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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방통 Jan 19. 2021

새해 목표는 하농(딱히 치고 싶진 않았는데)

하농 39번, “The 12 Major, Minor Scales.”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순 없다. 피아노도 마찬가지다. 처음 피아노 학원의 문턱을 넘은 지 27년 만에 그 명약관화한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올해부터는 하농 연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소리다.


피아노 학원을 다녀 본 사람이라면 아마 고통스러운 연습과 실패의 순간을 각자 가지고 있을 것이다. 자꾸만 반복해서 틀리는 마디, 지루한 체르니 연습곡, 왼손이 불쾌하게 꼬이는 바흐 인벤션, 한 번 연습할 때마다 칠해야 하는 수첩의 사과 그림까지(물론 선생님 몰래 사과를 여러 개 더 칠한 기억도 함께).

내 고통의 에센스는 하농이었다. 지루함이 물리적 고통으로 현현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동산 피아노학원의 3번 피아노방에서 깨달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대충 ‘하농’으로 부르는 악보의 정식 명칭은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를 위한 60개의 피아노 연습곡(The Virtuoso Pianist in 60 Exercises)>으로, 프랑스의 피아노 교수였던 샤를-루이 하농이 만들었다. 이 연습곡은 같은 음형을 가진 마디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손의 긴장을 풀고 다섯 손가락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지금 이 악보를 처음 봤다면 라 몬테 영이나 필립 글라스의 선구자라고 농이라도 쳤겠다만,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하농은 아무런 음악적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음표의 기계적 나열이었다. 마디마다 반복되며 그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다시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이 음표에는 강약도 없고 의미도 없다. 완만한 산을 닮은 하농 악보의 모습은 주말마다 게임도 못하게 나를 산으로 끌고 가던 아버지를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 보니 소나티네나 체르니보다 하농 연습할 때 훨씬 많은 가짜 사과를 칠했고, 나중에는 아예 능동적 사보타주의 형태로 하농을 무시하기도 했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려는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 물론 하농에서 음악적 의미를 찾지 못한 것은 내 식견이 좁은 데서 기인할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초연자인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를 놀리려는 의도로 3악장에 하농의 음형을 그대로 집어넣기도 했다. 들어보면 ‘매우 음악적이다’.)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2번 3악장 알레그로. 1분 42초부터 2분 1초를 들어보자. 


이랬으니 어른이 되어도 하농은 결코 치고 싶지 않았다. 바쁜 어른에게 피아노는 순수한 즐거움을 위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습의 필요성은 그대로여서, 대신 다른 연습곡을 찾아보기로 했다. 쇼팽과 스크리아빈 등 많은 작곡가들이 쓴 ‘에뛰드(연습곡)’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브람스의 ‘51개의 연습곡 WoO 6’은 이들보다는 하농에 가까웠지만, 하농보다도 더한 물건이었다. 첫곡부터 3-4 폴리리듬으로 시작해 그 뒤로는 4-5, 5-6, 6-7 폴리리듬이 나오는데, 상상만 해도 그 틈에서 꼬일 내 손가락이 가련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바흐 인벤션의 1번, 13번을 포함한 몇 곡으로 손가락을 풀었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하농처럼 오른손과 왼손을 균형 있게 사용하고, 거기다 재미까지 있으니까.


브람스의 51개의 연습곡, WoO 6의 앞 일부분.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결국에는 하농을 연습해야 할 현실적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문제는 도레미파솔라시도 순으로 차례로 올라오거나 내려오는 스케일 연주였다. 스케일을 고르게 칠 수 없으니 모차르트부터 드뷔시까지 어떤 작품을 연주해도 삐걱이는 부분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결국은 하농을 연습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기에 최근 지인 한 분이 하농 연습을 하고 새로운 피아노 인생을 시작했다며 추천하신 것도 내 가벼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분은 하농 39번의(그렇다. 하농에는 1~5번뿐만 아니라 39번도 있다) 스케일을 연습하는데 하루는 올림표 음계 스케일을, 다음날은 내림표 음계 스케일을 전부 치면서 손을 풀고 손끝을 단단히 다진다는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새해의 피아노 목표는 ‘하농 39번을 다 쳐보기’로 정했다. 39번에는 12개의 장조 스케일과 나란한조의 단조 스케일 두 개까지 총 36개의 스케일이 실려 있지만, 우선은 장조 12개만 연습해보기로 했다.

스케일 연습은 손가락과 건반 사이에서 최소공배수를 구하는 느낌과 비슷하다(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건반을 순서대로 자연스레 연주하려면 엄지 위로 손가락이 주기적으로 넘어가야 한다. 이때 3번과 4번 손가락을 차례로 넘기면 옥타브마다 손가락이 ‘도’ 음을 짚게 되면서 규칙적인 움직임으로 스케일을 연주할 수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쉽게 들리지만 막상 쳐보면 상당히 혼란스럽다. 왼손과 오른손의 움직임이 다르고(두 손은 건반과 다르게 대칭적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상행과 하행의 움직임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하루를 통째로 투자한다고 쉽게 익힐 수 있는 이 아니다. 근육이 기억할 때까지 꾸준한 시간을 쌓아야 한다. 


지금은 하농 연습을 다시 시작한 지 한 달여가 흘렀다. 손가락이 나도 모르게 순서에 맞게 건반을 짚으며 내려갈 때, 한 번도 맞게 친 적이 없던 스케일을 처음으로 완주할 때는 내심 뿌듯하고 탄성이 나온다. 이런 방식으로 쇼팽이, 리스트가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구나 싶다.

뭐, 그렇다고 해서 연습이 재미있어지는 건 아니다. 마지막 사과를 칠한 지 20년이 지났지만 하농은 여전히 지루하고, 나는 아직도 가장 단순한 조표 3개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있다. 하농 연습은 여전히 기계적 움직임으로 가득한 근대적 연옥의 굴레처럼 느껴진다. 연습이 끝나고 찾아오는, 사람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순 없고 니가 아무리 찾아봤자 지름길은 없다는 깨달음도 여전하다. 연습이 재미있고 깨달음을 주는 경지에 다다르려면 평생을 수련해도 모자라지 않을까. 그나마 20년 전과 비교해 바뀐 게 있다면, 이 연습의 결과는 어떻게든 손가락의 기억으로 남아 조금씩 쌓이지 않을까 하는 희망 정도겠다.


하농 39번. 이런 악보가 조성을 바꿔가며 열 페이지에 걸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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