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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츄리 보이에게 서울이란

문 샤이너스

by 비둘기

내가 초등학생 때, 누나는 가끔 뮤지컬을 보러 광주를 떠나 서울에 갔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자, 서울 갔던 누나가 돌아왔다. 누나는 베란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도넛 있어. 먹어.”

베란다에 있던 도넛은 찹쌀 도넛도 던킨 도넛도 아니었다. 하얀 상자를 열어보니, 소금 같은 껍데기로 덮인 도넛이 나왔다. 도넛을 집자 엄지와 검지가 끈적해졌다.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식감과 동시에 온 혀에 달콤함이 퍼졌다. 태어나 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놀란 눈으로 누나를 쳐다봤다. 누나는 말했다.

“그거 서울에만 있는 도넛이야. 크리스피 크림도넛.”

그날 이후, 누나가 서울에 갈 때마다 나는 누나를 기다렸다. 돌아오는 누나 손엔 언제나 크리스피 크림 도넛이 있었다.


나에게 서울이란 크리스피 크림 도넛이었다.




내 고향 광주. 광주는 스스로를 문화도시라 불렀다. 하지만 가끔 열리는 비엔날레 전시 이외엔 문화랄 게 전혀 없었다. 누나가 좋아하는 뮤지컬도, 내가 좋아하는 락밴드도 볼 수 없었다. 누나는 가끔 친구와 함께 뮤지컬을 보러 서울로 갔다. 락밴드는 좋아하는 친구가 없었다. 함께 서울로 떠날 동지가 없던 나는 컴퓨터 모니터 속에서 그들을 만났다. 네모난 화면을 보며 다짐했다.

‘내 언젠가 꼭 한양으로 가리라.’



어느 날 광주의 유일한 라이브 클럽이었던 ‘네버 마인드’에서 인디뮤직 페스티벌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라인업을 보니 굉장했다. 내가 동경하는 밴드. 홍대에서 날리는 밴드. 즉, 서울 밴드가 줄줄이 있었다. 9와 숫자들. 비둘기 우유. 한희정 밴드. 옐로우 몬스터즈, 문 샤이너스. 이들을 한곳에서 볼 수 있다니. 종합 선물 세트가 따로 없었다. 이제부터 광주가 문화도시라는 걸 인정해 주기로 했다. 열심히 동지를 찾았지만, 실패했다. 결국 혼자 라이브 클럽 네버마인드로 향했다. 외롭지만, 괜찮았다. 오늘은 서울 밴드를 보는 날이니까.


무대는 연건 자랑스러운 광주 밴드였다. ‘팡팡밴드 난반댈세’와 ‘베티애스’ 등의 밴드가 있었다. 거의 20년을 광주에서 살았는데, 광주 밴드의 존재는 그날 처음 알았다. 무대는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한 가지 기억은 또렷하다. 베티에스는 강력한 헤비메탈 음악을 들려준 뒤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러분!! 저희 베티에스가 이번에 서울에서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지방 밴드의 서울 진출은 BTS의 빌보드 차트 1위만큼이나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광주 밴드 ‘팡팡밴드 난반댈세’에서 드럼을 연주하던 ‘김종익’은 색다른 방법으로 서울에 진출한다. 그는 드럼 스틱이 아닌 분필을 들었다. 록스타가 아닌 스타강사가 되었다. 김종익은 메가스터디 윤리 과목 1타 강사이다. 그는 지금도 가끔 수험생들을 격려하기 위해 드럼 스틱을 잡는다. 인생사 한 치 앞을 모른다.




광주 밴드의 공연이 끝나고 기다리던 서울 밴드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서울 밴드를 넘어선 서울대 밴드 9와 숫자들. 슈게이징이라는 장르를 알게 해 준 비둘기 우유. 늘 에너지 넘치는 무대를 보여주던 옐로우 몬스터즈. 홍대 여신 그 자체였던 한희정. 그들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서울 밴드는 다르구나’.


뮤직 페스티벌에서 마지막 무대를 서는 사람을 헤드라이너라고 부른다. 헤드라이너 무대는 늘 가장 임팩트 있는 밴드가 선다. 밴드를 줄 세우는 것이 로큰롤 정신은 아니겠지만, 헤드라이너는 헤드라이너다운 밴드가 서야 뒷말이 없다. 그날의 헤드라이너는 바로 ‘문 샤이너스’였다. 그들은 ‘누가 봐도’ 헤드라이너다운 밴드였다.


문 샤이너스의 명성은 이미 자자했다.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 중 26위를 차지한 노브레인 1집 <청년폭도맹진가>. 당시 노브레인의 기타리스트였던 차승우는 이 앨범을 만든 주역이다. 대부분 노래를 그가 작곡했다. 음악적 견해 차이와 이런저런 문제로 차승우는 노브레인을 탈퇴한다. 그리고 ‘문 샤이너스’로 다시 태어나 본인 만의 스타일을 마음껏 펼친다. 그는 첫 앨범 <모험광 백서>에 무려 30곡을 담았다. <모험광 백서> 30곡을 모두 듣고 나는 생각했다.

‘독특한 음악이구나.’

그게 다였다. 차라리 옐로우 몬스터즈가 더 헤드라이너에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날 ‘문 샤이너스’가 무대에 올라오자마자 내가 경솔했다는 걸 깨달았다. 트레이드 마크인 하얀 요리사 재킷을 입은 그들은 시작부터 관객을 압도했다.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다고 그댄 내게 얘기하지

그대가 말하는 세상엔 애당초 난 흥미가 없어요

언젠가는 알게 될걸 내가 틀림이 없다는 걸

어느샌가 알게 될걸 내가 번쩍번쩍할 거란 걸

<모험광백서 – 문 샤이너스>


차승우. 그는 소문대로 기타의 신이었다. 곡의 스타일에 맞게 기타를 자유자재로 연주하며 관객을 흥분시켰다. 다른 멤버들도 만만치 않았다. 베이스 최창우는 몸짓은 많이 삐걱거렸지만, 리듬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드럼 손경호는 드럼 연주의 교과서라 불려도 좋을 만큼 정직한 궤적으로 드럼을 쳤다. 알고 보니 베이스 최창우와 드럼 손경호는 버클리 음대 출신이었다. 세컨 기타 백준명도 차승우에 밀리지 않는 기타 실력을 보여주었다. 역시 헤드라이너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헤드라이너다운 밴드가 하는 거다.



그들은 공연 중간에 맥주를 마시고, 담배도 태웠다. 고등학생 소년은 그들의 모든 행동이 멋져 보였다. 담배와 맥주가 락밴드라면 갖춰야 할 필수적인 덕목으로 느껴졌다. 훗날 어른이 된 내가 아주 잠깐 담배에 손을 댄 건, 어느 정도 문 샤이너스의 책임이 있다. 내가 지금까지 맥주를 사랑하는 것도 아주 조금은 문 샤이너스의 책임이 있다. 그만큼 문 샤이너스는 그날 나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누나가 사 온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처음 먹은 날이 떠올랐다.


그날 이후, 나에게 서울이란 문 샤이너스였다.




돌이켜보면 서울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참 감사하다. 덕분에 서울 사람이라면 느끼지 못할 감정을 많이 느꼈다. 충장로에 <아웃백 스테이크 하우스>가 생긴다는 소식을 듣고 느꼈던 설렘. 패밀리랜드(광주에선 주로 훼미리랜드라고 부른다)와 롯데월드의 규모 차이에서 느낀 충격. 서울에 놀러 갔다 와서 ‘서울은 차가 엄청나게 막혀’, ‘서울은 지하철이 엄청 복잡해’, ‘서울에선 한 시간 거리면 가까운 거야’, '서울엔 신기한 게 엄청 많아.' ‘서울에선 이미 노스페이스 인기 끝났어.’, ‘네가 서울을 잘 모르나 본대’, ‘서울은 절대로 그렇지 않아.’ 등의 무용담을 펼치던 컨츄리 보이, 컨츄리 걸, 컨츄리 꼬꼬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느꼈던 부러움. 이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의 모든 것을 당연하게 누리고 자란 서울 토박이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컨츄리 출신의 감정이다.



몇 년 뒤, 서울에서 자취하게 되며 소년의 꿈은 이뤄진다. 꿈에 그리던 서울에 왔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미 크리스피 크림 도넛은 광주 어디서나 먹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더 이상 누나가 서울에서 사다 준 그 도넛 맛이 나지 않았다. 문 샤이너스는 내가 서울에 살 때 활동을 멈췄다. 앨범을 준비하고 있는지, 해체한 것인지 알 수도 없었다. 서울에 오니 꿈에 그리던 무지개는 없었다. 무지개는 멀리서 바라볼 때 더 아름답게 보인다.



크리스피 크림 도넛을 처음 먹어 봤을 때 느꼈던 맛. 문 샤이너스 공연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멋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맛있는 것도 먹고, 여러 밴드의 공연도 보고, 연극도 보고, 공원도 가고. 하지만 그 이상의 감동은 찾지 못했다. 행복은 결핍이 있을 때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풍족하게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이젠 전혀 부럽지 않다. 여전히 나에게 역대 최고의 맛은 누나가 사준 크리스피 크림 도넛이다. 역대 최고의 공연은 광주 ‘네버 마인드’에서 본 문 샤이너스의 무대이다.



그래서 여전히

나에게 서울이란 ‘크리스피 크림 도넛’이다.

나에게 서울이란 ‘문 샤이너스’다.



시시껄렁한 지구에서 무엇보다 빛나는 것은

그다지 비싼 건 아닐 거야 가진 건 아무것도 없지만

낯설은 거리의 외톨이지만 반짝이는 별들을 보며

고개를 떨구진 않을 거야 나는 사내아이니까

<Woo-Hoo-Hoo – 문 샤이너스>




<비둘기 추천 문샤이너스 플레이 리스트>

1. Lonely Lonely

2. 모험광 백서

3. 푸른 밤의 Beat!

4. 기분이 좋아

5. Bye Bye Bye

6. Woo-Hoo-Hoo

7. 검은 바다가 부른다

8. 나는 아직 미치지 않았다.

9. 나보다 어리석은 놈, 그 아무도 없구나

10. Yeah Yeah Yeah Ye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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