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e, "Absolution" (2003)
얼마 전 친구가 ‘뮤즈 뭐가 멋있다고 옛날에 그렇게 쳐들었던 거지 하고 3집 다시 들었는데 개좋음’이라는 소감을 남겼다. 그 글을 보면서 깨달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뮤즈(Muse)의 <Absolution>은 내 인생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고. 부끄러워하지 말자고. <Absolution>은 최고의 앨범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hUcGw-ot0&ab_channel=Robert74231
대개 <Absolution>에서는 “Time Is Running Out”이나 “Stockholm Syndrome”, “Hysteria”가 대표 트랙으로 꼽힌다. 이 곡들이 보여준 캐치한 멜로디와 그루비한 베이스 라인, 인상적인 기타가 뮤즈를 2000년대 락음악씬의 메인스트림에 올려놓았지만, 이 앨범의 사운드를 담당하는 다른 축인 피아노를 빼놓고는 <Absolution>를 제대로 얘기할 수 없다. 그만큼 뮤즈에게 피아노는 중요하다.
예를 들어, 피아노는 첫 트랙 “Apocalypse Please”부터 전면에 나오며 앨범 전체의 컨셉(으아아-우리는-속고-있고-다-망할-거야)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피아노는 음악적으로도 명민하게 쓰이고 있는데, 불길한 군화의 행진 인트로에서 예측되는 리듬과 다른 방향에서 곡이 시작되며, 첫 등장 화음의 베이스가 근음이 아니라는 것이(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인트로처럼) 곡 전체의 긴장을 훨씬 높인다.
또 피아노가 중요하게 나오는 곡은 앨범 후반부에 실린 “Butterflies and Hurricanes”로, 기타로 시작해서 피아노로 넘어가 화려하고 과도한 아르페지오 카덴차를 선보인 다음 다시 기타로 돌아오는 A-B-A 구조이다. 뮤즈의 프론트인 매튜 벨라미는 이미 2집에서부터 피아노를 인상적으로 썼는데(“Space Dementia”를 들어보라), 3집에서는 기타와 함께 앨범의 사운드를 받치는 기둥으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9qy42dnBnOg&ab_channel=KitMG
락 음악에서 피아노는 기타만큼 눈에 띄는 악기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폴 매카트니, 프레디 머큐리, 빌리 조엘, 엘튼 존에 이르는 대단히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뮤즈의 피아노는 이들의 전통에서 비껴나가 있다. 매튜 벨라미의 레퍼런스는 클래식 작곡가들이다(이런 점에서 프로그레시브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Butterflies and Hurricanes”는 라흐마니노프의 오마쥬에 가깝고, 뮤즈는 이후의 앨범에서는 아예 쇼팽의 녹턴을 직접 연주하기도 했다. 낭만파의 유산을 이용해서 그렇잖아도 거대한 에고를 유감없이 부풀릴 수 있었던 것이다.
뮤즈가 피아노를 썼다는 점 때문에, 그리고 내가 기타를 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뮤즈는 내 피아노 레퍼토리에 합류했다(보통은 일렉 기타를 연습하겠지만, 나의 완고한 보수함은 일렉 기타를 허락하지 않았다). 여러 곡을 피아노로 두들겨 보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연습한 앨범은 3집 <Absolution>이었다. 아마 피아노 솔로만으로도 곡의 전체 얼개를 재구성할 수 있을 만큼 피아노가 전면에 등장하는 곡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친구와 밴드를 한다면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혼자 치곤 했던 것이다.
한동안 듣지 않다 다시 피아노를 연습하며 뮤즈를 틀어보고 깨달았다. “너희는-속고 있고-지구는-망할-것이다-으아아”로 요약될 그 붕괴와 자학적 감성은 불안한 사춘기의 내 마음을 적확히 파고들었고, 그때 들은 음악은 이제 부끄럽거나 싫다고 해서 떨쳐낼 수 없는 나의 일부분이 되어버렸다는 것.
물론 나는 그 후로도 한 번도 뮤즈의 음악을 커버해보지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혼자 연습실에서 저 망치 같은 화음들을 때려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