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전 반차를 내고 상급종합병원에 다녀왔다. 회사 동료들에게 퇴사 소식을 전하자 휴직도 한 번 고려해 보라는 조언을 받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견서를 받아보고자 진료를 예약했다. 한편으로는 큰 병원인만큼 전문적인 상담을 기대하기도 했다.
간단한 설문지를 작성하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왜 진료를 예약하게 됐는지, 요즘 어떤지 등을 얘기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맞나 의심될 정도로 무지성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요즘 살이 너무 쪄서 걱정이에요라는 말에 밥이 그렇게 맛있어요?라고 답한다거나, 내가 다툰 사람에 대해 얘기할 때 그 사람은 다운 씨랑 화해할 생각 없어요~라고 대뜸 역정을 낸다. 비유지만, 실제 내 이야기에 저런 식의 답변이 돌아왔을 때는 몇 배로 당혹스러웠다.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는 사람이 어떻게 입술을 가볍게 휘두를 수 있는 걸까. 얄팍한 주관과 판단이 두껍게 발린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푹푹 찔렸다.
내가 치료를 받으러 온 건지 상처를 받으러 온 건지 헷갈릴 무렵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우울증 약을 처방해 줬고, 나는 받자마자 가방에 구겨 넣었다. 이런 의사에게 처방받은 우울증 약이 무슨 소용일까. 약국에서 약사를 붙잡고 푸념해도 이것보단 나을 것이었다.
이십 대 초중반에 자주 느꼈던 감정이 신물처럼 올라왔다. 일종의 기시감 같은 거였다. 누가 봐도 헤어지는 게 마땅한 연애를 할 때, 헤어지라는 말을 밥 먹듯 듣던 일. 좋아하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그냥 잊고 새로운 사람 만나라는 말을 듣던 일. 놀랍도록 두 말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도, 기분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내가 바랐던 건 해결책이 아니라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거였으니까.
그냥 헤어져, 그냥 잊어라는 말은 마치 정시로 서울대 가~, 매일 아침 2시간씩 공복 유산소 해~ 같은 말 같다. 노력하면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노력이 못 견디게 힘든 거 알면서 모르는 척 던지는 말. 그런 말은 비겁하고 힘이 없다. 어떤 도움도 위로도 안 돼서 들을수록 기운이 쪽쪽 빠진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지 누군가 나에게 연애상담을 하거나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주로 잘 들어주는데 집중하게 됐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라고 조언을 구하지 않는 이상 내 생각을 섣불리 늘어놓지 않는다. 애초에 고민상담이라는 게, 대부분은 누군가 내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을 기반으로 하니까.
내 이야기를 했을 때 말을 아끼고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은 귀하다. 말을 아낀다는 건 상대의 감정을 살핀다는 것이고, 가만히 들어준다는 건 상대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 다정함이야말로 지능이라는 말이 있던데, 가만히 들어주는 다정함을 생각하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따뜻한 다정함이 아닐까.
ps. 때로는 글로 재잘재잘 완성되는 '조용하고 따듯한 다정함'도 좋다