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방통 Dec 31. 2020

2020, 올해의 피아노

올해는 어떤 곡과 함께 했냐면요

올해의 가장 중요한 일은 피아노였다. 그러니까, 내 삶의 궤도에 피아노가 다시 들어온 것. 피아노를 다시 연습하기 시작했고, 혼자서 하는 연습에 부족함을 느껴 피아노 학원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으며, 그러다 보니 피아노도 사버렸다. 모두의 머리 위에 구름이 끼었던 올해, 집에 갇힌 시간 동안 색채와 리듬을 더해준 것은 피아노였다. 진실로.



3월 31일부터 동네 피아노 학원에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첫 레슨 곡은 알베니즈의 코르도바(Cordoba, Chant’s d’Espagne, op. 232-4). 대학생 때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많이 듣고 좋아했던 곡이라 가져갔던 건데, 흔하지 않은 레퍼토리라고 선생님이 흥미로워했다. 뿌듯했다.

피아노 레슨을 받으면서 레퍼토리를 정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세웠다. 한 번에 두 곡을 연습한다면 하나는 바흐를, 나머지 하나는 다양한 작곡가를 쳐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좋아하는 바흐 작품을 꾸준히 연습하면서도 한 스타일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연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네 번의 코르도바 레슨이 끝난 후에는 바흐의 인벤션 4번과 함께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7번(K. 309)를 가져갔다. 모차르트는 훨씬 치기 까다로웠다. 어린아이의 웃음 같은 해맑음을 내 둔한 손가락으로 따라가기 힘들었다. 흥미도 붙지 않아 결국 3악장까지 치진 못했다.

여름에는 오랫동안 혼자 붙잡고 애쓰던 곡을 가져갔다. 브람스의 발라드(Ballade, Op. 118-3) 발라드와 바흐의 이탈리아 협주곡 1악장(Italian Concerto, BWV. 971)이었다. 특히 7번이나 진행된 브람스 수업은 힘들었지만 올해의 가장 뿌듯한 시간이었다. 애초에 내가 치기에 버거운 난이도의 곡이었는데, 함께 악보를 보면서 곡을 익히는 법을 배웠다. 코드를 깔아놓고 악보를 쳐보면서 어떤 화성적 분위기에서 곡이 전개되는지를 느껴보았고, 내성과 외성을 번갈아 치면서 중요한 멜로디(살리고 싶은 멜로디)를 찾아보았다. 강하게, 세게만 치려다 보면 연주가 기계처럼 자연스러움을 잃고 굳어지니 팔꿈치와 손목의 힘을 빼라는 조언도 들었다. 다 체화하지는 못했지만 뼈와 살이 되는 가르침이었다.

그 후에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발라드와는 영 반대처럼 보이는 이탈리아 협주곡도 1악장을 마무리지었다. 약했던 스케일이 예전보다 나아진 것 같다. 이탈리아 협주곡 2악장을 레슨 받다 12월이 오고 코로나로 학원이 문을 닫으면서 한 해가 마무리되었다.



이렇게 총 19번의 수업을 들었다. 쉽게 만든 시간은 아니었다. 2주에 한 번씩 나가려 애를 했지만, 내가 바쁘거나 선생님이 바빠지기도 했고, 코로나19로 학원이 문을 닫아 한 달 넘게 쉬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두 달 반 만에 겨우 레슨을 마무리지은 곡도 있고(이탈리아 협주곡 1악장), 다 치지 못한 곡도 있고(모차르트), 아예 한 번도 제대로 레슨 받지 않고 그만둔 곡도 있다(바르톡의 소나티나를 자암깐 쳤다).

그래도 한 해 동안 꾸준히 학원을 다닌 건 정말 뿌듯할만한 일이다. 김소영 선생님의 <어린이라는 세계>에 취미로 피아노를 시작한 어른들이 2~3달을 넘기지 못하고 관두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가 나왔다. 학원에서 원장 선생님 마주칠 때마다 나한테 꾸준히 나온다고 엄청 칭찬을 하셔서 많이 쑥스러웠는데, 정말로 오래 다녔기 때문이었던 거다! 웃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 이 글을 읽는 어른들아! 반성하라!!


물론 몇 곡의 레슨을 마무리했다 해서 연습이 끝이라는 건 아니다. 레슨을 받을 때만큼 연습하지 않으면 실력은 당연히 퇴보한다. 오히려 레슨의 끝은 한 작품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어젖힌 것에 불과하다. 아마 지금 다시 코르도바나 브람스 발라드를 친다면, 레슨을 마친 직후의 절반 정도도 제대로 칠 수 없으리라.

이런 현실은 꾸준한 연습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든다는 악기 연습의 핵심 사상을 어지럽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평생 같은 곡만 칠 건 아니니까. 내 앞엔 아직 손가락으로 간질여보지 않은 수많은 음악이 남아있지 않은가.

피아노가 내 삶을 얼마나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는지, 나아가 내가 삶을 보는 시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생각하면서 혼자 내년 계획을 세워본다. 내년에는 바흐를 더 깊이 칠 것이다(실은 비밀 계획이 있다). 백건우님의 리사이틀에서 들었던 슈만 작품도 레슨 받으려 한다. 브람스 Op. 118의 다른 소곡들도 한둘 더 치고 싶고, 회사 선배와 함께 하려던 합주도 더 연습하고 싶다. 피아니스트도, 음악가도 아니지만 나는 칠 수 있는 피아노 작품이 좀 더 많고, 외우는 악보가 좀 더 많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것이 얼마나 철없는,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릴 지도 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렇게 잘 살고 있다.


그러면 내년에 새로운 음악과 함께 또 만납시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수에서 조성진을 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