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줍잖은 감성팔이가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스무살, 대학입시를 위해 일년간 재수를 했다. 그 당시 학원에서 가르치시던 한 선생님(아마 국어과목이었던듯)이 수입의 5%는 무조건 기부를 해야한다고 강조하셨다. 자신 또한 5%로 시작해 점차 늘려가고 있다고 덧붙이시면서 말이다. 아마도 그 이유나 목적을 설명하신 것도 같은데 그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이상하게도 이 5%라는 수치는 마음속에 그리고 머릿속에 콱 박혀서 수입이 생기면서부터 나도 기부를 해야한다는 내면의 소리가 되어 그동안 기부를 계속 해오고 있었다.
다만, 그때도 그리고 얼마전까지도 기부 이후의 영향을 생각해보진 못하고 있었다. 나는 기부라는 행위를 했으니까 됐어라는 어느정도세상에 대한 부채의식같은 것을 해소하며 이 세상의 불쌍한 사람들을 일부라도 돕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았던 것 같다. 실상은 내 계좌에서 매달 기부액이 제대로 빠져나가는지 체크도 하지 않았으면서도..(부끄럽다ㅜㅜ) 그리고 지하철이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나는 고민을 하곤했다. 저들을 도와줘야 하나? 도와주는 게 과연 그들을 위한 일일까? 혹은 그들을 도와준다해서 사실은 다른 폭력조직들이 그 돈을 갈취해가는 것 아닌가?(그 당시 그런 소문이 돌았었다) 등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내가 돈을 준 이후는 어쨌든 알 수 없으므로 나는 도와줘야 하는 게 맞는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하긴 했었다.(이 역시 실행은 거의 없이 생각만..)
[냉정한 이타주의자]라는 책이 그당시에 있었고, 내가 그걸 읽었더라면 저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됐을텐데라는 생각이 책을 읽는 순간 들었다. 책에서도 언급했듯이 많은 사람들이 감정적인 요소로 기부를 시작하고, 그런 요인이 기부자를 늘리는 데 효과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진짜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그리고 나의 도움이(그것이 적은 금액일지라도) 실질적으로 혜택을 줄 수 있도록 하려면 감정적으로 아무데나 기부를 해선 안될 것이다. 우리의 시간과 돈은 한정되어 있고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은 한두군데가 아니다. 냉정하게 어느 곳에 기부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지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면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래프의 추정치로 보면 콘돔배포가 카포시 육종 치료보다 100배 더 큰 혜택을 줄 수 있고, 항 레트로바이러스 치료에 기부하면 콘돔배포보다 2.5배 더 큰 혜택을 줄 수 있다. 내구성이 좋은 살충모기장을 구입해 보급하는 말라리아퇴치재단에 기부하면 카포시육종 치료사업에 기부했을 때보다 500배 더 큰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
-냉정한 이타주의자 P.79-
아, 그리고 우선 우리가 기부를 할 만한 재정상태인가가 궁금하실 분들을 위해, 전지구상에서 우리가 어느정도의 위치에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주위에는 부자들의 이야기와 누가 얼마만큼의 부를 향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소식들이 넘쳐나서 나는 중간에도 못낄것 같은 느낌들을 받으실지도 모르겠지만, 관점을 세상전체로 넓혀보면 우리의 소득이 얼마나 높은지에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당신의 연소득이 5만2천달러 이상이라면(한화 약 6천2백만원) 전세계 상위 1퍼센트에 해당한다. 소득이 2만8천달러(한화 약 3천4백만원)만 돼도 전세계 5퍼센트에 든다. 심지어 연소득이 미국 빈곤기준선인 1만1천달러 이하라 하더라도 나머지 85퍼센트에 비교하면 부자다. 부유한 나라의 국민들은 주변사람과 자기를 비교하기 때문에 자신의 소득수준을 과소평가하기 쉽다. -냉정한 이타주의자 P.35-
이러한 소득의 상위층에 있는 우리는 같은 돈이라도 빈곤층을 위해 쓸 때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더 큰 선행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커피 한 잔 값이 인도의 극빈층에게는 더 쓸모있게 쓰여질 수 있다는 말이다. 저자가 강조하다시피 우리가 물 한방울 보탠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문제는 물 한방울의 크기지 양동이의 크기가 아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커다란 물 한방울을 만들어 낼 수 있고, 그것은 수천명의 삶을 바꿀 수 있다.
한 방울을 만들어 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이제 기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여기 알아둬야 할 중요한 부분이 있다. 처음에 말했다시피 좋은 일에도 냉정함이 필요한 것. 내가 기부한 돈이 효과도 없이 흐지부지 사라지면 내 돈과 그 돈을 모으기 위한 시간 그리고 좋은 의도가 다 의미없게 되어 버리지 않는가. 어느 곳에 기부해야 이러한 노력들이 더 효과를 내고 실질적으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효율적 이타주의에 필요한 5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혜택이 돌아가는가?(시간과 돈은 한정되어 있다)
2.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가?(평생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 해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할 것인가)
3. 방치되고 있는 분야는 없는가?(재난 사고에 울컥해 거기 돈을 기부하기 전 유사한 재난이 늘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하라)
4. 우리가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최빈국에서 의료행위를 하는 것보다 선진국에서 의사로 돈을 벌어 기부를 하는 편이 더 큰 효용을 가져올 수 있다)
5. 성공가능성은 어느 정도이고, 성공했을 때의 효과는 어느 정도인가?(기대가치 평가하기)
기부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나의 기부라는 행위가 최대한의(기대가치까지 포함해서) 효과를 내도록 위의 5가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해야할 것이다. 나의 돈을 투자해 물건을 살 때 물건이 괜찮은지 돈값?을 할 수 있을지 따져보는 것처럼, 기부 역시 냉정하게 판단해서 가장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곳에 하는 것은 결코 과한 일이 아니다.
기부단체를 선정하는 일에 있어서도 윌리엄 맥어스킬은 효율적인 기부처를 고를 수 있는 팁을 제시해주고 있다. 기부단체는 무슨 일을 하는지, 하고 있는 사업의 비용효율성은 높은지, 사업의 실효성이 객관적으로 검증되었는지, 사업이 제대로 투명하게 실행되고 있는지, 추가 자금이 필요한지 등을 따져봄으로써 좀 더 명확하게 단체를 비교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좀 귀찮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렇게 평가하는 일이 쉬운일도 아니다. '냉정한 이타주의자'책에서는 이런 방법으로 기부단체들을 평가해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온 단체부터 기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내가 현재 기부하는 단체들은 모두 국내단체인데 불행히도 국내기부단체는 (당연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을 평가해둔 것이 없다. 국내에 있는 기부단체들을 어느정도라도 평가하는 것은 이 책을 제대로 소화하고 난 이후에 조금씩 도전해봐야 할 숙제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 필요한 부분이 또 있다. 나는 공정무역이 붙은 제품을 되도록 사려고 노력했고, 가난한 나라에서 공장을 세워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글로벌 기업을 아니꼽게 보고있었는데 실상은 나의 생각과 너무나 달랐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분노해서 가난한 나라에서 생산된 제품을 불매한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불매운동에 굴복해 글로벌기업이 공장을 철수하기라도 한다면, 남은 사람들은 행복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대안이란 더 열악하고 형편없는 일자리 혹은 실직이다.그러니 선진국에서 노동착취공장이라고 불리는 곳에 가난한 사람들은 더 취직하려고 애를 쓴다. 경제학자들도 노동착취공장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학자들이 입을 모아 노동착취 공장을 옹호하는 건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저임금 농업위주 경제사회가 더 부유한 산업사회로 나아가는 데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냉정한 이타주의자 P.185
실제로, 1993년 미 아이오와 주 신진 상원의원 톰 하킨이 발의한 아동노동억제법 때문에,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5만명에 달하는 아동 노동자들을 발 빠르게 해고했는데, 이 아동들은 학교로 돌아가거나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떠난 것이 아니라 더 적은 임금을 제공하는 영세한 회사에 들어가거나 길거리 사기단에 합류하거나 심지어 성매매까지 내몰린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선의로 한 행동이 오히려 재앙을 가지고 온 것이다. 냉정한 판단없이 감정에 치우쳐 남을 돕는다고 한 행위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된 사건이다.
공정무역 인증 상표가 달린 제품을 산다고 해서 실제로 그 생산자가 더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돈을 더 주고라도 공정무역 제품을 사는데, 많은 연구결과들은 공정무역이 농촌 극빈층의 생활을 개선시키는데 효과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윌리엄 맥어스킬교수는 웃돈을 주고 공정무역제품을 사느니 그 웃돈을 효율적인 기부처에 기부하는 게 낫다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윤리적 소비가 주는 도덕적 허가 효과는 오히려 해를 끼칠수도 있는데, 윤리적 소비를 함으로써 착한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비윤리적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용납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은 착한 일도 똑똑하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갑작스런 재난을 겪는 사람들을 보며 눈물짓고 기부를 하는 대신, 그 돈으로 이미 산재해 있는 더 큰 비극을 위해 기부를 할 수 있는 냉정함이 필요하다. 공정무역으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더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다, 그것을 뒷받침할 연구결과가 있는지 찾아보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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