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롱~ 나는 봤지롱~
숙소는 여수시청 근처, 번쩍이는 LED가 붙박인 모텔과 술집이 즐비한 거리에 있었다. 이곳에서 바닷가를 따라 15분 정도 걸어가면 산 한 면을 통째로 깎아 만든 웅장한 예울마루 공연장이 나온다. 환한 낮에 이곳에 서면 아름다운 남해를 볼 수 있지만, 내가 모텔에 짐을 풀고 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마른 가지들이 서로 비비면서 내는 소리를 들으며 조성진의 리사이틀이 열리는 공연장으로 향했다.
코로나로 공연을 거의 보지 못했지만, 하반기에는 운 좋게도 피아노 리사이틀을 세 번이나 다녀왔다. 백건우의 슈만과 조성진의 성남, 여수 공연이었다. 조성진의 공연은 처음 열린 공연들이 원체 빨리 매진된 터라 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앵콜로 전람회의 그림 전곡을 해줬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면서 배가 아파오기 시작했고, 자꾸만 새 공연 일정이 추가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처음에는 애인과 함께 성남 공연을 갔는데 깊게 집중하진 못했던 것 같다. 연주곡들이 대부분 익숙지 않았던 데다, 체력도 떨어진 상태라 그랬던 것 같다. 조성진은 앵콜에서 리스트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연주했는데, 다 듣고 난 후에는 애인과 나 둘 다 거의 탈진 상태까지 갔으니. 이후 추가된 공연에서 브람스와 쇼팽을 연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회사 선배가 어쩌다 표를 구해주는 바람에(한국 시리즈 티케팅으로 다져진 실력이었다. 정작 선배는 한국 시리즈 티케팅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혼자 여수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정말 대단한 연주를 들으면 말이 안 나온다. 숨이 쉬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압도되어서 연주가 끝나고 나서도 의자에서 일어날 수 없다. 박수를 치기까지 숨을 고르고, 정신을 차릴 시간이 필요하다. 조성진의 여수 연주회가 그랬다.
공연을 연 브람스의 인터메조도, 엄청난 집중력을 보여준 1부의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도 좋았다(한 번 실연을 접한 후라 훨씬 잘 들렸다). 그러나 핵심은 역시 2부의 쇼팽 스케르초 전곡이었다. 조성진의 스케르초를 들으면서 왼손과 내성에 그렇게 많은 멜로디가 숨겨져 있는 줄 처음 알았다. 음악을 켜켜이 드러내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았다. 음악으로 가득한 음악, 그 다양한 멜로디를 펼쳐 보이는 연주였다.
앵콜 첫 곡은 그 유명한 녹턴이었는데(그래서 지금이 투어 마지막 공연이라는 실감이 났다),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어려운 곡을 쉽게 치는 정도가 아니라 원래 완성된 형태의 음악이 있어 그걸 풀어내는 듯한 연주.
들으면서 천장을 올려다봤는데,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어떤 사물을 한참 바라보면 그것이 시각적 아티팩트로 조각나 추상성을 획득하는. 음악을 들으며 그런 기분을 느꼈다. 전혀 다른 세상에 도착한 감각.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경험이었다.
대나무 아래서 고양이들이 찬바람을 피하는 산책로를 되짚어 돌아왔다. 감흥을 채 소화시키지 못해서 짧은 산책로 중간중간 멈춰 서서 눈으로 검은 바다 너머를 좇았다. 맨 귓가에 멀리서 자동차가 웅웅 대는 소리가 들려오는데도 음악이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산책까지 공연 경험의 일부로 묶어야 한다고 느꼈다.
한참을 더 있다 산책로를 걸어 나오니 낮은 대나무 너머로 숙소가 보였다. 모텔 건물 주변에 둘러놓은 LED 띠가 시시각각 오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천국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슷한 비현실적인 세계를 다녀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시 현실에 발 디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