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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충만한삶 Aug 23. 2019

사회적 안정과 개인적 고통,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멋진 신세계’를 읽고

여기 멋진 신세계가 있다. 계급이 존재하지만, 자신의 계급에 만족하고, 반복되는 일을 하지만 그 지루함을 인식하지 못하고, 알약 하나면 모든 걱정, 근심, 불안을 내버릴 수 있고, 삶의 의미로 고뇌하기보다 순간순간의 쾌락을 좇으며 사는 세계, 나이를 먹지만 젊음은 변하지 않는 세계. 나와 누군가를 비교할 필요도 없고, 사랑에 가슴 아파할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이 풍족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세계. 단, 진정한 나 자신만 버리면 되는 세계. 당신은 이 세계로 가고 싶은가?

이 멋진 신세계 밖에는 야만인들이 산다. 불결하고, 무지하고, 모든 것이 부족하고, 늙고, 추하고, 병든 세계. 단, 이 세계 안에서는 나의 자아가 살아있다. 고뇌하고, 생각하고,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을 자유가 있는 곳이다.

올더스 헉슬리가 만든 멋진 신세계와 야만인들의 세계는 너무나 극과 극이라 둘 중에서 한 곳만 갈 수 있다면 어느 곳에 갈 것인가?라는 물음을 나 자신에게 던져봤다.  사실 답하기가 어려웠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게 편하다고 느낀 적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세계 안에 진정한 나는 사라지고 없는데, 그런 삶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살아갈만한 가치가 과연 있을까?

“나는 불행해질 권리를 주장하겠어요.”

이 책이 출간된 년도는 1932년도이다. 무려 90년 전에 쓰인 책인데, 작가의 통찰과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동안 많이 봐왔던 미래와 관련된 영화들이 숱하게 오버랩되기도 했다. 다 이 소설 덕에 얻은 플롯이 아닐까 싶다. 유전자가 미리 결정되고, 그 유전자에 따라 미래의 능력과 재능과 신체 수치, 얻을 수 있는 직업까지 결정된 사회를 그린 '가타카'가 떠오르고, 실제 세계와 가상의 세계가 뒤바뀐 그리고 그걸 알약을 통해 선택할 수 있던 '매트릭스'도 떠오른다. 역시 알약으로 감정을 통제받는 '이퀼리브리엄'도 떠오르고, 영드'블랙 미러' 에피 중 타인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나의 계급이 결정되고, 계급을 올라가려는 노력이 무산되고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오히려 해방감을 느낀 주인공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블랙 미러 에피는 사실 해피엔딩이라고 보긴 애매하지만, 다른 비슷한 소재를 다룬 영화들의 경우는 이 모든 인간성을 억제하는 시스템에 대항해 주인공들은 싸우고, 승리를 쟁취한다. 그러나 이 멋진 신세계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멋진 신세계에도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과 일체감과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행복을 주는 약 '소마'복용을 거부하고 뭔가 다른 어떤 것이 자신의 안에 있지는 않는가 하는 이들이 있다. 몇몇 인물들이 그런 특성을 보여주어, 마지막 반전이 있진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주인공인 버나드도 그런 존재였으나, 어릴 때부터 숱하게 세뇌당한 그 틀을 깨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나중에는 야만인 존을 자신의 성공을 위한 도구로 삼기도 하고, 전에는 비판했던 그들 가운데 인정받았다는 성취감에 도취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나중엔 친구 헤름홀쯔처럼 용감하게 병원에서 싸우던 존을 돕지도 못하고 할까 말까 어버버 하는 찌질이에 불과했다.

친구인 헤름홀쯔는 그에 비하면 훨씬 나았다. 문제의식도 있고, 시와 같은 감정적인 느낌을 표현할 줄도 알았다. 일련의 사건으로 이단자 비슷하게 취급받아 섬으로 보내질 때도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역시도 뿌리 깊이 박힌 신세계의 관념들을 뿌리치지 못하고, 존이 읽어주는 셰익스피어의 구절들을 존에게 모욕적으로 느껴질 만하게 웃어재낌으로써 그 한계를 넘지 못했다.

반전이 있다면, 이 멋진 신세계의 서부 유럽 주재 세계통제관인 무스타파 몬드가 사실 금지된 모든 문화 세계에 대해 알고 있고 그 가치를 인정하고, 한때는 버나드나 헤름홀쯔처럼 이 세계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역시도 아름다운 문학작품들과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것들보다 안정적인 사회가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멋진 신세계를 유지시키는데 노력할 뿐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인간은 존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태어났지만 사고로 야만인 세계에 살아남았던 린다의 아들이다. 아버지 역시 신세계 사람이지만, 사실상 멋진 신세계에 엄마 린다가 계속 살았다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청년이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대부분 불임이지만, 불임이 아닌 여성들은 정기적으로 '세척'을 함으로써 아이가 생길 여지를 없애고, 그도 아니면 낙태병원이 존재해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태어날 수 없게끔 만든다.

이 세계에서 어머니나 아버지는 말도 안되는 어이없는 단어이고, 특히나 어머니라는 단어는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다들 혐오감과 역겨움을 느끼는 단어라 어--라고 표현한다. (해리포터에서 볼드모트가 두려워 볼---라고 표현하는 듯이) 우리에게 어머니란 단어는 아름답고 정답고 숭고한 이미지인데 반해, 어머니가 없는 이들에게 어떤 본능적인 그리움이라도 느낄까 세뇌된 탓이다.

여하튼 존의 인생은 고통이었다. 어머니 린다는 정조관념 같은 게 없었기에 자유로운 성생활을 했고(멋진 신세계에선 당연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남편들을  잠시 빼앗겼다 느낀 여성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하고 이 와중에 말리던 존도 큰 상처를 받고 트라우마를 얻는다. 린다를 만나러 온 남자들에 의해 내쫓기고, 마을 사람들에겐 같은 종족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멸시받아온 그는 린다가 자주 얘기하던 멋진 신세계에서 온 버나드의 제안을 받아 신세계로 향한다. 과연 존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존은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살아왔지만 스스로 사유하는 인간이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고민할 수 있는 자유,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자유가 있던 존이, 생각 없이 쾌락만 좇으며 사는 이들 속에서 행복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어머니는 신세계로 돌아온 이후에 소마에만. 취해 살다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음으로써 존을 더 힘들게 만들었고, 그나마 그를 조금이나마 이해했던 버나드와 헤름홀쯔와 함께 추방당할 선택도 거부당한다.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했으나, 그의 고행장면을 재밌게 여긴 신세계인들은 혼자 있을 자유를 허락치 않고, 끊임없이 괴롭힌다. 그의 마지막 선택은 필연이었을까?

처음에는 그래, 그래도.지저분하고 아픔과 고통만이 가득찬 세계보다는 신세계가 낫지 않겠어? 생각할 자유만 살짝 포기하면 살기 편하잖아? 싶다가도 아냐 그건 사람이 사는 게 아니지..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게 있는데, 그걸 박탈당한다면 살아있을 이유가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가지고 독서모임도 했는데 다양한 생각들을 접하면서 의문들도 늘어갔다. 인간이란 존재는 행복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행복하고 안정된 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아니, 애초에 행복이라는 게 뭐지? 신세계인들이 느끼는 게 진정한 행복인가 단지 쾌락에 불과한 것 아닌가? 행복하기만 하다면 인간은 성장할 수 있을까? 비극을 통해 성장하는 경우가 훨씬 많지 않나.. 많은 질문들과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다.

굿 라이프에서 최인철 교수님은 행복이란 단순히 순간의 편안하고 즐거운 쾌락과 같은 의미도 있지만, 봉사를 통한 뿌듯함이나 삶의 의미를 느끼며 사는 것, 책을 통한 여운 같은 것도 행복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광의의 의미에서의 행복이라면 당연히 신세계인들은 온전한 행복을 느낀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가 부족하다는 상실감을 느낄 법한데, 그러한 불안마저 소마라는 알약으로 없애버리고 많이 그럴 겨를이 없겠지..

이 책을 읽으며 '평균의 종말'이 떠올랐다는 분도 있었다. 사실 신세계인들은 획일적인 부품에 불과한 평균주의자들의 인간상에 딱 적합한 사람들이다. 작가도 그걸 염두에 두고 쓴것이 확실한 게, 신세계는 헨리 포드가 거의 신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오 주여 라는 말 대신 오 포드님이라 하고 기원전 **년도 대신 포드 기원 **년도라고 쓴다. 특히나 골턴이 주장한 평균주의와 그에 따른 계급이 주춧돌이 된 사회가 바로 신세계인 듯하다.

린다의 태도도 의아하다 생각하신 분도 있다. 실험실 병 속에서 세뇌를 받으며 태어난 신세계인인 린다가 사고로 아이를 낳게 되고 키우는 상황이... 좋은 엄마는 아니지만 곳곳에 모성애를 보이는 장면들이 좀 이해가 안 간다는 것. 나도 의아했지만, 실험실에서도 그 본능적인 엄마로서의 감정까진 말살시키지 못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완벽하게 맞춤 제작된 사람이라도 일말의 모성애가 남아있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었을까? 그러리라는 추측이었을까?사실 모성이란 것은 이미 DNA에 새겨져 있어 없애지 못하는게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계급이란 문제도 생각하게끔 했다. 계급이란 사회에서 없어질 수 없는 것일까? 현대사회도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가. 요즘에는 흙수저니 금수저니 이런 단어까지 동원되어 가면서 표현되듯 말이다. 조던 피터슨의 열두가지 인생의 법칙에도 이런 부분이 재미있게 설명되어 있다. 바닷가재처럼 단순한 생물도 서열구조가 존재한다는 것. 수컷들은 싸움에서 이기면 세로토닌이 분비되고 세로토닌 수치가 높으면 몸이 쫙 펴진다. 인간들도 자신감 있는 사람은 어깨를 쫙 펴고 다니고, 자신감없는 사람들은 어깨를 구부정하게 다니지 않는가.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외적인 모습을 보고 타인의 서열을 추측하고, 그에 맞게 대한다고 한다. 그래서 조던 피터슨 교수님은 어깨부터 쫙 펴라고 (숱한 지식과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 이야기한다. 자연은 원래 불평등하고, 인간세계도 그러하다. 계급 없이 모두가 평등한 사회라는 것이 존재할 수는 있을까? 멋진 신세계에서 그런 실험을 해본 적이 있다. 두뇌와 신체가 우수한 알파집단만이 있는 사회였는데, 모두가 같은 일을 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는가. 결국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있고, 누군가는 그것을 해야만 하는데, 중요치 않은 일을 하는 알파들은 직무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배층 역시 그 지위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된다. 계속되는 폭동과 내란으로 그 사회는 결국 자멸하고 남은 사람들은 제발 자신들의 세계를 누군가 맡아줄 것을 원하게 된다. 그런 실험을 통해, 신세계는 아예 다른 계급의 사람들을 따로 만들어내고, 계급사회를 구조화해서 사회시스템의 안정을 가져왔던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4차 산업혁명이 가시화되고, AI가 인간보다 뛰어나거나 혹은 인간의 대부분의 일을 대체하게 되면 앞으로는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가. 디스토피아를 걱정하는 사람들 가운데 바로 이 '멋진 신세계'라는 고전이 대두하게 된다. 인간의 감정이란 좋은 것이면서도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파멸이 일어났는가? 그렇다면 세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런 노력이 없으리란 법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가치를 가지게 되는지는 미지수이다.

우리는 앞일을 내다볼 수 없다. 단지, 이런 통찰을 가진 책들을 통해 추측해 볼 뿐이다. 불확실한 미래 앞에 서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꼭 읽어봐야 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알약과 유리병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언론이나 영상을 통해 생각 없이 자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도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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