만 다루는 천문학 교양서가 있다고요? 그런데 그걸 우리나라 사람이 썼다고요? 심지어 내용도 좋다고요? 그렇습니다.
‘우주배경복사’는 우주가 생겨나고 38만 년 뒤, 우주가 식어 투명해지면서 처음으로 우주 공간으로 퍼진 전자기파입니다. 우주가 팽창하면서 이 전자기파의 파장이 늘어났고, 현재는 마이크로파의 형태로 우주 전체에서 관측됩니다(우주만 한 크기의 전자렌지를 상상해보세요! 농담입니다). 전 우주를 배경으로 오고 있는 신호라서 우주 ‘배경’ 복사라고 부르죠. 정말로 갓 태어난 우주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는 ‘빅뱅의 메아리’인 것입니다.
즉 우주배경복사는 빅뱅 우주론의 중요한 증거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주배경복사의 자세한 관측 데이터가 있으면 우주의 모습과 기본적인 물리량까지 측정할 수 있습니다(아,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알게 된 내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보물단지 꿀단지 같은 우주배경복사가 우주의 모습과 물리량을 측정할 수 있게 도와준단 것일까요?
제가 쓸 때도 그렇지만, 보통 우주배경복사에 관한 글은 우주배경복사가 무엇이고 어떻게 발견했는지 정도까지를 다룹니다(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히 얘기하자면, 펜지어스와 윌슨이라는 두 전파천문학자가 골치 아픈 전파천문대의 잡음 문제를 해결하려고 옆 연구실에 전화를 걸었다가 노벨상을 탔다는 전설적 일화가 전해져 옵니다. 안테나에 쌓인 비둘기 똥까지 치우면서 별별 고생을 다했는데 알고 보니 그 잡음이 우주배경복사였단 말이죠). 좀 더 자세하다면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하기 위해 사람들이 몇 대의 인공위성을 쐈는지 얘기하지요.
<빅뱅의 메아리>는 이런 구태의연한 우주배경복사 서사를 넘어서는 훌륭한 책입니다. 이 책은 우주의 역사를 ‘우주배경복사’라는 키워드로 설명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우주론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잘 설명합니다. 제가 도입부에 인용한 문단을 읽어보셔요. 우주배경복사를 이렇게 간결하고 멋지게 설명한 글은 찾기 쉽지 않습니다.
저자는 우주배경복사를 뿌리 삼아 빅뱅 우주론, 암흑 물질, 암흑 에너지에 이르는 개념을 다 설명합니다. 이를 통해 우주배경복사가 얼마나 중요한 과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지요.
이뿐만 아니라 이 책은 우주배경복사의 최신 연구와 성과, 그 목적까지 담고 있습니다. 우주배경복사 지도를 처음으로 작성한 COBE 위성을 시작으로 WMAP과 플랑크 위성이 후속 발사된 이야기, 왜 더 자세한 우주배경복사 지도가 필요한지를 이야기합니다. 데이터를 해석하는 방법론에 대한 이야기도 간략하게 담고 있고요. 이런 데이터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은 과학자뿐이죠. 이래서 과학자가 직접 쓴 글이 소중합니다.
결론적으로, <빅뱅의 메아리>는 상당히 어려운 내용과 최신 연구를 담고 있음에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천문학 연구자답게 학계 내부의 이야기들도 재미나게 버무려서 얘기해줍니다.
별과 우주의 기원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읽어보시길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중학생만 되어도 충분히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는, 이강환 님의 책을 이제야 읽게 되어서 좀 부끄럽고, 동시에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책을 내주셨으면 좋겠네요.
*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책 57~58쪽에서 펜지어스와 윌슨, 디키의 우주배경복사 논문이 1965년 5월 <천체물리학 저널 Astrophysical Journal>에 실렸다고 되어 있는데 제가 찾아봤을 때는 1965년 7월 자 저널에 실렸다고 나온다는 겁니다. 제가 찾은 내용이 잘못되었는지, 5월이 논문 제출 일자인지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네요.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별과 우주에 관심 있는 중학생 이상의 독자.
우주의 탄생, 우주론의 역사에 관해 궁금하신 분.
우주배경복사에 대해 빨리 기사를 써야 하는 어린이 과학잡지의 기자.
함께 읽어볼 만한 책 :
이강환 선생님은 이미 여러 권의 교양서를 번역하고 내신 분입니다. 그의 전작 <우주의 끝을 찾아서>는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본인이 큰 자랑거리로 생각한다고 저자 약력에 쓰셨군요). 커버 디자인도 인상적이라 도서관 지나갈 때마다 눈에 띄는 책이었는데, 나중에 읽어보려 합니다. (아직 안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